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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weet little kitty May 08. 2024

디프테리아와 후두염

고야의 디프테리아 

고야(Francisco Goya,1746-1828)의 그림 중 <디프테리아>라는 작품이 있습니다. 성인 남자가 아이의 목에 손가락을 넣은 기이한 장면인데요. 20세기 후반 고야의 작품 목록이 발견되면서 이 그림은 스페인의 피카레스크 소설 <라자리요 데 토르메스의 삶, 그의 행운과 불운(The life of Lazarillo de Tormes and of his fortunes and adversities)> 중 한 에피소드를 표현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피카레스크란 스페인의 독특한 문학장르로, 구걸하거나  남의 물건을 훔치는 소년인 ‘피카로’를 주인공으로 한 사실주의 소설입니다. 그림 속 남자는 눈을 감고 있고 코가 길쭉한데, 소설에 나오는 시각장애인 남성이 주인공 라자리요의 목에 손을 넣어 소시지를 훔쳐 먹었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장면과 일치합니다.


그러나 고야의 목록이 발견되기 전, 스페인의 의사 Gregorio Marañón (1887-1960) 이 그림을 보고 디프테리아(El Garrotillo)라는 제목을 붙였습니다. 당시에는 디프테리아로 목 안에 생긴 회색막(위막, pseudomembrane)을 제거하기 위해 손을 넣어 벗겨내거나 도구를 넣어 소작하는 시술이 실제로 행해졌기 때문입니다. 원래 가롯(Garrote)이란 사람을 목 졸라 죽이는 처형도구를 의미하고, 가로티요(Garrotillo)란 작은 교살(도구)이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디프테리아로 인해 인후두가 붓고 좁아지면 호흡곤란이 생기기에 그런 별명이 붙었습니다. 


이 그림은 아직도 <디프테리아>로 불리고 있습니다. 사연을 모른 채 그림을 보면, 마치 아버지가 숨쉬기 힘들어하는 아들의 목에 손가락을 넣어 기도를 넓혀 주려고 하는 애틋하고 슬픈 장면처럼 보입니다.


프란시스 고야, 1808-10, 디프테리아 (El Garrotillo)


소아의 기도폐쇄는 응급입니다. 성인의 경우 심폐소생을 할 정도의 응급은 기저질환으로 인한 심장의 문제가 많지만 소아, 특히 나이가 어릴수록 기도폐쇄로 인한 심정지까지 오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상기도가 흡입한 공기를 가습하고 이물질을 걸러내는 역할을 한다면, 하기도는 흡입한 산소를 체내로 적절히 공급하고 이산화탄소를 배출하는 역할을 합니다. 그러나 상기도인 후두 부위가 폐쇄되면 하부 기도까지 산소가 도달하지 못하고 이산화탄소도 배출되지 못해 질식과 사망에 이르게 됩니다. 즉 해부학적으로는 상기도 폐쇄지만 기능적으로는 하부기도 폐쇄 및 기능 정지까지 일으키게 됩니다.


영유아는 기관지 감염, 이물, 가래 만으로도 기도 폐쇄가 쉽게 일어나고, 심한 호흡곤란을 일으키게 됩니다. 기도가 조금만 좁아져도 저항이 크게 증가하기 때문입니다. 또 영아의 흉벽은 단단하지 않고 늑골이 성인보다 수평으로 위치하며 횡격막도 돔 형태로 편평한 모양입니다. 이런 형태는 성인에 비해 흉곽을 늘려 호흡하는데 매우 불리합니다. 


리처드 테넌트 쿠퍼, <병든 아이를 목 졸라 죽이는 유령의 골격(skeleton)>, 1910년, 웰컴 컬렉션


기도 수축 또는 폐쇄가 오면 어떤 느낌일까요? 영국의 화가 리처드 쿠퍼(Richard Tennant Cooper, 1885-1957)는 기도폐쇄를 해골이 아이의 목을 조르는 것으로 표현했습니다. 이 작품은 1912 년경 헨리 S. 웰컴 (Henry S. Wellcome)이 쿠퍼에게 의뢰한 그림 중 하나입니다. 쿠퍼는 파리에서 미술을 공부했고, 1914년 영국군으로 세계 1차 대전에 참전하여 전쟁 기록화가로 일했습니다. 이 작품 외에도 감염병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그림이 여럿 있습니다. 웰컴 컬렉션은 다국적 제약사인 GSK의 전신이 된 트러스트 재단의 대표 헨리 웰컴이 수집한 작품을 모아 만든 사립 박물관으로 런던에 있습니다. 사람의 몸과 의학에 관한 작품으로 가득하며, 동시에 많은 의학 관련 서적을 보유하고 있는 의학박물관입니다.


