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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왕실의 비만아동 초상화

카레뇨 데 미란다의 <몬스터>

by sweet little kitty

소녀를 몬스터라고 부른 이유


강렬한 붉은색 의상을 갖추어 입고 화가 앞에 선 소녀가 있습니다. 볼에 살이 가득해 화난 표정 같지만, 체격에 비해 앳된 얼굴입니다. 17세기 아동이 초상화의 주인공이 되려면 왕실이나 귀족의 자녀여야 했을 텐데, 어쩐지 왕실이나 귀족의 자녀는 아닌 것 같습니다. 도대체 이 소녀는 누구일까요?


몬스터(옷을 입고서, The Monster-dressed) 후앙 카레노 데 미란다, 1680, 프라도 미술관


스페인의 궁정화가였던 후앙 카레뇨 데 미란다(Juan Carreño de Miranda, 1614-1685) 17세기 어느 비만 아동의 초상화를 그렸습니다. 소녀의 이름은 에우헤니아 마르티네즈 발레효(Eugenia Martinez Vallejo, 1674-1699)로 작은 마을의 소박한 농부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출생 시 체중은 알 수 없으나 생후 1년 경 25kg, 그림이 그려진 6세 무렵에는 70kg에 이르렀습니다. 국왕 카를로스 2세는 소문을 듣고 궁정으로 소녀를 불러서 초상화를 그리게 했습니다. 스페인 왕실에는 필리프 4세 때부터 왜소증이나 남다른 외모를 가진 사람들을 수집하듯 불러들이는 관습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에우헤니아는 성장하면서 점점 호흡과 운동에 어려움이 있었지만, 제대로 치료하거나 음식을 제한하지 않은 채 구경거리가 되었습니다. 어린아이의 몸을 조롱의 도구로 사용했다니, 가슴이 아픕니다.


서양미술사에서 아동의 누드는 주로 유아기 남아의 모습으로 그려졌습니다. 푸티라고 불리는 신이었지요. 반면 여아의 누드는 극히 드뭅니다. 독실한 가톨릭 국가인 스페인 왕실에서 여아의 누드를 그다는 사실이 아이러니합니다.


그림을 살펴보면 복부에 중심성 비만이 심하고, 유방에도 지방 침착이 있습니다. 에우헤니아의 무릎 관절은 복부와 허벅지 무게를 지탱하기 위해 무리가 생기지 않았을까 추정해 봅니다.


괴물(The Monster- nuder)


현대의학의 관점으로 볼 때 에우헤니아는 염색체 이상인 프레이더 윌리 증후군(Prader willi)으로 추정됩니다. 아버지로부터 유전된 염색체의 이상으로 고도비만, 지능저하 등 다양한 이상을 나타내는 질환입니다.


카를로스 2세는 합스부르크 가문의 근친혼이 불러온 재앙의 끝판왕이었습니다. 심한 주걱턱과 부정교합으로 음식을 씹지도 못했고, 국정을 운영할만한 지능에 이르지 못했습니다. 키가 작았고 불임이 강력히 의심되었지요. 우연의 일치인지 모르지만 고도비만을 제외하고는 에우헤니아의 프레이더 윌리 증후군과 겹치는 점이 많습니다.


왕실에서는 카를로스가 오래 살지 못할 것으로 예측했지만, 그는 38세까지 살았습니다. 그의 삶은 고통의 연속이었을 것입니다. 신체의 고통은 말할 것도 없고, 왕의 권위에 어울리지 않는 기이한 외모와 장애는 좌절감과 수치심으로 가득 찬 고통이었겠지요. 카를로스 2세는 에우헤니아를 보면서 한편으로는 우월감을, 한편으로는 동질감과 안도감을 느꼈는지도 모릅니다.


프레이더 윌리 증후군은 신생아 초기에는 허약한 아이처럼 보이다가, 아동기로 들어서면서 오히려 고도 비만으로 나타납니다. 포만감 중추인 시상하부가 제대로 작용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비만을 조절하지 못하면 고혈압, 심혈관 장애, 2형 당뇨병 등으로 사망할 수 있습니다. 기록에 따르면 에우헤니아는 갈수록 호흡조차 어려워져 25세 경 사망했습니다.


무엇이든 풍성하게 표현했던 화가


먹을 것이 지금처럼 풍부하지 않았던 17세기, 무엇이든 풍만하게 그리며 인체를 비만에 가깝게 표현한 화가가 있습니다. 바로크 미술의 거장 페테르 파울 루벤스 (Peter Paul Rubens 1577-1640)입니다.


루벤스, 바쿠스, 1638~1640, 에르미타주 박물관


루벤스의 그림 <바커스>는 누가 보아도 비만입니다. 피부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비만체형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검은 피부병변인 흑색가시세포(Acanthosis Nigricans)가 보입니다. 흑색가시세포증은 겨드랑이처럼 접히는 부위에 생기는 색소 침착입니다. 언뜻 보면 피부병 같지만, 체중을 조절해야 없어집니다. 양쪽에는 누드 아동 '푸티'들이 술을 받아마시면서 소변까지 보고 있네요. 동의 벗은 몸을 표현하는 것은 이 정도가 마지노선이 아닐까 싶습니다.




