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 응원에 흠뻑 빠져
계속 쓰는 사람으로 살자고
오늘의 단어채집
흠뻑
1. 부사 분량이 차고도 남도록 아주 넉넉하게.
2. 부사 물이 쭉 내배도록 몹시 젖은 모양.
요즘 쓰는 일이 자꾸만 버겁게 느껴져서 괴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쓰는 사람으로 살고 싶다고, 뭐라도 쓰자고 다짐했던 나는 온데간데없고 무기력하게 늘어져 있는 나를 볼 때마다 그렇게 한심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도 쓰기보다는 미루기가 편했고 자연스레 따라오는 자기혐오 앞에 처참히 무너지곤 했다.
나는 왜 쓰는 걸까.
내가 왜 쓰고 싶은지를 제대로 알아야 앞으로도 계속 쓸 수 있다. 그래서 계속 생각만 하고 생각을 하다 보니 머릿속만 복잡하고 생각에 기력을 빼앗겨 자꾸만 몸을 둥그렇게 말아 구겨져 있었다. 내내 생각한다. 무엇을 쓰고 싶은 거지? 나에겐 쓸만한 커다란 이벤트가 없다. 일상은 너무나도 단조롭고 평범하기 그지없다. 매일 똑같이 굴러가는 하루에서 무얼 찾을 수 있을까. 별 볼 일 없는 이 보통날을 풀어낼 문장이 있을까. 그렇게 가만히 가만히 바닥으로 천천히 느린 속도로 침잠한다.
언젠가는 책을 내고 싶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보통의 일상을 살아가면서도, 쓸만한 건 하나도 없다고 투덜대면서 쓰고 싶다는 욕망은 쉽게 사그라지지 않았다. J가 곧 책이 나온다고 했다. 나에게도 비밀스럽게 나온 책이 한 권 있다. 우리는 책이 나왔다는 소식을 서로에게 전했다. 단 한 편일지라도 이게 시작이 되어 앞으로 나아가는 작은 발걸음이 될 것이다. 뒤로 물러나는 일은 없을 테니까. 이제 뭐라도 한다면 한 발짝 앞으로 나아가는 일이니까. J가 말했다.
무럭무럭 자라나세요.
이미 다 자라버린 나이가 되었지만 아직도 무럭무럭 자라날 수 있는 게 있다면, 그건 바로 꿈이다. 무럭무럭 자라 커다란 나무가 될지 금세 시들어버릴 하찮은 꽃 한 송이가 될지 모를 일이다. 아니, 커다란 나무가 되는 일보다 시들어버릴 꽃이 더 빠르겠다. 그러나 꽃 한 송이 피우는 일이라 하더라도 그 꽃을 피우기 위해 애쓰는 나 자신을 보고 싶다. 그렇게 꽃 한 송이, 한 송이 피우다 보면 커다란 나무는 아니어도 꽃밭은 되어있겠지. 그렇게 나만의 꽃으로 가득한 꽃밭을 만들고 싶다.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소식에 시끌벅적한 SNS에서 DM이 하나 날아왔다. B는 블로그에 매일 필사와 글쓰기를 하고 있어서 서로 응원해 주는 사이다. 나의 100일 글쓰기챌린지가 끝난 걸 아쉬워한 사람이었다. B는 나의 리뷰를 보고 몇 권을 책을 샀다고 했다. 책을 찾아보다가 나의 리뷰를 다시 읽었고 나에게 말했다.
그대 미쳤어요. 진짜.
나는 안희연 시인의 당근밭 걷기에 빠져 있어서 당근밭 걷기 시집이 미쳤다는 걸로 이해했는데 나의 리뷰를 보고 말한 것이었다. 미쳤다. 다른 말로 표현할 수도 있겠지만 미쳤다는 문장 앞에서 이건 엄청난 찬사가 아닌가, 싶어서 소리 지를 뻔했다. 별거 아닌 문장일 수도 있다. 나를 띄워주는 다정한 칭찬이 분명하다. 그러나 나의 글을 읽고 좋다고 말해주는 사람이 있다는 건 무척이나 기분 좋은 일이다. 사실 몇몇 사람들에게서 나의 리뷰가 좋다는 말을 들었다. 대놓고 기뻐하기보다 겸손하게 웃곤 했는데 어느 순간 좋다고 말해준 사람에게 감사와 기쁨의 마음을 전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내 글이 좋다고 하는데 내가 내 글을 하찮게 여길 순 없었다. 그들이 있어서 포기하지 않고 쓸 수 있었으니까 말이다.
나를 뭉클하게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나의 부족한 글을 다정한 눈으로 봐주고 칭찬해 주며 나를 쓰다듬는 말들이 있었다. 그들에게 나의 마음을 전해주고 싶어서 글을 썼다. 나는 내가 어렵고, 나의 마음이 복잡하여 어찌할 줄 모르며 살았다. 그 마음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어떻게 전달해야 할지 몰라서 전전긍긍했다. 그래서 내 마음을 풀어내고 싶었고 당신을 알고 싶었고 당신에게 가까이 가고 싶었다. 나도 잘 모르겠는 나를 들여다 보고 조용히 응원하는 마음을 안다.
지난봄에 만난 시인이 말했다. 지면에서 뵙는 날을 기다린다고. 그리고 시인을 다시 만났을 때 시인은 다시 말했다. 지면에서 곧 만나리라는 굳은 믿음을 갖고 있다고. 스스로를 믿고 그저 써온 그대로 계속계속 써 나가기만 하면 더 좋은 글을 쓸 수 있을 거라고. 이미 예민하고 섬세한 감각을 문장화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사람이라고.
다정한 이들의 응원의 물결이 잔잔하게 흘려들었고 그 물결은 이제 커다란 파도처럼 나를 덮쳐온다. 그 물결에 흠뻑 빠져 허우적댄다. 내가 가진 것에 비해 과분한 마음들이었다. 단단한 마음밭을 가지지 못했던 나는 이리저리 휩쓸리고 가라앉았다가 힘껏 발버둥 치면 수면 위로 올라온다.
내가 왜 글을 쓰는지 이제야 알겠다.
나는 나의 문장이 당신에게 가닿기를 바라며 쓴다.
당신이 내 마음을 알아주길 바라면서.
당신이 나의 문장으로 위로받기를 바라면서.
덩달아 나 또한 위로받으면서.
그런 다정하고 애틋한 마음으로 쓰고 싶어서.
이토록 강렬하고 다정한 응원이 있을까. 나를 끌어올려주는 당신들이 있어 나는 쓴다. 당신들의 마음에 흠뻑 젖어버렸으니 갚을 길은 계속 쓰는 것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