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혼자가 두려웠던 나에게

부모의 부모였던 나에게

by 탄고

통화시간이 벌써 3시간이 흘러갔다는 것을 깨달은 건 새벽이 다 지나가고 해가 떠오를 때쯤이었다. 지금 자면 오후는 되어야 일어날 것만 같았다. 그렇게 되면 일요일은 체감상 굉장히 짧게 느껴질 것이고 주말은 그렇게 흘러갈 터였다. 3시간이나 이어졌던 통화가 이제 끝날 기미가 보인다.


"그런데 나 때문에 밤새서 어떡해?" 스피커폰으로 해놓은 핸드폰에서 상대방의 목소리가 전해져 왔다.

"아니야. 고마워 나 믿고 털어나 줘서, 정말이야. 그리고 언제든 고민 있으면 또 얘기해줘" 진심이었다. 진심으로 3시간 동안이나 아무에게도 털어놓지 않은 고민을 나에게만 털어놔줘서 그렇게 내가 이 친구에게 소중한 사람이 된 것만 같아 고마웠다.

"응, 오늘 정말 고마웠어. 너라서 이렇게 편하게 얘기할 수 있었어" 3시간 전보다 확실히 목소리가 한결 차분해졌다. 그녀도 누군가 자신의 이야기를 진심으로 들어주고 위로해줘서 기뻤으리라.


너라서 이렇게 편하게 얘기할 수 있었어. 전화가 끊어지고 나서도 몇 분간 이 한마디를 머릿속으로 곱씹어보았다. 나는 너에게 소중한 사람이 되었구나 하고 생각했다. 나도 네가 소중해. 이 관계가 영원히 갔으면 좋겠다라고 생각하며 잠이 들었다.







잠겨있는 핸드폰 액정 위로 메신저 표시가 떴다. 평소 연락하는 대화방은 모두 알림을 꺼놓아서 이렇게 알림 표시가 뜰일 이 없는데 알림이 왔다는 것은 새로운 사람에게서 온 연락이라는 뜻이다.


"네가 연락이 잘 안 된다길래 걱정돼서 연락해봤어. 무슨 일..." 잠금화면의 미리보기로 볼 수 있는 내용은 여기까지였다. 내가 연락이 잘 안 되어서 친구들이 주변에 물어보고 다니고 있구나 하고 생각했다. 오래된 친구, 최근에 알게 된 친구 할 것 없이 모두와의 연락에서 도망쳐 나를 혼자 가둔지 어느덧 세 달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일일이 한 명 한 명 무슨 일인지 설명해주지도 않았으니 걱정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었다. 하지만 미안하게도 이렇게 잠적하게 된 이유를 설명해주는 것도 조금은 버거운 일이었다.


외롭고 지쳤다. 이것이 그 순간 떠오르는 내 마음이었다. 이렇게 찾아주고 걱정해주는 사람이 많은데 외롭다라... 이해가 안 가는 일일 수 있다. 정확히는 타인의 감정에 귀 기울이며 그들에게 필요한 사람이 되려하고 한 사람도 나를 싫어하는 일 없도록 노력해왔던 나의 관계패턴에 지쳤고 그로 인해 그 관계 속에서 나는 외로웠다가 맞는 표현이겠다.





나의 머릿속은 머나먼 어린 시절을 여행하고 있었다. 시간이 거꾸로 흘러 대학교, 고등학교, 중학교 그리고 초등학교 순으로 사건 하나하나를 머릿속으로 떠올려보고 있었다. 그리고 초등학교 4학년 무렵의 시간에서 잠시 멈추었다.


방에서 이불을 뒤집어쓴 채로 거실에서 부모님의 싸우는 소리를 듣지 않으려 애쓰고 있는 어린아이를 마치 서서 바라보고 있다. 그리고 어린아이에서 문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제 곧 들어올 시간이다.


문을 벌컥 열고 엄마가 아이를 흔들어 깨운다.

"일어나. 우리 나갈 거야. 여기서 더 못살아" 엄마가 서둘러 일어나지 않는 아이에게 짜증 내며 소리친다.

"어디가? 엄마 아프잖아" 무섭고 떨리는 마음을 감춘 채 아이가 걱정 가득한 목소리로 묻는다. 저 아이는 분명 무섭고 불안하다. 하지만 그 와중에 엄마의 건강과 지금의 이 상황이 더 걱정되어 자신의 무서운 마음을 참고 있다. 저 무렵쯤부터였으리라. 아이가 자신의 마음은 이제 꼭 닫아두고 엄마의 마음을 더 귀 기울이고 신경 쓰기 시작한 것이. 그리고 저 아이가 가장 무서워하는 건 불안한 지금의 상황과 엄마의 안 좋은 건강이다. 그리고 그 너머로 이러한 불안이 스며들기 시작한다. '내가 혼자 남겨질 수도 있다.'



아이에게 있어 양육자의 유약함은 큰 공포이다. 자신을 길러주고 돌봐주는 존재의 부재. 그것도 가장 유대감이 깊을 어머니의 부재는 너무나 큰 공포이다. 어린 나이에서부터 혼자 남겨질지도 모른다는 불안은 큰 환상을 만들어 낸다. 어떠한 상황일지 구체적으로 떠오르는 모습은 없지만 대략적인 감정으로 마음속에 스며든다. 아주 짙은 외로움. 그렇게 혼자 남겨지지 않으려 누군가와 끝없이 함께 하며 그들에게 소중한 사람으로서 다가간다. 그 누구보다 상대의 마음을 먼저 알아주고 깊이 공감해주며 그들에게 있어 둘도 없는 소중한 존재가 된다. 그리고 나는 네가 필요해와 같은 말을 기어코 들어야 비로소 안심이 된다.


타인에게 버림받고 혼자 남겨질 것 같은 이 공포는 유기 불안으로써 사람의 마음에 깊게 자리 매기게 된 것이다. 그래서 끊임없이 다독여주며 스스로에게 괜찮다는 말을 건넨다. 그리고 계속해서 일러준다. 혼자 있어도 되는 괜찮음을, 혼자 남겨질 일은 절대 없으며 설령 혼자 남아 있게 된다 할지라도 그건 절대 힘든 일이 아니라는 것을 그러니 지금 지레 겁먹고 누군가 나를 떠나기 전 내가 먼저 떠나버리는 이 힘듦을 나는 이해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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