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은 마냥 어린아이이고 싶은 나에게
모두가 졸린 눈을 꿈뻑꿈뻑 거리며 휴대폰만을 바라보는 퇴근길 지하철 안에서 그날따라 마음 깊숙하게 파고드는 노래 가사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너는 나쁜 사람이야 또 나쁜 사랑이야 내 마음을 다 가져가고 네 맘을 주진 않니
지난 수많은 세월 속 내가 서운하게 했던 친구와 연인들의 얼굴들이 머릿속을 스쳐갔다. 아마 딱 저 노래 가사 속 마음이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다. 그들은 나에게 마음을 주며 다가왔지만 정작 나는 그들에게 내 마음을 내준 것 같지는 않으니 말이다.
나는 내 주관 없이 소심하기 때문에 상대방에게 잘 맞춰주는구나,라고만 생각하고 있었다. 친구건 연인이건 내가 원하는 것이나 내 의사표현을 상대방의 감정이 상할까 봐 라는 이유로 쉽사리 얘기하지 못한다는 건 진작에 눈치채고 나 스스로도 아쉬워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이 혼자 남겨질지 모른다는 불안한 상상이 만들어낸 유기 불안이라는 것을 알게 된 건 상담을 받고 난 이후였다. 혼자 남겨질 것이라는 두려움에 대한 방어기제로 주변 사람을 잘 챙겨주게 되는 것이었다. 오래전부터 아프고 하시는 일이 잘 풀리지 않아 감정적으로 육체적으로 힘듦을 많이 토로하셨던 부모님을 걱정하고 눈치 봐왔던 나의 태도를 고스란히 나의 대인관계에도 적응하여 마치 부모와 같은 태도로 주변 사람들을 대해왔던 것이다.
그렇게 나의 동료, 지인, 친구들에게 비치는 나의 모습은 타인을 잘 챙기고 책임감 있으며 힘들고 어려워도 계속해서 나보다 주변을 먼저 챙기는 그야말로 모두가 싫어할 수 없는 이상적인 슈퍼맨 부모님 같은 모습이었으리라.
하지만 부모가 아닌데 부모의 노릇을 하고 있는 것이 얼마나 에너지 소모가 큰 일인가. 다툼이 일어나도 내가 참고 넘어가게 되니 말이다. 내가 동등한 입장에서 내 할 말을 하거나 내 감정을 솔직하게 털어놓기라도 하면 상대는 나에게 지치게 되고 나는 멀어질지도 모른다는 불안에서 온 결과였다. 분명 외롭고 공허할 터인데 이 마음은 어떻게 해소해야 하는 걸까. 그렇다고 마냥 어린아이이고 싶은 마음은 그 누구에게도 쉽게 보여줄 수 없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이렇게 내 안에 쌓인 외로움과 힘듦은 나와 가까운 관계를 맺어가는 사람에게 그대로 전해지게 된다.
여자 친구와 점차 함께하는 시간을 늘려가며 서로에 대해 조금씩 알아가고 있던 때였다.
아직까지 다투는 일도 서로 안 맞는 모습을 발견한 것도 없는 그야말로 관계가 깊어져 가는 시기를 보내고 있었다. 그리고 별안간 나는 여자 친구에게 이별을 통보하게 된다. 별안간 여자 친구에게 이별을 통보하다. 이 문장 안에 정말 모든 것이 담겨 있었다. 정말 그 누가 보고 들어도 왜 헤어지는 것인지 이유를 도통 알 수 없을 정도로 별안간 있어진 일이고 이 이별은 그야말로 통보였다.
"우린 헤어지는 거야. 미안하지만 그렇게 됐어"
부모의 부모로서 어린아이의 모습을 보였던 적이 없었다. 그럴 기회조차 없었다. 내 양육자가 위태롭기 때문에 내가 정신적으로나 환경적으로나 챙겨야 하는 입장에서 나조차 챙기지 않고 나 역시 똑같이 유약한 모습을 보였다간 함께 무너져 내릴 것만 같았으니 말이다. 그러면 나는 혼자 남게 될 테니까. 투정 부리고 싶은 연약한 내 모습은 숨겨야 하는 부끄러움에 불과하니까.
부모님과 살아가며 배운 나의 관계패턴을 그대로 연인에게도 적용하여 연인의 부모와 같은 마음으로 공감해주고 들어주고 살폈다. 그 힘들고 외롭고 공허한 태도는 습관이 되어 여기서도 나타나버린 것이다. 하지만 부모님과의 관계에서 깊이 느꼈지 않은가. 이는 정말 힘든 일이라는 것을. 내가 정말 나다운 내 모습을 감춰두고 부모와 같은 태도로 대한다는 것이 얼마나 지치고 많은 에너지 소모가 되는 일이라는 것을. 아이같이 어딘가 기대보고 싶은 솔직한 나의 모습은 이제 부끄러움이 되어 꽁꽁 숨겨둔지 너무나 오래다. 그렇기에 연인은 나와 함께하는 시간 동안 내 마음을 감추고 있다고 느껴졌을 것이다. 그리고 조금씩 너무나 오랫동안 지쳐버린 내면 아이는 내게 말해온다.
"힘들어. 이런 관계는 이제 지쳤어"
너에게 미안하지만, 부모와의 관계는 끊을 수 없어. 하지만 너와의 관계는 언제든 그만둘 수 있지. 비겁하고 정말 못된 짓이지만 이렇게 해야만 살 것 같아서.
너는 나쁜 사람이야 또 나쁜 사랑이야 내 마음을 다 가져가고 네 맘을 주진 않니
나를 비롯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이제는 누군가에게 부모가 아닌 어린아이이고 싶다는 마음을 많이 느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생각을 마음속에 품고 있을 것이다. 우리는 도대체 몇 가지 역할을 해내며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 한 사람 떠나보내는 것도 두려워하지만 그렇다고 나의 모습을 보여줄 용기가 없는 사람들에게 해주고 싶은 이야기는 먼저 나에게 무섭고 두려웠던 마음을 털어놓는 것이다. 그동안 수많은 두려움과 불안으로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리고 그로 인해 내가 인내해야 했던 상황들은 무엇이 있는지.
그다음은 부모님으로부터 온전한 마음의 독립을 이루어야 한다. 아무리 유약해 보이는 부모라 할지라도 부모는 부모이고 나는 그들의 자녀이다. 이 한 점을 명심하고 인정해주어야 한다. 그들은 지금까지도 그들 스스로 자신의 삶을 책임져왔고 앞으로도 그럴 능력이 충분하다. 부모님뿐 아니라 내가 만나왔던 친구, 동료, 연인들 모두 각자가 나름대로 자신의 삶을 감당할 능력이 충분하며 자신의 삶을 책임지고 살아갈 수 있는 자들이다. 너무 나약하게만 바라보지 말며 조금은 무거운 마음을 내려놓고 동등한 시선과 위치에서 서로 간의 독립을 이루는 것이 좋다. 그리고 나 역시 내 두 다리로 바로 설 수 있으며 충분히 나의 삶을 스스로 감당해낼 수 있는 독립적인 주체임을 잊지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