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그게 무슨 말입니까? 아들이, 내 아들이 죽다니요! 그럴 리 없습니다. 뭔가 잘못되었을 것입니다. 절대로 그럴 리 없습니다.”
다리가 휘청거렸다.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먼지가 풀썩 일었다. 멀리서 만종 형님이 달려오고 있었다.
아들이 죽다니, 그건 거짓말일 것이다.거짓말이어야 한다.
1969년 6월, 나는 고향을 떠나 부산에 가기로 마음먹었다. 돈을 벌기 위해서였다.
내 땅이라고는 손바닥만큼도 없는 이런 촌구석에서 힘들게 버텨본들, 대代를 이은 소작농 신세를 벗어날 방법은 막연하기만 했다. 설령 운 좋게 남의 논밭을 몇 년 더 부쳐먹게 된다 하더라도 종살이와 다를 바 없는 이 비루한 꼴을 내 자식들에게만큼은 더 이상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그러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했고, 돈을 벌려면 반드시 도시로 나가야 했다.
며칠을 고민하고 생각을 굳혔을 때, 아내는 순순히 내 뜻에 따라주었다.
“정말 장합니더. 한 뼘이라도 좋으니 내 땅이 있어야 됩니더, 몇 년만 고생하면, 우리도 땅을 가질 수 있을 겁니더. 아기들은 내가 책임지겠습니더. 아무 염려 말고 다녀오이소.”
격려는 든든했다. 하지만 어머니의 반대는 생각보다 완강했다.
“네 형도 몇 해 전에 부산으로 살림을 옮긴 마당에, 너마저 객지로 보낼 수는 없다. 그렇게 되면 이 집은 누가 지킬 거냐? 안 된다, 절대 안 된다.”
어머니는 곡기穀氣를 끊고 사흘 밤낮을 울었다. 마음이 아팠지만 그렇다고 주저하거나 그대로 물러설 순 없었다. 이까짓 다 쓰러져가는 초가집, 얼른 큰돈 벌어와서 고대광실로 새로 지어 드리겠노라 호언장담을 했다. 그리고 며칠 후, 부산으로 가는 밤배에 몸을 실었다. 그때 내 나이, 서른두 살이었다.
어렵사리 길을 물어가며 여러 동네를 헤맨 끝에 겨우 형의 집을 찾아냈다. 그러나 형은 나를 반기기는커녕 안으로 들어오란 말도 없이 다짜고짜 욕부터 퍼부었다. 어머니는 어떻게 하고 혼자 왔냐고, 아버지 산소는 누가 돌볼 것이며, 농사만 짓던 주제에 도회지에서 무엇을 해 먹고 살 거냐며, 동네가 떠나갈 듯 큰 소리로 윽박지르던 형은 결국 내게 손찌검까지 했다. 하룻밤만 재워달라는 말은 애당초 꺼낼 수조차 없었다.
서운하고 야속했다. 하지만 아버지를 대신해서 가장 노릇을 해 왔던 형에게 드잡이를 할 수는 없었다. 솟구치는 눈물을 참으며 힘없이 돌아섰다. 골목 어귀까지 따라온 형수가 꼬깃꼬깃 구겨진 천 원짜리 두 장을 내 주머니에 억지로 쑤셔 넣었다. 끝내 눈물이 흘렀다. 어딘지도 모를 허름한 여인숙에서 뜬눈으로 밤을 새웠다. 아내와 아이들의 얼굴이 잠시도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새벽이 밝았다. 동이 트기 전부터 일찌감치 발품을 팔았다. 일자리를 구하려고 시내 이곳저곳을 닥치는 대로 돌아다녔다. 다행히 운이 좋았다. 사흘이 채 지나지 않아 전포동 들머리에 있는 공사장에서 잡부 자리 하나를 얻게 되었다. 합판에 박혀 있는 못을 빼고, 벽돌이나 시멘트 따위를 져 나르는 일이었다. 끼니를 해결할 수 있게 되었다는 생각에 날아갈 듯 기뻤다. 낮에는 일을 하고, 밤에는 건물 처마 밑에서 새우잠을 청했다. 십 원짜리 하나 쓰기가 아까웠다.