쿠퍼의 '아이의 목을 조르는 해골' 그림은 디프테리아가 스페인어로 작은 교살인 점과 일맥상통합니다. 저도 예전에 검사를 위해 기도수축을 유발하는 아데노신을 투여받은 적이 있는데, 짧은 순간이지만 목을 조르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엄청난 주먹이 저의 가슴 중앙부위를 누르고 쥐어짜는 느낌이 고통스럽고 무서웠습니다.  

고야의 그림으로 다시 돌아가보면, 디프테리아는 Corynebacterium diphtheriae라는 이름을 가진 세균에 의한 급성 독소 매개 질환입니다. 독소는 심장근육, 콩팥, 말초신경 세포 등에 작용하여 각종 증상을 유발합니다.


디프테리아 백신은 1920년대에 나왔지만 1930년까지는 부작용 등으로 널리 쓰이지 못하다가, 1940년 DPT (디프테리아-백일해-파상풍) 백신으로 편입된 이후 유럽과 미국에서 상용화되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백신이 도입되기 전까지는 소아에서 흔한 사망의 원인이었으나, DTP 백신을 사용하면서 1970년대 이후부터는 대유행이 사라졌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1987년 이후, 일본에서는 1999년 이후 발생 보고가 없습니다. 디프테리아의 치사율은 10%, 영유아의 경우 20% 이상이므로 백신 접종은 획기적인 발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백신 접종이 원활하지 않은 일부 국가에서는 여전히 발생합니다.



조르주 시코토, <기도삽관>, 1904, 파리 빈민구제 미술관


조르쥬 시코토(Georges Chicotot, 1868-1921)는 프랑스의 의사이자 화가였습니다. 그는 오늘날의 영상의학과 의사로 유방암의 치료에 방사선을 도입했고, 화가로서는 인상 깊은 의학적 처치 장면을 그림으로 남겼습니다. <기도삽관(Le tubage)>이라는 그림은 동료 의사 Dr. Albert Josias가 디프테리아에 걸린 아동을 검사하고 치료하는 장면을 그린 것입니다. 목의 앞쪽에서 직접 절개하는 기관절개술(Tracheostomy)은 너무 침습적인 시술로 결국 사망에 이르게 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다행히 1885년 미국의 의사 조세프 드와이어(Joseph O'Dwyer, 1841–1898)가 디프테리아 환자에서 기도삽관(laryngeal intubation)을 고안하여 많은 생명을 살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옆에서 무언가를 준비하는 사람은 또 다른 의사로 말의 혈청으로 만든 디프테리아 항독소를 준비 중입니다. 힘든 시술이지만 아이는 비교적 얌전하게 앉아 있는데, 자세히 보면 상체를 결박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날에는 중환자실이나 수술실처럼 무균상태인 공간에서 숙련된 전문의가 기도삽관이 어려운 경우 안전하게 기관절개술을 시행합니다. 대학병원에서 응급 기관절개술을 위해 이비인후과 의료진을 호출하면 30초 이내에 여러 선생님들이 수술도구를 들고 바람처럼 나타나서 시술을 시작합니다. 그만큼 기도폐쇄는 응급이라는 점에 의료진은 이견이 없습니다.


 2023년 서울의 한 대학병원에서 후두염에 걸린 5세 아동이 응급실에서 밤새 치료 후 귀가했다가 집에서 사망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입원시킬 병상과 의료진이 없어 응급실에서 최선의 치료를 해 주었지만, 아이는 귀가 후 호전되었다가 끝내 사망했습니다. 물론 기도폐쇄에 취약한 연령이고 후두염 자체의 중증도가 높았을 확률이 높습니다. 그러나 기도 폐쇄와 관련하여 소아 중증 의료가 왜 필요하고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주는 사건임에는 틀림없습니다.


디프테리아는 백신으로 사라졌지만 오늘날 우리에게는 여전히 소아의 기도폐쇄를 일으킬 수 있는 원인균과 질환들이 존재합니다. 대한민국의 경제와 현대 의학이 아무리 발전했어도 후두염에 걸린 아이를 숨 쉬게 하지 못한다면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아이의 힘겨운 호흡에 그림 속 남자가 넣었던 손가락 대신, 적절한 응급 처치와 치료로 아이의 숨구멍을 틔워줄 수 있는 대한민국을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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