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조금 일찍 숙소를 나섰고 지난 열흘동안의 크라쿠프와 한 발짝 한 발짝씩 작별인사를 하며 기차역에 도착해서 3번 플랫폼으로 올라갔다. 이동할 동안은 물을 포함한 음식은 먹지 않으려고 하기에 기차시간이 한 시간 정도 남아있었지만 플랫폼 의자에 앉아있기로 했다. 아침 11시 5분.
3번 플랫폼에서 크라쿠프 공항으로 가는 열차가 막 출발을 했고 시간이 약간 엉킨 듯 대기 중인 열차 한대가 한 시간 뒤 내가 탈 열차가 서 있어야 하는 2번 섹터에 오랫동안 서 있었고 플랫폼엔 사람이 없었다. 영하 3도였지만 겹쳐 입은 옷과 코트로 충분했다.
휴대폰으로 오늘 일정을 정리하고 있는데 친절해 보이는 초췌한 젊은 남자가 수심이 가득한 얼굴로 다가와 말을 걸었다. 대충, 기차표를 사야 하는데 돈이 없다는 말을 하는 중인 것 같아서 다른 사람에게 알아보라고, 난 영어도 잘 못하고 돈이 없다고 말을 했는데 자기 휴대폰을 꺼내서 번역기 어플을 찾아가며 내 모국어를 물었다. 난 그냥 내 폰의 번역기 어플을 열고 '영어'로 말하라고 하면서 마이크 버튼을 눌러 그에게 내밀었다.
그는 내 폰의 마이크 작동 상태를 꼼꼼히 확인하면서 또박또박 말을 했다. 예상했던 대로의 말이 휴대폰에 찍혔고 그는 내가 자신의 말을 제대로 이해한다면 기꺼이 지갑을 열어서 돈을 줄 거라는 확신에 찬 눈으로, 그리고 내 폰 화면에 자기 말이 정확히 타이핑된 것에 안도하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대략 250 즈워티 정도의 열차티켓을 구입해서 가야 하는데 200 즈워티밖에 없다는 내용이니까 50 즈워티가 목표액이었나 보다. 11시가 넘었는데 10시 40분 기차티켓 구입비 부족분을 달라는 내용이었지만, 난 쿨하게 말했다.
'나 현금 없어. 크레디트카드만 가지고 다녀.'
그는 정말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으로 다시 물었다.
'뭐라고? 크레디트카드만? 왜? 유로나 달러는 있을 거 아냐? 어느 나라에서 왔어?'
'다른 사람한테 물어봐. 난 없어. 유감이야'
그는 잠시 내 눈을 바라보다 일어나서 플랫폼을 내려갔다.내 핸드폰을 채 갈 수도 있었고 더 험한 말로 겁을 줄 수도 있었겠지만 그냥 내려갔으니 그는 착한 젊은이였다. 폴란드의 치안은 비교적 안정적이었으므로 백주대낮의 기차역 플랫폼에서 내 휴대폰을 빼앗길 염려는 없다는 신뢰가 확인되었다.
아이들이 어렸을 적에 나는 종종 아이들에게 부탁했었다. 혹시 길 가다 너희들을 붙잡고 길을 가르쳐달라는 어른, 혹시 어려움이 생겼으니 도와달라는 어른을 만나면 뒤도 돌아보지 말고 도망가라고. 길을 모르거나 도움이 필요하면 어른은 어른에게 부탁해야 하는 거라고. 너희들이 그런 어른을 도와줄 의무가 없는 거니까 안심하고 도망가라고 자주 말했었다.
같은 이유였다.
기차표 살 돈이 필요하면 같은 말을 쓰는 사람에게 부탁하는 거니까. 번역기가 필요한 사람에게는 그런 부탁 같은 거 안 해도 되는 세상이니까. 그에게 내가 미안함을 느낄 필요는 없었다.
기차는 10분 정도 늦게 들어왔고 생각보다 시설이 좋았던 기차의 16번 웨건, 42번 창가좌석을 약간 어렵게 찾아 옆자리의 젊은 여성을 약간 불편하게 세워두고 가방 정리를 하면서 자리에 앉아 폴란드 철도 어플에서 신용카드로 구입한 열차 티켓 큐알코드를 두 번 확인받으면서 예정시간보다 25분 늦게 목적지인 브로츠와프에 도착했다.
이곳에서 묵을 숙소를 예약할 때 호스트는 신속하고 친절하게 현관 출입 코드와 아파트 출입문 열쇠를 찾는 법을 문자로 보내주었다. 예약사이트에는 지번주소가 올라와있었는데 그가 보내 준 것은 스트릿주소여서 잠시 헷갈린 내가 지번주소가 맞는지 다시 물었더니 곧바로 구글맵에 나온 위도 경도 좌표까지 보내주었다.
보내 준 코드로 문을 열고 리프트를 타고 우회전 두 번을 하고 키박스 비밀번호를 열어 키를 꺼내서 집 안으로 들어와 보이는 창밖으로 아마도 재건축을 하게 될 빈집이 보였다. 옆집 빈집뷰이지만 햇살이 넉넉하게 들어오고 도로변 소음이 적게 들리는 기차역에서 5분 거리의 훌륭한 아파트다. 벽에 있는 그림을 비롯해서 나름대로 감각적으로 꾸민 실내공간에 놓인 가구와 소품들은 크라쿠프의 아파트에서와 같이 이케아 제품으로 통일되어 있다.
집 앞에 있는 케밥집에서 미국스타일의 치킨케밥토르티야 하나를 포장하고 자브카편의점에서 주스와 빵과 커피 한 잔을 사서 숙소로 돌아와 점심 겸 저녁식사를 했다.
고대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던 크라쿠프 구시가지의 산책 풍경과 달리 유럽 각국의 문화와 전통이 어우러진 복합문화도시라는 설명이 붙은 브로츠와프에서의 산책풍경은 약간 분주하다. 편의점에서 에스프레소 투샷 추출이 끝나고 뜨거운 물을 채우는 법을 물어보고 싶었지만 칸막이가 된 안쪽 계산대에 서 있는 무뚝뚝한 아저씨와 긴 줄에 살짝 주눅이 들어서 그냥 뚜껑을 닫았다. (물은 숙소에 가서 끓여서 채웠다.) 바게트 빵이 2/3밖에 들어가지 않는 봉투를 골랐기 때문에 머리가 삐져나온 빵을 계산하며 아저씨는 작은 봉투가 괜찮으냐고 물었고 난 고개만 끄덕였다. (다음엔 능숙하게 긴 봉투에 담아야지 마음먹으면서)
케밥은 너무 짰다. 다음에는 아메리칸스타일을 하지 말고 야채가 많이 들어가는 토르티야를 골라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