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성장의 기억 (2)
스물여섯 살이 되었다. 그때를 즈음하여 동네에 중매쟁이들이 드나들었다.
중매쟁이가 결혼 적령기의 총각을 찾아와 몇 장의 사진을 보여주며 아가씨들의 집안 내력을 읊고 나면, 그중 서로 조건이 맞아 적당하겠다 싶은 대상자를 선택해서 총각이 직접 만나러 가는 식이었다. 나이를 감안하면 내 결혼은 꽤 늦은 편이었는데, 그것은 당연히 보잘것없는 가정 형편 때문이었다. 내세울 것이라고는 쥐뿔도 없었는데 결혼은 언감생심, 꿈도 못 꿀 일이었다.
중매쟁이가 보여준 사진 중에서 바닷가 마을에 산다는 어떤 아가씨의 얼굴이 유독 내 눈에 들어왔다. 대략 십여 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마을이었다. 자기 선박을 가진 선주의 오 남매 중 막내딸이라고 했다. 중매쟁이가 날더러 여자 보는 눈이 있다며 침을 튀겼다.
이튿날 중매쟁이와 함께 그 마을을 찾아갔다. 사진 속 처자는 아랫방에서 베를 짜고 있었다. 바닷가에 산다 해서 까무잡잡할 줄 알았는데 보드라운 분을 바른 것처럼 곱디고운 하얀 얼굴이 그저 내 눈에 좋았다.
그녀의 세 오빠들이 먼저 나서서 내게 이것저것을 물었다. 그날, 어느 정도 허풍도 없지 않았음을 솔직히 인정한다.
처자의 둘째 오빠가 나를 좋게 본 듯했다. 오빠들로부터 허락이 떨어지니, 이제는 아가씨 차례였다. 그때의 결혼 신청은 “사진 찍으러 같이 갑시다”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하자는 답을 들으면 결혼 승낙이었고, 싫다 하면 그것으로 파장이었다. 다행히 아가씨는 조용한 목소리로 ‘네, 그렇게 합시다’라고 답을 했다. 아내의 나이, 겨우 스무 살이었다.
그날 오후, 장인 장모 될 분들께 인사를 드리고 최종 허락을 받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두 분이 나의 무엇을 보고 결혼을 허락했는지 전혀 이해되지 않는다. 거기에는 아마도 중매쟁이의 농간이 있었음에 틀림없다.
혼례식 날, 아내는 가마를 세 번이나 갈아타는 수고 끝에 우리 마을에 도착했다. 그만큼 멀었다.
그러나 아내가 가마에서 내리기도 전에 한바탕 난리가 났다. 좁아터진 마당에 동네 사람들이 한꺼번에 몰리다 보니 약하디 약한 돌담이 그만 무너져버리고 만 것이었다. 경사스러운 날에 재수 없는 일이 생겼다며 아내 쪽 친척들이 언성을 높였다. 또한 중매쟁이의 말과는 달리 다 쓰러져가는 초가에다 알고 보니 땡전 한 품 없는 가난뱅이라며 엉터리 결혼은 할 수 없다는 말까지 오간 다음, 결국 양가 하객들끼리 말싸움과 주먹다짐까지 벌어졌다. 그래도 어찌어찌 우여곡절 끝에 혼례를 겨우 마쳤다. 지금도 그날만 생각하면 식은땀이 흐른다.
혼례를 치르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다. 어느 날, 김씨네 논일을 해 주고 소작료로 받은 보리 한 가마를 지게에 지고 집으로 돌아오던 참이었다.
먹거리가 생겼다는 생각에 한길에서부터 싱글벙글했는데, 한복 차림의 아내가 마당에서 내려다보고 있었다. 보리를 뒤채에 내려놓으려니 갑자기 부엌에서 통곡소리가 들렸다. 무슨 일인가 싶었지만 영문을 몰랐다. 당황할 뿐이었다. 한참 만에 아내가 퉁퉁 부은 눈으로 나오더니 내 손을 꽉 잡으며 이렇게 말했다.
“내 처지, 우리 형편이 어떤 것인지 이제야 알겠어요. 쓰러져가는 초가에 소작으로 받은 보리 한 가마가 전부인 이런 집에 내가 시집을 왔군요. 잘 알겠어요. 무슨 일이 있더라도 나는 이 집안을 일으킬 것입니다. 반드시.”
