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의학에서는 역사적인 순간이 있습니다. 예방접종의 발명도 그중 하나일 것입니다. 소아청소년기는 감염 질환의 발병이 가장 많은 시기로 항생제로 해결되지 않는 바이러스 질환까지 고려하면, 예방접종은 영아와 소아의 사망률을 낮추는 획기적인 발명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부모들에게는 소아청소년과에 가서 자녀에게 예방접종을 맞히는 것이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나 19세기 사람들에게 아플 때만 갔던 병원을 건강할 때 방문해서 주사를 맞는다는 것은 신기한 장면이었을 것입니다.
이 새로운 순간을 포착해서 그린 그림이 있습니다. 덴마크의 화가 안나 앙케(Anna Ancher,1859-1935 )가 그린 <예방접종>입니다.
Anna Ancher, 1899, 예방접종, 덴마크 스카겐 미술관
안나 앙케는 덴마크의 화가로, 스카겐 공동체의 일원이기도 합니다.
안나 앙케는 화가 남편 미카엘 앙케(Michael Peter Ancher, 1849-1927)와 함께 덴마크의 어촌마을 스카겐에서 빛과 자연을 찾아 모여든 화가들과 함께 소박한 일상을 공유하며 평생 그림을 그렸습니다. 당시 유럽의 보수적인 분위기에서 결혼한 여성이 화가로서 자리 잡는 것은 어려운 알이었습니다. 그러나 남편 미카엘 앙케는 화가로서 아내의 삶을 존중하고 격려하며 함께 그림을 그렸습니다. 스카겐 공동체의 삶을 담담하게 그려낸 안나 앙케는 덴마크 미술사에서 매우 중요한 인물로 기록됩니다. 앙케 부부는 덴마크 지폐에 역사적 인물로 함께 그려지기도 했습니다.
<예방접종>은 1899년 안나 앙케가 코펜하겐의 Charlottenborg 봄 전시회에 출품한 것으로, 전시회에서도 좋은 평가를 받았지만 전시되기 전 이미 스웨덴의 수집가에게 그림이 팔렸다고 합니다. 2013년까지는 개인소장 중이었다가 이제는 스카겐 미술관에서 관람할 수 있습니다.
당시 덴마크에서는 1899년부터 모든 아동에게 7번째 생일이 되기 전까지 천연두 접종을 의무적으로 시행했습니다. 그림의 장소는 안나 앙케가 살던 스카겐으로 추측되며, 그녀는 이 그림을 위해 클리닉에서 직접 스케치를 하고 습작을 통해 수정하며 그림을 완성했습니다.
질병의 처치 장면을 그린 그림과는 달리 의료진이라고는 의사 한 명 밖에 없고, 나머지는 모두 건강해 보이는 아이와 엄마들입니다. 의사의 뒤쪽으로 소매를 내린 여자아이가 있는데, 상완에 주사자국*(아래 사진의 두 갈래 바늘 모양과 일치)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이미 접종을 맞은 것 같습니다. 소녀는 맞은편 남자아이와 예방접종의 경험을 모험담처럼 나누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 뒤로는 편하게 모유수유를 하고 있는 어머니와 아기들이 있습니다.
그림의 왼편에는 창문을 통해 환한 빛이 들어옵니다. 이 빛은 표면적으로는 진료실을 밝게 유지해 주지만, 의미를 확장해 보면 접종으로 인해 지역의 공중 보건과 삶의 질이 나아짐을 의미하는 밝은 빛처럼 느껴집니다. 안나 앙케는 <예방접종> 이후로 병원이나 의술에 관한 그림을 그리지 않았기에, 예방접종을 의학적 처치라기보다는 공동체의 삶과 사건으로 표현한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어니스트 보드(Ernest Board,1877-1935), 천연두 접종을 최초로 시행하는 제너박사, 1796, 웰컴 컬렉션
한 소년이 팔에 접종을 맞고 있습니다. 의사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져 긴장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아이는 주사 맞는 부위를 쳐다보고 있고, 엄마는 아이의 팔을 꽉 잡고 있는데 뒷모습이지만 떨리고 두려운 표정일 것 같습니다. 아이는 제너 박사의 첫 번째 천연두 접종 대상이기 때문입니다. 평온해 보이는 진료실이지만 그림으로 기록할만큼 역사적인 순간이었습니다.
