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새로운 비극 (1)
“얼라는 다시 낳으면 되지 않갔나. 우선은 너래 살아야지. 힘내라이. 우리가 도와줄 테니.”
용길 형님은 친형보다 더 나를 챙겨주었다. 두 형님의 격려에 나는 다시금 의지를 다졌다.
‘아들아, 두고 봐라. 이 아버지가 꼭, 반드시.’
다시금 정신없이 바쁜 날들이 시작되었다. 밤낮없이 일했다. 용길 형님과 만종 형님을 따라 마산, 진주, 광주, 대구까지, 일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찾아다녔다. 악착같이 돈을 모았다. 그렇게 봄이 끝나갈 무렵이었다.
일을 마치고 지친 걸음으로 집안에 들어서려던 참이었다. 마당에서 빨래를 걷던 주인집 어머니가 환하게 웃는 얼굴로 앞선 인사를 했다.
“막내 아범이래, 오늘 반가운 손님이 왔지. 뉜지 보라.”
반가운 손님? 누구지? 그때 쪽마루 끝에서 여자 아이 하나가 와~ 하며 내게 달려왔다. 딸이었다. 그 뒤로는 바람에 나풀거리는 무명 치마저고리가 보였다.
아내였다.
아들이 죽었다는 기별을 받고 서둘러 고향을 다녀온 지 정확히 한 달 보름이 되던 1970년 5월 20일 저녁이었다. 딸을 앞장세운 아내의 갑작스러운 출현에 우리 모두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저는 이 양반 안사람입니더. 아주버님들도 저희에게 어떤 일이 있었는지 잘 아실 겁니더. 저는 두 번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을 작정입니더. 죽은 자식이 묻힌 땅을 두 번 다시 밟지 않을 거란 말입니더. 이제는 살아도 여기서 살고, 죽어도 여기서 죽을 겁니더.”
아내의 말은 그것이 전부였다. 더 이상의 대화도 없었다. 그날 밤, 아내와 딸은 주인집 어머니와 함께 잤다.
하지만 아주버님이라는 낯선 호칭을 포함해서 이런 상황을 마치 예상이라도 했다는 듯, 용길 형님과 만종 형님은 그다음 날엔 현장에도 나가지 않고 루핑 집 마당으로 나무와 벽돌 따위의 자재를 부지런히 실어 날랐다.
나는 형님들이 시키는 대로 그것들을 자르고 못질하고 쌓고 또 발랐다. 그러자 저녁달이 뜨기도 전에 두 사람이 넉넉히 누울 만한 문간방 하나가 뚝딱 만들어졌다. 밤새 형님들끼리 무언가 이야기를 나누는가 싶더니 그런 계획을 세운 듯했다.
저녁상을 물리고 용길 형님이 주인집 어머니를 불러 앉혔다.
“어머이, 내 이적 살면서리 간나 데린 아즈마이 이래 독한 사람, 당최 본 적이 없었거등요. 우리 셋이 살던 저 방, 막내 가족 줘 뻐리고 만종이랑 나랑은 이 문간방에 살겠스이 보증금 2만 원에 다달이 만원씩 드릴 거래요.”
주인집 어머니는 형님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손사래부터 쳤다. 본인들이 재료 가져와서 손수 만들었으니 그냥 살라고 했다. 돈은 필요 없다는 것이었다. 용길 형님과 어머니의 실랑이 끝에 보증금 없이 그저 땅값 명목으로 매달 5천 원의 월세를 드리는 것으로 합의를 보았다. 형님들과 나는 내친김에 집구석구석을 수리했다. 주인집 어머니는 막내 아범 안사람이 오니 자기가 덕을 본다며 좋아라 했다.
이제야 우리 방이 생겼다 싶었던지 아내가 이틀 만에 겨우 보따리를 풀었다.
이불 한 채, 베개 두 개, 냄비 두 개, 밥통 두 개, 수저 한 벌, 그리고 여름옷 한 벌. 그것은 고향을 떠나온 아내의 각오를 대신 말해주는 듯했다. 그러나 주인집 어머니와 형님들 앞에선 곧잘 웃기도 하고 말도 잘하는 아내가, 유독 내 앞에서만은 입을 굳게 다물었다. 할 말이 있을 때는 여섯 살 딸아이를 거쳤다.