솔직히 아내의 다짐을 그때는 쉽게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열심히 살자는 뜻인 것만큼은 분명했다.
이듬해인 1965년, 딸아이가 태어났다. 가족이 늘었기 때문에 나는 가리지 않고 남의 집 일을 했다. 아내는 아내대로 베를 짜고 길쌈을 하며 남의 집 밭일을 거들었다. 어머니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러던 중 뜻밖에 징집영장이 나왔다. 내 나이 스물일곱이었다.
면 사무소를 찾아가서 극빈자이므로 입영 면제 대상이 아니냐고 따져 물었더니 그 혜택은 한 집에 한 사람, 그리고 장자長子인 형님께만 해당된다고 했다. 징집을 피할 방법은 없었다. 결국 1966년 4월, 나는 아내와 딸, 그리고 홀로 계신 어머니를 고향집에 남겨두고 스물여덟의 나이에 논산 훈련소로 입대했다.
힘들었던 훈련소 생활을 마치고 자대 배치를 받던 첫날, 전입 신고를 하려는데 중대장이 다짜고짜 내 뺨을 올려붙였다. 왜 그렇게 늙어 보이냐며 내 나이를 묻는 것이었다.
“너 몇 살이야, 임마!”
“스, 스물여덟입니다.”
중대장이 적잖이 당황한 것 같았다. 뒤에 안 일이지만 중대장은 스물다섯이었다.
그 일이 계기가 되어 서로 마주칠 때마다 공연히 미안해하던 중대장은, 나를 사단장 관사 관리병으로 파견 보냈다. 미안함을 편의로 갚은 것 같았다. 군인 신분이었음에도 머리를 기르고 사복을 입으며 좋은 식사까지, 그야말로 하루아침에 팔자가 바뀐 군번이 된 것이었다. 내가 모셨던 사단장은 정순민 소장님인데, 후일 부산문화방송 사장까지 역임하셨다.
일병을 달고 첫 휴가를 나왔다.
아내와 어머니는 눈물로 나를 맞았다. 그동안 딸은 제법 말이 늘었다. 고생하는 어머니와 아내를 보니 얼른 군 복무를 마치고 집안을 건사해야겠다는 생각이 간절했다. 이후 두어 번 더 휴가를 받아 고향을 다녀갔다. 내가 기혼에다 딸까지 있는 것을 알았던 사단장 사모님께서 특별 휴가의 형식으로 여러 가지를 배려해 주셨다. 한 달짜리 상병 휴가를 마치고 부대 복귀를 했더니 정순민 장군은 월남 주둔군 사단장으로 파병을 갔고, 관사는 텅 비어 있었다. 나머지 기간을 방첩대에서 보내고 1969년 4월에 제대했다.
전역하자마자 그 해 5월, 갑자기 딸이 뇌수막염에 걸려 생사를 오가는 일이 있었다. 다행히 상가商家 마을 의사인 꼽추 할아버지의 긴급 진료로 큰 위기를 넘겼다. 여덟 달 만에 태어난 딸은 그래서 잔병치레가 잦았다. 그리고 뒤이어 6월에는 아들이 태어났다. 아들의 이름을 상병이라 지을 뻔했다. 상병 휴가 때 생긴 아이였기 때문이다.
아들의 백일을 며칠 앞두고 나는 부산에 가기로 결심했다. 사단장 관사에서 생활하는 동안, 이른바 사회에서 잘 나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너무도 많이 보았다. 그들은 하나같이 잘 입고, 잘 먹었고, 잘 썼다. 결국 중요한 것은 돈이었다.
내가 아무리 고향에서 마을을 지키며 뼈 빠지게 일한다고 해도 기껏해야 끼니 해결인 것이지, 이대로 살아간다면 나의 아들, 그리고 아들의 아들까지 소작농 신세를 면하지는 못할 것이다. 손가락질을 받더라도 잠시만 고향을 떠나서 돈을 벌어오자. 그리고 내 땅을 사자. 내 땅에 벼도 심고 보리도 심고 그렇게 부자가 되자. 이런 결심에 이르자 나의 판단은 더 빨라졌다.
그런데 그 아들이, 우리 땅도 밟아보기 전에 그만 세상을 떠나버린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