겉으로는 애써 태연한 척했다. 그러나 썩어 문드러진 내 속을 사람들이 알 리 없었다. 아니, 알아주길 바라지도 않았다. 고작 열 달을 사는 동안 내 품에선 겨우 두 달. 그 짧은 인연이 못내 서러웠던지 아들은 밤마다 꿈속에서 나를 찾아왔다.
아내가 저만치에서 내게 손짓한다. 반가운 마음에 서둘러 달려가면, 아내가 업고 있는 포대기 속에서 아들이 슬며시 얼굴을 내민다. 환하게 웃는 얼굴을 쓰다듬으려 손을 뻗는데 아들이 갑자기 퍼렇게 변한다. 그리고 울부짖는다. 아버지, 부산 가지 마세요. 아버지, 병원 한 번만 데려가 주세요. 아버지, 주사 한 번만 맞게 해 주세요.
겁에 질린 채 아무 말도 못 하고 주춤주춤 뒷걸음질 쳤다. 끝을 알 수 없는 바닥으로 추락했다. 그러기를 여러 차례, 놀라서 부릅 눈을 뜨면 다 찢어져 너덜너덜해진 루핑 천장이 보였다. 온몸은 이미 땀으로 흥건했다.
“아따, 우리 동상이 또 몹쓸 꿈을 꾸었는갑다잉. 내 그 맘 잘 알제. 울 엄니도 누이 먼저 보내 불고 한 삼 년 그리 고생하시더마잉.”
"아입니더. 그런 거 아입니더. 그냥 좀 덥네예."
방문을 열고 나가는데 만종 형님이 또 한마디를 내 등에다 집어던졌다. “염병 허고 있네. 춘삼월이 머시 덥당가. 똥개도 담요를 덮고 자는디.”
사월의 밤하늘은 맑았다. 달은 밝았고, 별도 빛났다. 별과 달 사이로 기억마저 희미한 내 아버지가 어렴풋이 떠올랐다. 그러자 빌어먹을 눈물이 또 주르륵 흘렀다.
'아버지, 머할라꼬 나를 낳았습니꺼. 이런 꼴 만들라꼬 낳았습니꺼."
1938년 음력 오월 사흗날, 나는 경남 남해의 산골 마을에서 2남 1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마을은 다랭이 논 몇 마지기와 감자, 고구마 따위를 심는 비탈밭 몇 뙈기가 전부인, 전형적인 빈촌貧村이었다. 나의 아버지는, 아버지의 아버지, 그 아버지의 아버지 때부터 남의 집일을 거들거나 땅을 대신 경작하고 받은 품삯으로 연명해 온 소작농이었다. 하지만 말이 소작농이지 실제는 종이나 다를 바 없었다. 가난한 중에서도 더 가난한, 그래서 거지도 그냥 지나친다는, 마을에서 제일 못 사는 집이 바로 우리 집이었다.
외가는 그런대로 끼니는 굶지 않는 정도였다고 했다. 그러나 어머니는 당신이 여덟 살 되던 해에 한쪽 눈을 실명했다. 병이었는지 사고였는지 확실하지는 않다. 한쪽 눈동자가 없는 처녀에게 제대로 된 혼처가 있을 리 만무했다. 그래서 가난했지만 족보가 있는 집이라는 것을 명분 삼아 외가에서 쫓겨나듯 오히려 지참금을 들고 아버지에게 시집와야 했다. 그리고 형과 누나, 나를 낳았다.
아버지는 내가 다섯 살 되던 해에 돌아가셨다.
발단은 사소한 것이었다. 어느 논에 먼저 물을 댈 것인가 하는 문제로, 역시 소작농이었던 다른 이웃 사람과 시비가 붙었다. 말싸움이 곧 주먹다짐이 되더니 그가 휘두른 곡괭이 자루에 아버지가 머리를 맞았다. 그것이 화근이 되어, 쓰러진 지 보름을 채 넘기지 못하고 아버지는 세상을 떠났다. 자기 땅 한 뼘도 없는 주제에 그까짓 주인 논에 물을 먼저 받으려다 얻어맞고는 죽어버리다니. 아버지는 보잘것없는 소작농으로서의 인생을 그렇게 허무하게 마감했다. 다섯 살이었던 나는 그래서 아버지 얼굴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한다.
어머니는 그 뒤로 닥치는 대로 일했다. 네 식구를 어떻게든 먹여 살려야 했기 때문이다. 고사리, 쑥, 달래 따위를 캐서 읍내 오일장에 내다팔기도 하고, 나무를 베어 장작으로 묶어 이웃 마을을 돌기도 했다. 그러나 홀몸으로 자식 셋을 건사하기 버거웠던 어머니는 결국 1944년, 같은 마을에 사는 유 씨 아저씨에게 재가를 했다.