루벤스는 우리에게 <플란더스의 개>에서 네로가 꼭 보고 싶어 했던 대성당의 그림을 그린 화가로 유명하지요. 일본 애니메이션으로 더 유명한 이 동화는 플란더스(Flanders), 즉 플랑드르를 배경으로 하는데, 지금의 네덜란드 남부에서 벨기에에 이르는 지역으로 루벤스의 고향이었습니다.


주인공 네로는 그림에 재능이 있고, 루벤스를 동경하는 가난한 소년입니다. 파트라슈와 함께 우유배달을 하며 성실하게 살아가지만, 친구 알루아의 아버지는 둘 사이를 떼어 놓으려고 합니다. 방화범이라는 누명을 쓰게 된 네로는 일자리를 잃고, 월세를 내지 못해 오두막에서 쫓겨납니다. 모든 것을 잃은 네로가 마지막으로 향한 곳은 루벤스의 그림이 있는 성당이었습니다. 평소 돈이 없어 보지 못했던 제단화였습니다.


크리스마스이브, 굶주리고 갈 곳이 없어 성당에 들어온 네로는 드디어 루벤스의 그림을 보게 되고, 미소를 띤 얼굴로 짧은 생을 마감합니다. 첨탑이 있는 성당에 천으로 덮어놓았던 루벤스의 대작은 <십자가에서 내림(Descent from the cross), 1612~1614>이었습니다.


루벤스, 십자가에서 내림(Descent from the Cross), 1612-1614, 420.5 × 320 cm, 앤드워프(안트베르펜) 성당


예수는 싸늘한 시신이지만 건장한 체격입니다. 예수와 흰 천을 잡고 있는 위쪽의 남성들 역시 근육이 탄탄하게 표현되어 있네요. 다채로운 인물과 역동적인 구도는 영화의 한 장면 같습니다.


반종교개혁을 내걸었던 가톨릭 교회는, 성서의 이야기를 이처럼 강렬하게 표현하기를 원했습니다. 루벤스의 그림에는 항상 무엇이든 넘쳐흘렀습니다. 네로처럼 가난하고 굶주리는 아동이 많던 시절, 루벤스의 풍만한 인체는 풍요와 생명력의 상징이었습니다.


<고래>와 <몬스터>, 몸을 비하하는 단어들


비만 체형을 묘사한 그림을 보면서 떠오르는 영화가 있습니다. 2023년 대런 아로노프스키 감독은 영화 <Whale>을 통해 270kg에 이르는 고도비만 찰리의 삶을 그렸습니다.'whale'은 영어로 원래 고래를 뜻하지만 고도비만을 빗댄 속어이기도 합니다. 대학강사인 찰리는 자신의 몸을 부끄러워하며 커튼을 치고 숨어 지냅니다. 소셜 미디어를 통해 끊임없이 외모를 소비하는 사회에서 그의 몸은 죄책감과 수치심을 상징합니다.


영화는 찰리의 몸을 여과 없이 보여줍니다. 거대한 몸으로 숨쉬기조차 힘들어지고, 걸을 때마다 고통이 느껴집니다. 어쩌면 17세기 에우헤니아도 비슷한 삶을 살지 않았을까 생각해 보게 네요. 찰리는 처음에는 온라인 수업에서도 화면을 끄고 강의하지만, 마지막에는 커튼 뒤에 숨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자기 몸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비만한 몸을 연민으로 바라보는 시선에서 벗어난 것이지요.


시대에 따라 바람직한 체형의 의미는 변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면, 몸은 타인에게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느끼고 움직이며 사용하는 존재라는 점입니다.


비만 치료제 주사 위고비(Semaglutide)가 최근 국내 12세 이상의 소아청소년에서도 허가되었습니다. 미국에서는 이미 FDA 승인을 거쳤고, 할리우드 스타를 비롯한 많은 성인들은 위고비로 체중 감량을 하고 있습니다. 비만의 요인은 식습관, 운동을 비롯한 생활 습관, 유전, 장내 미생물 등 다양하기에 한 가지 방법으로는 체중감량에 성공하기 어렵습니다. 식습관 개선과 운동은 물론이고, 필요하다면 진료와 약물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이유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사용할 몸을 위한 것이지, 보이는 몸을 위해서가 아닙니다.


찰리는 시선에서 해방되었지만 에우헤니아는 아직도 프라도 미술관에서 사람들의 시선 아래 머물고 있습니다. 에우헤니아의 이름은 '고귀하게 태어난 자'라는 뜻입니다. 스페인 왕실에서는 에우헤니아를 <몬스터>로 보았지만, 이제는 소녀를 <고귀한 아이>로 불러주고 싶습니다. 에우헤니아를 구경거리로 소비했던 17세기의 야만성이 현대 사회에서 반복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에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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