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러의 <매독에 걸린 남자>
매독에 걸린 남자의 초상화
빨간 망토를 두르고 깃털이 달린 모자를 쓴 남성이 고통스러운 표정을 하고 서 있습니다. 얼굴과 다리에는 물집이 가득합니다. 양쪽에는 독수리로 상징되는 뉘른베르크의 문장이 그려져 있습니다. 이 그림은 독일의 화가 알브레히트 뒤러(Albrecht Dürer, 1471-1528)가 ‘매독에 걸린 남성’을 기록한 판화로, 독일의 의학서에 실렸습니다. 그림 속 남성은 경제적 대가를 받고 전쟁에 참여하는 용병(Landsknecht)으로 추정됩니다.
1494년 나폴리 왕국의 페르디난도 1세가 사망하자, 프랑스의 샤를 8세는 나폴리를 차지하고자 군대를 이끌고 내려왔습니다. 군인이라고 하면 우리는 조국을 위해 참전하는 사람들을 떠올리지만, 중세시대 유럽에서는 출신 지역과 상관없이 대가를 받고 전쟁에 참여하는 용병이 있었습니다. 귀족 신분으로 영주에게 충성과 봉사를 약속했던 기사들이 정규직이라면, 출신 지역이나 계급과는 상관없이 보수를 받고 전투에 참여하는 용병은 프리랜서 계약직이었습니다. 이들은 어제의 적도 오늘의 고용주로 모실 수 있었고, 전투가 끝나면 각국으로 흩어져 또 다른 전투에 투입되었습니다.
14세기 화약과 대포가 등장하면서 기사들의 무거운 갑옷은 무용지물이 되었고, 전투가 보병 중심의 대형 전술로 바뀌어 용병을 쓰는 것이 유리했지요. 1476년 부르고뉴의 샤를 공이 갑옷의 기사 부대를 이끌고 스위스를 정복하러 떠났다가 농민으로 이루어진 보병 부대에 참패를 당한 뒤, 기사 제도는 사양길로 접어들었습니다.
샤를 8세의 용병들은 점령지에서 매춘 등 성접촉을 통해 매독에 걸리게 되었고, 전쟁이 끝나자 각지로 흩어졌습니다. 밀집과 해산의 반복, 매춘과 약탈, 성폭력을 일삼았던 용병들의 삶은 감염병을 옮기기에 최적이었지요.
나폴리에서 귀환한 용병들이 퍼뜨렸기에 프랑스에서는 매독을 ‘나폴리 병’이라고 하고, 영국이나 독일에서는 ‘프랑스 병’이라고 불렀습니다. 같은 병을 두고 서로 남 탓을 한 셈입니다.
매독에 걸리면 처음에는 미열이나 통증 없는 성기의 병변이 생겼다가, 이후에는 피부에 붉은 반점이 생기고 점차 증상이 사라집니다. 이때 생긴 반점이 매화 같다고 하여 매독이라는 이름이 붙었지요. 여기에서 끝이 아닙니다. 매독이란 녀석은 우리 몸에 꽤 오래 잠복할 수 있어요. 초기에 항생제로 치료하지 않으면 10년에서 20년 후에는 여러 장기로 퍼지면서 뇌까지 침범하여 정신이상과 치매까지 일으킬 수 있습니다.
그런데 뒤러의 판화 속 남성은 2기 발진이라고 보기에는 너무 큰 수포가 가득해 현대의 매독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유럽에서 매독이 창궐하기 시작한 15세기 후반에는 지금과 달리 빠르고 심한 경과를 밟았기 때문입니다. 2019 코로나 팬데믹 초기에는 확산도 빠르고 폐렴이나 중증 질환이 많았지요. 이제는 백신도 맞았고 우리도 적응하여 수월하게 넘길 수 있는 것과 유사합니다.
삽화에서 눈에 띄는 것은 남성의 머리 위 천체와 별자리입니다. 의학서에 실린 질병 삽화에 별자리라니 무슨 뜻일까요?
뒤러는 16세기 독일의 화가이자 인문학자로, 의학을 비롯한 다양한 학문에 조예가 깊었지만, 여전히 ‘네 가지 체액’ 설을 신봉하는 학자였습니다. 그래서 매독의 원인이 좋지 않은 별자리 때문이라고 믿었습니다. 중세 기독교 세계관에서 천문학은 신학에 속해 있었고, 의학에도 영향을 미쳤던 것입니다. 인체는 작은 우주였고 행성은 사람의 체질과 관련이 있었지요. 치료법이 없는 질병을 하늘의 뜻으로 보는 시각은 19세기까지 이어졌습니다.
매독은 어디에서 왔는가
매독은 언제부터 있었을까요? 현재까지는 신항로 개척을 통해 아메리카 대륙의 매독균이 유럽으로 옮겨 왔다는 콜럼버스 가설이 가장 유력합니다. 1493년 콜럼버스 원정대가 귀환하면서 심한 매독환자가 발생했고, 프랑스와 이탈리아 간의 전쟁에서 빠르게 확산되었기 때문입니다.