1798년 영국의 의사 에드워드 제너(Edward Jenner, 1749-1823)는 우두 바이러스를 이용한 천연두 예방법을 개발하여 최초로 백신이라는 개념을 만들어 냈습니다. 이전까지는 인두법(variolation)으로 천연두 예방접종을 시도했는데, 천연두 환자의 병변 부위에 직접 상처를 내고 그 염증 물질을 건강한 사람에게 주입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는 천연두 질환을 약하게라도 앓게 되기에 예방하려다가 오히려 질병에 걸릴 위험이 있었습니다. 제너 박사 역시 어릴 때 인두법을 시행받은 뒤 심하게 증상을 앓았다고 합니다. 그림 속 아이는 제너의 예측대로 접종 후 가벼운 증상으로 끝났고, 6주 후 천연두 접종을 다시 했을 때에도 가벼운 증상으로 끝나 우두 접종이 천연두에 효과가 있음을 증명했습니다. 제너의 백신이 성공한 것입니다.
제너는 소젖 짜는 여인들이 천연두를 약하게 앓는다는 사실에 착안하여 소젖 짜는 여인의 손에 생긴 우두 바이러스 물집의 고름을 다시 사람에게 주입하는 방법으로 천연두 예방접종을 시도하였습니다. 우두 바이러스는 천연두 바이러스와 유사하므로 일종의 교차면역을 시도한 것입니다. 제너의 방법은 인두법보다 성공적이었고 이후 많은 유럽 국가에서 천연두 접종이 이루어졌습니다.
처음에는 백신을 보관, 운송할 방법이 없어 사람에게서 사람으로 옮기는 '팔대팔(arm to arm)' 방법을 사용했지만, 1860년 이후 부터는 동물을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송아지에서 백신 물질을 증식시킨 뒤 사람에게 접종하는 방법입니다. 이렇게 하면 사람간 질병을 전파시키지 않으면서 안정적으로 백신을 공급할 수 있으며 대량생산이 가능합니다.
빈센트 보라스 아벨라, <예방접종>, 1900, 프라도 미술관 빈센트 보라스 아벨라(Vicente Borrás Abella,1867-1945)는 스페인의 화가이자 복원가로 초상화와 풍경화 등을 그렸습니다. 그는 안나 앙케와 비슷한 시기에 <예방접종> 장면을 그렸는데, 예방접종하는 장면에 송아지가 등장합니다. 화가는 동물백신을 이용한 접종이 이루어지는 장면을 인상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또 한 가지 눈여겨 볼 부분이 있습니다. 그림에는 잘 차려입은 붉은 옷의 여성과 아이가 주사를 맞고 있습니다. 그 뒤로 상대적으로 형편이 넉넉해 보이지 않는 여성과 아이들이 차례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안나 앙케의 그림과는 다른 풍경입니다. 화가는 부유한 아동이나 그렇지 못한 아동 모두 같은 예방접종을 받음으로써 보편적 의료행위와 복지가 이루어지는 순간을 포착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우리나라는 필수예방접종을 무료로 맞을 수 있도록 만 12세 이하 어린이를 대상으로 국가예방접종 지원사업을 실시하고 있습니다. 2024년 기준 총 18종으로 소아청소년과학회에서 권장하는 백신이 대부분 포함됩니다. 이는 오늘날에도 예방접종이 보편적 복지에 해당한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예방접종은 집단 규모로 이루어지므로 백신에 대한 불안과 거부감, 소수의 부작용 사례가 나타납니다. 천연두 백신을 의무화한 영국에서는 소의 고름을 사람에게 주입하면 소가 된다는 괴담이 돌았고, 일부 지역에서 접종 거부운동이 있었습니다. 오죽하면 영국의 풍자화가 제임스 길레이는 <우두 접종의 놀라운 효과>라는 그림에서 접종을 맞고 몸의 일부가 소처럼 변하는 그림을 판화로 만들어 내놓을 정도였습니다. 미국 매사추세츠 주에서는 천연두 접종을 해야만 학교에 보낼 수 있도록 하자 법적 분쟁까지 일어나, 공공의 이익이 개인의 자유보다 우선할 수 있다는 대법원 판례를 남겼습니다. 수많은 우여곡절과 논란을 딛고, 천연두는 꾸준한 접종과 위생 개선으로 1980년도에 지구상에서 사라진 질환이 되었습니다.
2020년 시작된 코로나 예방접종 역시 부작용에 대한 두려움과 대규모 집단 접종으로 인한 부작용 사례가 있었습니다. 예방접종을 통한 보편적 복지에 앞서 소와 말 등 동물의 희생이 있었고, 대규모 예방접종에 따른 부작용과 소수의 희생이 있었음을 기억합니다. 과학이 아무리 진보해도 언제나 그늘은 존재한다는 점이 조금은 씁쓸합니다. 백신이 개발되기까지 희생했던 동물과 피실험자들, 연구자들, 그리고 부작용으로 고통을 겪은 모든 이들에게 감사와 위로의 마음을 전하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