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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Jbenitora Jul 03. 2022

영어 귀가 막힌 날

호주

다윈은 호주의 노던 테리토리(준주)의 주도이다. 인도네시아와 인접해 있어 연중 높은 기온이다. 동남아의 날씨는 사랑하지만 시끌벅적함은 피하고 싶은 사람에게는 너무나도 살기가 좋은 곳이다. 


호주 1년 살기를 위해 다윈으로 입국하였다. 막연히 호주 살기라면 시드니, 멜버른과 같은 대도시로 가는 것이 비용이나 시간 상 이득일 수 있지만 다윈은 그런 것을 포기할 만하다고 여겼다. 말레이시아와 싱가포르를 거쳐 다윈으로 들어오는 길이 멀었지만 여행은 목적지로 가면서 겪는 경험이 90%라는 평소의 지론이 있기에 돌아 돌아 목적지로 가는 길이 즐거웠다. 새벽 3시경에 도착한 다윈 공항은 울산 공항보다도 규모가 더 작았다. 다윈이 호주 북쪽 광대한 노던 테리토리의 중심도시이긴 하지만 10만 명 밖에 살지 않으니 지방 도시지만 100만 명이 사는 울산 공항보다 작을 수밖에 없었다.


가방을 찾아 나오니 다른 승객들은 렌터카로, 택시로 모두 흩어지고 몇몇의 배낭여행객들과 나만 덩그러니 남았다. 시내로 나가기 위해 공항버스를 기다리기로 했다. 가이드북에는 오전 7시에 버스가 온다고 적혀있었다. 공항 구석에서 쪽잠을 자고 6시쯤 일어났다. 그사이 주변에서 같이 자던 배낭여행객들은 어디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화장실에 가서 세수를 하고 가방 속 짐 정리를 하고 공항 내부에 뭐가 있는지 둘러보고 승강장으로 향했다. 그래도 시간이 좀 남았지만 기다리는 것은 익숙한 일이었다. 한데 막상 7시가 되었는데도 버스가 나타나질 않았다. 주변에는 버스가 왜 안 오는지 물어볼 만한 사람이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택시를 혼자서 타고 가기에는 기다린 시간이 아까웠다. 버스의 5배가 넘는 택시비 역시 막 호주에 발을 들인 여행자에게 너무 부담되었다. 걸어 나갈까도 했지만 지도 상으로도 시내까지는 상당한 거리가 있었다. 맞는지 알 수 없는 버스 일정표에 따르면 다음 버스가 오기까지 1시간을 더 기다려야 했다. 머리가 복잡해지고 있는데 마침 공항직원이 지나갔다. 노란 턱수염에 덩치가 프로레슬러처럼 큰 남자 직원이었다. 공항버스가 안 오는데 어떻게 시내로 나갈지 모르겠다고 말을 걸었다. 그 직원은 호주 억양이 잔뜩 묻어나는 발음으로 뭐라 뭐라 길게 말해주었다. 전혀 알아듣지 못하였다. 불어나 포르투갈어처럼 아예 접해보지 않은 언어를 듣는 느낌이었다. 그 사람은 내가 못 알아듣자 천천히 몇 번 더 말해주고는 멍한 내 표정을 보고 고개를 좌우로 돌리더니 자기 할 일을 하러 떠났다. 말 한마디 못 알아듣는 후줄근한 아시아인, 그게 객관적인 나였다. 차라리 그가 내 질문을 받았을 때 'I don't know'라고 말하였다면 좋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필리핀에서 계단식 논으로 유명한 바나우에를 여행할 때 아침 산책을 갔던 때도 비슷했다. 필리핀 산간의 상쾌한 공기를 온몸으로 마시며 1시간쯤 걷고 숙소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길을 잘못 들어 계단식 논 중앙으로 나오는 바람에 논두렁을 조심히 밟으며 내려오고 있었다. 그때 저 아래에서 어떤 풍채 좋은 중년의 아주머니가 나를 보며 영어로 큰소리로 질문을 하였다. 

"거기는 왜 갔냐?"

"넌 누구냐?"

아주머니의 질문에 길을 잃은 여행객이라고 대답하였는데 그 뒤로도 어디 묵는지, 수상한 일을 한건 아닌지와 같은 몇 가지 질문이 이어졌다. 아주머니의 속사포 같은 질문도 질문이지만 갑자기 나의 상황을 설명을 하려니 영어가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끝에 가서는 문장을 못 만들고 영어 단어만 말하고 있었다. 아주머니는 나의 대답을 다 듣더니 내 상황을 이해한다고 했다. 그리곤 마지막으로 한 마디를 남겼다. 

"이봐 사우스 코리안, 영어를 얼마나 배웠는지 모르겠는데 너 영어 그렇게 하면 안 돼"

아침부터 처음 보는 현지인 농부 아주머니의 뼈아픈 일격에 정신이 멍했다.

중학교부터 대학교까지 10년간 정규 교육을 받고 공부 안 하고 쳐도 토익 800점은 나오는, 며칠 전까지 바기오에 있는 한국어를 쓰지 못하게 하는 어학원에서 석 달간 영어 말하기를 배운 나의 영어실력이 평범한 필리핀 아주머니의 발끝에도 미치지 못한다는 현실을 마주한 것이었다.


영어가 공용어인 필리핀도 아니고 영어가 국어인 호주에서 귀머거리가 되다 보니 여행객의 자신감은 순식간에 바닥을 기었다.

'그 직원의 말이 왜 안 들릴까? 난 무엇이 부족한 것일까? 들려야 어떤 말이라도 해 볼 수 있을 텐데...'

수많은 생각을 하면서 공항을 배회하였다. 그러고 좀 있으니 다음 비행기가 도착했다. 내린 사람들 중에는 공항버스를 기다리려는 사람들이 있었다. 아직 버스시간까지는 30분도 더 남아있었다. 이전 버스가 안온 탓에 다음 버스도 제때 도착할지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같이 기다리는 사람들 중에 당차 보이는 한 젊은 여자가 다가왔다. 택시를 타고 갈 건데 셰어 할 거냐고 물었다. 프랑스에서 왔다는 이 여자의 발음은 귀에 들어왔다. 짐을 찾아 나오는 다윈 현지인 아주머니까지 3명의 셰어 인원이 모이자 각자 분의 돈을 내고 다윈 시내로 나왔다. 꽤 먼 거리를 택시로 이동하면서 아까 답답한 마음에 시내로 걸어갈까 생각했던 것을 실행에 옮기지 않은 것이 천만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택시기사는 운전 중에 간간이 질문을 했고 보조석에 앉은 프랑스 여자가 간단하게 대답하였다. 그들의 대화를 이해할 수 있었지만 아까 낮아진 자신감 때문에 기사가 나에게 질문을 하지 않게 시선을 딴 데 두었다. 시내에 도착했고 택시에서 내렸다. 뒷좌석에 나란히 앉았던 현지인 아주머니와 잘 가라는 눈인사를 나누고 프랑스 여자에게도 인사를 하려는데 그녀는 우리가 같이 택시를 탄 적이 없던 것처럼, 아니 만난 적이 없던 것처럼 냉담하게 갈 길을 갔다. 이게 서양사람들의 일반적인 행동양식인지 후줄근한 나와 거리를 두려는 의도적인 행동인지 알 방법은 없었다. 자신감이 낮아지니 원래라면 신경도 안쓸 생판 남의 행동 하나에도 의미를 두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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