트레포네마 균에 속하는 매독균(T.pallidum subsp. pallidum)에는 99%의 DNA를 공유하는 자매종이 존재합니다. 이들 자매종에 감염되면 요(Yaw), 베젤(Bejel)이 라고 불리는 피부질환이 발생하는데, 매독처럼 뼈에도 병변을 일으킬 수 있습니다. 신대륙에 원래 있었던 트레포네마 균은 이들과 유사했습니다. 성접촉 대신 피부 접촉으로 감염되고, 일부 지역에 경미한 증상으로 일어나는 감염입니다.
콜럼버스 원정대는 신대륙 주민을 정복과 착취의 대상으로 보았습니다. 여기에는 원주민 여성과 폭력에 가까운 성접촉도 포함됩니다. 강압적이고 무분별한 성접촉은 트레포네마 균의 새로운 활동무대가 되었을 것입니다.
2024년 발표된 남미지역 유골의 DNA 분석 연구에 따르면, 고대 트레포네마 균은 약 9000년 전 남아메리카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녀석들은 현대의 매독균처럼 강한 균들이 아니었고, 성병인 매독균은 가장 나중에 진화된 종으로 추정합니다. 즉, 매독균의 조상은 신대륙에서 기원했으나 매독균은 신항로 개척 이후 인류의 접촉과 행동양식으로 인해 진화하고 창궐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각국의 이름을 붙여 불렀던 매독은 뒤러의 그림처럼 큰 물집이 많이 잡히기에 대두창(Great pox)이라고도 불렸습니다. 그러나 영어로 매독을 뜻하는 시필리스(Syphilis)는 발진의 모양을 따서 붙인 이름이 아니었습니다.
1530년 베네치아의 의사이자 시인인 프라카스토로(G. Fracastoro, 1476-1553)는 “시필리스(매독,Syphilis ) 또는 프랑스 병”이라는 시에서 처음으로 이 병명을 사용했습니다. 그리스 신화에 시필루스(Syphilus)라는 양치기가 있었는데, 무더위와 가뭄에 태양의 신 아폴론을 배신하고 다른 신을 섬기기로 합니다. 이에 분노한 아폴론은 시필루스에게 벌로 치명적인 병을 내렸다는 것이 프라카스토로의 서사입니다. 양치기 시필루스의 이름을 따서 시필리스 (Syphilis)가 된 것이지요.
사실 ‘Syphilus(시필루스)’는 프라카스토로가 만들어낸 인물이었습니다. 질병의 전파 경로에 관심이 많았고, 접촉에 의한 감염 개념을 제시한 의사가 상상 속의 인물까지 동원해서 시를 쓰다니, 좀 의아합니다. 당시에는 이 지독하고 끔찍한 병의 원인을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납득할만한 서사가 필요했던 것은 아닐까요?
한편, <은유로서의 질병>을 쓴 미국의 작가 수전 손택 (Susan Sontag)은 질병을 신의 형벌로 해석하는 것은 폭력적이라고 비판했습니다. 병을 죄의 결과로 해석하면 환자는 치료받아야 할 존재가 아니라 비난의 대상이 되기 때문입니다. 안타깝게도 매독은 성관계로 전파되었기 때문에 타락과 문란함의 대가로 보는 시각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선천성 매독을 표현한 그림
렘브란트는 1665년, 한 남성의 초상화를 그렸습니다. 처진 눈과 함몰된 코, 돌출된 이마, 입 주변의 붉은 피부 등 남다른 외모를 보이는데요. 이 남성의 나이는 몇 살일까요? 놀랍게도 24세였습니다. 초상화의 주인공 제라드 드 래레스(Gerard de Lairesse, 1641–1711)는 벨기에에서 태어나 네덜란드에서 활동한 화가입니다.
현대 의학의 관점으로 보면 래레스의 함몰된 코, 처진 눈과 입 주변의 붉은 피부는 선천성 매독과 유사합니다. 임신 중에 어머니가 매독에 걸려 제대로 치료받지 않으면 태반을 통해 아이도 매독균에 감염됩니다. 선천성 매독은 유산이나 사산을 일으키기도 하고, 태어난 아이에게는 여러 가지 장애를 일으키는 치명적인 질병입니다.
래레스는 화가 집안에서 태어나 어릴 때부터 그림을 배웠고, 신화나 역사를 그리는 고전주의 화가로 활동했습니다. 렘브란트의 영향을 많이 받았고, 렘브란트 이후에 네덜란드의 유명한 화가로 손꼽습니다. 그러나 래레스는 50세 경 완전히 시력을 잃어 그림을 그릴 수 없게 되었습니다. 선천성 매독의 증상은 조기 증상과 후기증상으로 나눌 수 있는데, 래레스의 시력저하는 후기 선천성 매독의 합병증으로 추정됩니다.