건설 현장을 책임지는 반장은, 속초가 고향인 박용길 씨였다. 구수한 강원도 사투리에다 막걸리를 즐겼던 박반장은, 시키는 일마다 군말 없이 열심인 나를 좋게 보았던 것 같다. 그는 새로운 공사를 시작할 때마다 나를 데모도手もと(조수)로 데리고 다녔다. 그러면서 조금씩 현장 일을 가르쳐 주었다. 박반장은 자주 이런 말을 했다.
“내남 어데 있간? 정들면 마카 한 가족인 게지.”
그리고 그의 소개로 곧 김만종 목수도 만나게 되었다. 전라도 광주 사람이었다.
“아따, 잡부만 하면 안된당께. 기술이 있어야제. 동상은 눈치가 빠르고 손재주가 조응께 목수 일을 배워부러야혀. 나가 싹 다 가르쳐줄팅께.”
나는 두 사람을 형님으로 모시고 그야말로 죽기 살기로 목수 일을 배웠다. 물론 욕도 숱하게 들었다. 그 해 여름에 쏟아진 장맛비보다 내가 들은 욕이 더 많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욕먹는 값으로 돈을 버는 거다, 오직 그렇게만 생각했다.
떠돌이처럼 현장을 따라 여기저기 옮겨 다니는 생활이 불편했던 우리는 의기투합하여 함께 머물 집을 구했다.
전포동 산동네에 있는 루핑 Roofing 집이었다. 루핑 집이란 나무로 대충 기둥을 세운 다음, 기름 먹인 두꺼운 종이로 지붕을 얹은 것이다. 보증금 삼만 원에 월세 일만 오천 원이었다. 1970년 당시, 쌀 한말에 일만 육천 원, 하루 일당이 칠백 원이었으니 혼자 살림이었다면 감히 엄두를 내지 못했을 큰돈이었다.
육이오 때 월남했다는 주인집 어머니는 열댓 살 먹은 막내딸 혜자와 큰방을 쓰고, 우리 셋은 아랫방을 썼다. 세 명이 나란히 눕기도 버거운 두 평짜리 쪽방이었으나 떠돌아다니는 생활에 지쳤던 우리에게는 아방궁이 따로 없었다.
먼 객지에서 고향 어머니를 다시 만났다며 너스레를 떠는 용길 형님을 좋게 보았는지 주인집 어머니는 이따금 꽁치 대가리를 듬뿍 넣은 찌개를 끓여주거나, 방구석에 처박아둔 썩기 직전의 고린내 나는 옷가지들을 꺼내 깨끗이 빨아 놓을 때도 많았다.
돈 버는 재미에 정신이 없었다. 해가 뜨기 전에 현장에 나갔고, 집으로 돌아오면 달이 머리 위에 걸렸다. 그러다 보니 새해가 되는 줄도 몰랐다. 어느새 4월이었다. 새봄이 막 시작되고 있었다.
여느 때처럼 점심을 먹고 현장 한쪽의 담벼락에서 한숨을 돌리고 있었다. 낯선 사람이 공사장 주변을 맴돌면서 기웃거렸다. 일자리를 구하는 건가 싶었는데 알고 보니 나를 찾아온 것이었다. 눈치를 살피던 그가 뜻밖의 기별을 전했다.
“남해 사람 임 씨 맞지요?"
"네, 맞는데요, 무슨 일입니꺼?"
"이것 참 머라 캐야 되노."
그가 뜸을 들였다.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이러는 것일까? 작심한 듯 곧 그가 입을 열였다.
"딴 게 아니고, 거 참, 고향집에 있는 아들이, 어제 죽었다캅니더.”
네? 뭐라구요? 순간 눈앞이 핑 돌았다.
맨 오른쪽 언덕배기 파란 양철 지붕 옆 초가가 우리 집이다. 이건 그나마 꽤 많이 개량된 1980년대 말의 모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