유 씨 아저씨의 본처本妻는 병으로 죽고, 둘째 부인은 아이를 낳지 못했다. 어머니는 유 씨 아저씨의 셋째 부인이 되어 아들 둘을 내리 낳았다. 그래서 내게는 이부異父동생이 둘이나 생겼다. 끼니 걱정은 줄었지만 입으로 들어오는 것은 전보다 더 거칠었다.
1949년이 되자 국민학교 입학 통지서가 날아왔다. 1938년생인 내가 열두 살 되던 해였다. 열두 살에 입학 통지서라니. 알고 보니 출생 신고가 늦어졌기 때문이라고 했다.
당시 시골에서는 대개가 그랬다. 아이가 태어나도 정확한 출생 신고를 하기는 어려웠다. 길에서 운 좋게 만난 누군가가 면面사무소에 간다고 하면 그 인편人便에 부탁하는 것이 그저 일상적인 것이었다.
“자네, 지금 면에 가는가? 그러면 우리 아들 호적 좀 실어주게. 삼월 오일 아침 일곱 시에 태어났다네. 이름은 똥개로 할라네. 부탁 좀 함세.”
하지만 부탁받은 사람이 어쩌다 오월 삼일 저녁 일곱 시로 착각한다거나, 심지어 이름을 개똥으로 헷갈린다거나, 하물며 막걸리 한잔의 유혹을 이기지 못하는 상황이라도 벌어지게 되면, 그 이후는 상상에 맡길 일이다.
국민학생이 되었지만 정상적으로 학교를 다니기는 어려웠다. 재가再家를 했어도 어머니의 일상은 달라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어머니에게 딸려있는 입만 셋이었다. 우리는 밥값을 해야 했다.
유씨네 허드렛일이 모두 우리에게 주어졌다. 새벽동이 트기 전, 나는 남보다 먼저 배낭 골에 가서 쇠꼴을 한 아름 베어야 했고, 아침 무렵엔 쇠죽도 미리 끓여두어야 했다. 이놈의 소 새끼 때문에, 너 때문에 내가 학교에 못 간다 싶어 애먼 소 엉덩이를 걷어차는 것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해가 중천에 뜬 다음에 뒤늦게라도 학교에 갈라치면 미처 준비 못한 월사금이 마음에 걸렸다.
'어차피 학교에 가봤자 교실에 들어가지도 못할 텐데 차라리 학교 담장 밖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아이들에게서 동냥 수업이나 해야겠다.'
친구들에게 보리밥 뭉치를 건네주고 그날의 수업 내용을 전해 듣는 것이 내 공부의 전부였다.
1955년, 가까스로 국민학교는 졸업했지만 중학교 진학은 아예 꿈도 못 꿀 일이었다. 가방을 메고 신작로로 등교하는 아이들을 행여 마주칠까 봐 지게를 진 채 나무 뒤에서 한참을 숨어있기도 했다. 중학교에 가는 친구들이 부러워 미칠 지경이었다. 하지만 밤마다 부엌에서 흐느끼는 어머니의 울음을 들을 때면 배움과 진학에 대한 욕심을 꾹꾹 접을 수밖에 없었다.
이듬해, 조카 준택이가 마을에 공민 학교를 열었다. 우연처럼 내게도 배움의 기회가 찾아온 것이다.
준택이는 나보다 나이가 많았지만 촌수로는 내가 삼촌이었다. 부산 동아대학교를 다니던 준택이가, 나처럼 가정 형편으로 진학을 못했거나 여자라는 이유로 처음부터 까막눈이었던 사람들을 모아 마을 집회소에서 야학을 연 것이었다.
공부가 고팠던 내게 야학은 그야말로 새로운 세상이었다. 스무 살이 넘는 집안 조카에서부터 역시 촌수가 높은 열 살짜리 고모에 이르기까지 대략 서른 명이 넘는 학생들이 모였다. 논밭 일과 길쌈을 마친 다음, 대낮보다 밝은 호롱불을 켜고 공부를 했다. 내 인생을 돌아보았을 때 가장 신나는 시기가 아니었나 싶다.
준택이와 친구들은 1956년부터 1962년까지 일곱 해 동안 공민학교를 운영했고, 수업 과목은 한글, 한자, 영어, 국사 등이었다. 영어는 달랑 일주일만 배웠다. 영어를 담당했던 준택이 친구 놈이 도망갔기 때문이었다. 도망간 그 이유는 아직도 모르겠다. 마지막 2년은 나도 급장 자격으로 동네 코흘리개들에게 한글과 산수를 가르쳤다. 집안 삼촌들이 날더러 선생님이라 부르니 나도 모르게 한동안 우쭐했던 것이 기억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