화가로서는 사형선고나 다름없었지만, 평소 다방면의 예술에 조예가 깊었던 래레스는 아들의 도움을 받아 강의도 하고 책도 썼습니다. 페니실린이 개발되기 전 수많은 예술가들이 성접촉을 통해 후천성 매독에 걸리면 고통과 좌절로 서서히 몰락했지요. 하지만 래레스는 타고난 질병에 좌절하지 않고 새로운 학문으로 승화시켰습니다. 코의 모양으로 보면 후천성 매독 감염과 유사하지만, 당시에는 선천성 매독에 대해 정확한 이해가 없었기에 래레스는 영문을 모른 채 그저 열심히 살았는지도 모릅니다. 후대의 의사들이 초상화를 보고서 '선천성 매독이었구나' 추정할 뿐이지요.
문득 전공의 시절 신생아 중환자실에서 만났던 선천성 매독 환아가 생각납니다. 아이는 저체중에 피부에 울긋불긋한 반점이 있었고, 찐득한 콧물이 많아 수시로 석션을 해 주어야 했습니다. 일반 병동의 아동에게는 흔한 호흡기 증상이지만, 아직 면역이 완성되지 않은 신생아에게 콧물은 결코 흔한 증상이 아니었습니다. 게다가 체구가 작은 신생아에게 코막힘은 호흡곤란을 유발하는 심각한 고통입니다. 체중도 작고 가녀린 아기가 홀로 분비물과 사투를 벌이는 모습이 너무 안쓰러웠습니다. 엄마는 산전에 제대로 치료받지 않은 매독감염이었습니다. 이 아이에게 과연 무슨 잘못이 있을까요?
부모의 죄를 자식이 받는 것일까
오래전 그날, 신생아실의 그 아이를 떠올리게 하는 그림을 만났습니다. 몸통에 발진이 가득한 아기를 안고 있는 여성이 울고 있습니다. 여인의 얼굴은 붉은색인데, 아이는 창백하고 핏기가 없어 더욱 섬뜩합니다. 엄마의 치마에 보이는 검은색 무늬는 매독의 사회적 낙인을 연상시킵니다. 노르웨이의 화가 뭉크의 <유전 (inheritance) >이라는 작품입니다. 성경에는 '아버지의 죄를 자식이 받는다' (출애굽기 34장 7절)는 구절이 있습니다. 뭉크는 자신의 그림에 비슷한 문구를 남겼습니다.
이 그림은 뭉크가 프랑스 파리의 생 루이 병원에 있는 물라주 박물관(Musée des Moulages)에서 매독에 걸린 여성과 아이를 표현한 밀랍 모형을 관람한 뒤, 병원에서 성매개 감염에 걸려 우는 실제 여성환자를 보고 영감을 얻어 그림을 그린 것입니다.
뭉크는 이 그림의 제목을 왜 <유전>이라고 지었을까요?
16세기 매독의 창궐을 신의 형벌로 여겼던 것처럼, 선천성 매독 역시 감염병에 대한 이해가 없어 유전으로 인식되었기 때문입니다. 19세기까지만 해도 의사들은 아버지의 정액을 통해 태아가 수정될 때, 이미 매독에 걸린다고 믿었습니다. 20세기 들어 혈액 검사로 매독을 진단하게 되면서 어머니의 매독이 태반을 통해 넘어온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요. 유전이라고 생각하며 그저 숙명이지만, 감염이라고 생각하면 치료할 수 있는 것이 매독입니다. 그러나 아버지로부터 강박과 불안을, 어머니로부터 결핵을 물려받았다고 믿었던 뭉크로서는 당시의 의학 수준을 넘어서는 생각을 할 수 없었습니다.
인류는 15세기말부터 19세기까지 매독에 속수무책으로 당하다가, 20세기 중반에야 페니실린의 개발로 매독의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조절 가능했던 감염병인 매독이 최근 전 세계적으로 증가하고 있습니다. 2000년대 이후 큰 폭으로 증가한 해외여행과 국제결혼, 콘돔을 사용하지 않는 피임법, 즉석만남 어플을 통한 무분별한 남녀 관계는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과 나폴리 전쟁의 용병부대를 떠올리게 합니다. 치료법과 예방법이 모두 존재하는데도 질병이 증가한다면 매독은 정말 신의 벌이자 숙명인 것일까요?
역사를 돌아보면 매독은 하늘에서 내린 형벌이 아니라, 신대륙 원주민의 몸을 수단으로 여기고 무분별한 접촉을 한 행동 때문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감염병은 인간이 새로운 세계로 이동하고 지배한 결과였던 것이지요. 그래서 질병의 역사는 인간이 걸어온 길에 대한 기록이기도 합니다. 질병을 숙명으로 바라보던 무책임하고 수동적인 시대는 지났습니다. 현대인은 질병의 조기 진단법과 항생제라는 무기를 양손에 들고 있습니다. 역사를 돌아보고 과학을 신뢰하며 스스로 책임지는 인류가 되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