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침내 멸망하는 여름, 정
영원할 것만 같았던 당신이 어느새 떠났어요. 바람결에 겨울이 묻어나서 흠칫 놀라고 말았어요. 눈부신 당신을 똑바로 바라보지 못하고 손바닥으로 얼굴을 감쌌죠. 손가락 사이로도 빛은 스며들고 눈을 감아도 당신이 시선이 느껴져요. 이토록 강렬하고 기어이 나를 관통하는 순간이 있었을까요? 사랑한다는 말보다 보고 싶다는 말이 더 그리워요. 우리가 함께했던 시간이 찰나와도 같아서, 계절이 흐르는 것을 함께 바라보고 싶다고 했던 부질없는 약속이 흩어졌어요.
오아시스인 줄 알았는데 신기루였던 걸지도 모르겠어요. '사랑한다는 말을 책갈피로 만들어 두는 일(여름.com)'을 두고두고 하는가 봐요. 책을 펼치면 당신이 있으니까요. '우리의 낭만은 다 어디로 흘러간 거예요? 지키지 못한 것들이 쏟아질 때마다 눈물을 머금고(낭만화)' 눈물 대신 망가진 마음을 짓이겨요. 사람이 싫었고 믿을 수 없어서 밀어내기만 했었지요. 그래서 누구라도 사랑하지 못할 거라고 믿었는데 외로워서였을까요? 그토록 바라던 당신이어서였을까요? 같은 마음이 무척이나 포근했나 봐요. 다정하고 싶었고 다정하게 다가왔던 그 포근함에 얼었던 마음이 풀어졌나 봐요. 나도 모르는 사이 당신에게 가고 었었어요. 그렇게 눌러뒀던 마음은 너무 뜨거워져서, 나도 모르게 불타올라서 온몸에 화상을 입고 말았다고, 살갗이 익어가고 껍질이 벗겨지고 화들짝 놀라 아프고 무서워져서 뒷걸음질 치고 말았다고, 그래서 나약하고 서툰 마음을 거두어들인 거겠죠.
'우리는 영원하지 않지만
여름 속 우리의 낭만은 영원한 마음으로(낭만적 여름)'
다 거짓말이에요. 우리의 여름은 진작 멸망해 버렸고 마침내 멸망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멸망해 버린 여름에 도착했던 거예요. 그래서 우리의 낭만은 손가락 사이 모래알처럼 사라져 버렸어요. 그런데 바람이 불어와 모래알을 뒤집어썼던가요? 자꾸만 떨어지는 모래알이 나타나면 나는 다시 당신에게로 돌아가요. 그곳에는 나 혼자 있어요. 갇혀버렸거든요.
'영원히 영원히
그러나 영영 돌아오지 않을 어제의 꿈에게
기억에서 열병을 앓는 어제가 몸속으로 스며들고 있었다(푸른 열병을 앓던 수많은 꿈에 대해)'
갇혔다고 말했지만 사실 가둔 건 나 자신이에요. 모래알 같은 기억이 자꾸만 당신을 불러와요. 그렇게 나 홀로 기억의 바다를 거닐다가 그 바다에 뛰어들어 아래로 아래로 가라앉다가 발버둥 치며 기어 나오고. 그렇게 쳇바퀴 돌 듯 영원히 영원히. 하지만 영원은 없으므로.
이제는 당신을 떠나 겨울로 돌아갑니다.
눈부셨던 찰나의 그 시간들을 마음에 품고서.
없는 영원을 손에 꼭 쥐고서.
나의 당신에게.
나의 여름에게.
나의 마음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