아내의 깊은 상처를 누구보다 잘 알았기에 그것에 대해 별다른 트집을 잡지는 않았다. 가난한 집에 시집와서 도시로 돈을 벌러 나간 남편 때문에 금쪽같은 자식을 그 흔하디 흔한 주사 한번 써보지 못하고 죽게 만들었다는 죄책감, 아픔이 무언無言의 시위를 통해 나에게 고스란히 전해졌다.
주인집의 부엌을 같이 쓰면서 아내가 아침저녁밥을 도맡았다. 형님들과 나는 새벽밥을 먹고 일터로 나갔다. 텁텁한 식당밥은 저만치 꺼지라며 만종 형님은 아내에 대한 칭찬을 멈추지 않았다. 우리 모두는 전보다 더 미친 듯이 일했다.
아내는 전포동 시장에서 낡은 재봉틀 한 개를 오백 원에 사 왔다. 고향 마을에서도 베를 잘 짜기로 이름났던 아내는, 주인집 어머니가 받아온 옷 수선을 시작했다. 근방의 서면 술집에서 일하는 아가씨들 사이에서 아내의 바느질 솜씨는 금방 소문이 났다.
“이 에미나이, 인간 미싱이래 인간 미싱이야.”
아내 덕에 주인집 어머니는 전포동 바느질 할머니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리고 아내를 딸처럼 며느리처럼 아껴주었다. 물론 아내가 바느질 삯에서 꼬박꼬박 얼마간을 떼어 드린 이유도 있었지만, 당신이 피난길에서 아내 또래의 큰 딸과 헤어졌다는 사실은 뒤늦게야 알았다. 아내를 보면서 당신의 딸을 생각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아내가 바느질에 여념이 없을 때는 막내딸 혜자가 우리 딸을 돌보았다. 여름에 이어 가을이 지나고 또 겨울이 갔다. 그리고 새 봄이 시작되었다. 어느덧 일 년이 지난 것이다.
좀처럼 끝이 보이지 않았던 우리에게도 조금씩, 조금씩 희망이라는 것이 싹트고 있었다. 가난이 싫어 무작정 떠나온 고향, 고마운 은인들과의 만남, 뜻하지 않은 아들의 죽음, 예상치 못했던 아내의 부산행, 그리고 새로운 시작. 바라고 바라던 행복이 이제 머지않은 듯했다. 돈을 벌면 고향으로 돌아가서 땅을 살 것이다. 아버지도, 어머니도 못 가졌던 내 땅을 살 것이다. 그렇게 부풀어 오르는 나의 희망처럼 아내의 배도 부풀어 오르고 있었다.
“워메, 참말로 신기허당께. 내외지간에 말도 한마디 안 섞음시롱 애기는 워찌코롬 만들었을까잉.”
만종 형님의 헛헛한 우스개와 놀림도 1971년 여름의 무더위를 식히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입추를 지난 지 한참이었지만 8월 늦더위의 기세는 꺾일 줄 몰랐다. 단열이 제대로 되지 않는 루핑 지붕 아래서 가쁜 숨을 내쉬며 손으로 재봉틀을 돌리던 아내의 두 볼은 이미 익을 대로 익었다.
“막내 아범, 오늘은 일 아이 갔으면 좋겠구마. 내 보이까니 오늘내일 간나래 나오지 싶은데…”
주인집 어머니가 근심 섞인 표정으로 방안을 기웃거리며 말했다. 아내는 벌써 재봉틀을 차고앉았다.
“어머이 말이 맞어. 동생은 오늘 하루 쉬는 게 좋갔는디.”
용길 형님도 걱정이 다분했다. 하지만 내가 빠지면 다른 사람을 돈 주고 사야 했다. 내게 돌아올 돈이 남에게 간다는 것이 아까웠다. 다행히 현장이 집에서 멀지는 않으니 만약 무슨 일이 생기면 즉시 연락을 주십사 여러 차례 당부하고, 대문 앞에서 머뭇거리던 형님들의 등을 오히려 내가 떠밀었다.
오늘만은 일하러 가지 말라는 그 말, 나는 그 말을 들었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