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기의 탄생과 함께 아기를 먹이는 일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육아의 기본입니다. 그래서 모유수유는 소아청소년과의 단골 주제이고, 소아청소년과 의사들은 모유수유 홍보대사나 마찬가지입니다. 모유는 각종 감염성 질환과 알레르기 질환을 감소시키고, 아이의 영양과 두뇌 발달에 긍정적인 영향을 끼칩니다.
모유수유 하는 장면을 그린 그림은 성모 마리아와 아기 예수를 주제로 한 종교적 그림이 많습니다. 성모 마리아가 아기예수를 먹이는 장면은 자연스럽고 경건한 모습으로 그려졌습니다. 반면 신화 속 여신의 수유 장면을 그린 그림도 있습니다. 이탈리아의 화가 틴토레토(Tintoretto 또는 Jacopo Robusti,1518-1594)가 그린 <은하수의 기원>입니다.
자코포 틴토레토, 1575, <은하수의 기원>, 내셔널 갤러리 런던
바람둥이 제우스는 알크메네와의 외도로 낳은 헤라클레스를 데려와 몰래 헤라의 젖을 먹이려고 합니다. 이때 헤라클레스가 너무 세게 젖을 빨아서 헤라가 깜짝 놀라 손사래를 치며 물러납니다. 헤라의 모유가 하늘로 흩뿌려지고, 이것이 은하수를 만들었다는 이야기입니다. 틴토레토의 본명은 야코포 로부스티지만, 염색공의 아들로 태어나 작은 염색공이라는 의미의 틴토레토로 더 많이 불렸습니다. 틴토레토는 매너리즘 화가로, 다양한 화풍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며 역동적인 구도를 선호했습니다. 헤라와 제우스의 구도는 대각선으로 교차하고, 주변의 천사들까지 합세해 마치 무중력 공간을 떠다니는 소용돌이 같은 느낌이 듭니다. 이 역동적인 구도는 기습적인 모유수유라는 행위와도 잘 어울립니다. 만약 헤라가 앉아 있었다면 모유수유 자세는 풋볼 자세에 가까웠을 것입니다. 풋볼 자세는 엄마의 옆구리 사이에 아이를 두고 먹이는 것인데, 마치 미식축구를 할 때 공을 잡는 자세와 비슷합니다. 제왕절개를 해서 배에 무리를 주지 않아야 하거나 쌍둥이를 먹여야 할 때 좋은 자세입니다.
인상주의, 낭만주의 시대에 들어서 일상의 풍경을 그리게 되면서 성모 마리아나 여신이 아닌 평범한 여성의 모유수유 장면을 그린 그림이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르누아르(Pierre-Auguste Renoir,1841-1919)는 모유수유 장면을 그렸는데, 제목을 <모성>이라고 붙였습니다. 그림 속 주인공은 르누아르의 모델이었다가 부인이 된 앨린(Aline Victorine Charigot 1859-1915)과 그들의 첫 아이 피에르(Pierre)입니다. 앨린은 오른발을 발판에 올리고 있고 비교적 안정적으로 요람자세를 취하고 있지만 손은 아기의 등까지만 감싸고 있습니다. 아이는 한 손으로 발을 움켜쥐고 있어 여유로워 보이는데, 모유수유에 어느 정도 익숙해진 아이의 자세 같습니다.
르누아르, 1885, <모성>, 오르세 미술관
18세기 유럽에서 부르주아 계급이 생겨나면서 경제적 여유가 있는 가정에서는 유모(Wet nurse)를 두기 시작했습니다. 유모란 주로 경제적 대가를 받고 남의 아이에게 모유를 먹이는 경우를 말합니다. 유모는 왕실이나 귀족에서, 또는 엄마의 질병 등으로 모유수유가 원활하지 않을 때 필요했습니다. 의술이 발달하기 전에는 영아 사망률과 모성 사망률이 높았고, 엄마 없는 아기, 아기 잃은 엄마가 존재했기에 유모가 필요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18세기 들어 부유한 상인, 의사, 변호사 등 부르주아 계급이 생겨나자, 아이를 유모에게 맡기고 그 시간에 남편의 사업이나 집안과 관련된 일을 하는 것이 더 효율적이었기에 유모를 고용하는 관습이 생기기도 했습니다.
18세기 후반 본격적으로 산업혁명이 도래하자, 저소득 가정의 여성들도 바깥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도시의 생활비는 비싸고 노동자의 임금은 그에 비해 낮았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유모를 두는 문화는 저소득 가정으로까지 확대되었습니다. 18세기 영국에서는 유모가 일반 남성 노동자보다 급여를 더 많이 받기도 했습니다. 소작농의 부인들이 유모가 되어 아기를 돌보게 되자, 국가는 유모의 자격을 법제화하고 영아가 사망 시 담당한 유모가 신고를 하도록 했지만 잘 지켜지지 않았습니다. 아기는 태어나서 3년 동안 유모의 집에서 사는 경우가 많았고, 이런 아이들은 영아 사망률이 80%에 이르기까지 했습니다. 당시에는 진정제로 잘못 알려진 마약류 시럽들이 양육자에 의해 아기에게 투여된 충격적인 일이 있었는데, 원래 영아사망률이 높다 보니 어떤 이유로 사망했는지 정확히 알 수도 없었습니다. 19세기 들어 조제분유와 젖병이 나오기 시작하고 20세기 들어 상용화되면서 유모제도는 사라졌습니다.
2010~2020년 국내 영·유아 933명 중 혼합수유를 포함하여 모유를 6개월 이상 먹은 아이는 65.9%에서 33.6%로 감소했습니다. 생후 6개월간 모유만 먹인 ‘완전 모유 수유율’은 42.8%에서 13.1%를 기록했습니다. OECD 국가와 비교해도, 아시아 국가들과 비교해도 최저치에 가깝습니다. 이미 저출산시대에 모유수유를 논하는 것이 사치처럼 느껴지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왜 이토록 우리나라의 모유수유율이 낮을까 궁금합니다.
그러나 결코 ‘모성이 부족해서는 아니라는 생각’입니다. 르누아르가 자신의 그림에 ‘모성’이라는 제목을 붙인 것은 그 순간 아내와 아이로부터 느낀 정서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모유는 모성과 동일어가 아닙니다. 모유수유를 방해하는 환경에서는 모성도 자리 잡기 어려울 수 있지만, 모성이 충분해도 모유를 먹이지 못하는 경우가 있으니까요.
그러고 보면, 오늘날 모유 수유율이 계속 낮아지는 것은 바쁘게 돌아가는 현대 자본주의의 사회문화적 요인이 관여하고 있습니다. 근대 부르주아의 부인들이 모유 수유를 유모에게 맡기고 다른 일을 한 것처럼, 오늘날에도 분유를 먹이면 엄마가 육아에 드는 노동을 타인과 분담할 수 있지요. 분유는 내가 원하는 제품을 골라 구매할 수 있고 누가 조제해도 금방 완성되지만, 모유는 처음 시작하는 단계에서는 사람마다 수유의 원활함에 차이가 있고 자세도 불편합니다. 엄마와 아이가 모두 능숙해져야 분유보다 편해집니다. 아이가 삼키는 과정도 모유는 깊게 물고 한 박자 기다렸다가 삼켜야 하지만, 분유는 아이가 빨면 빠는 대로 벌컥벌컥 잘 나옵니다. 이렇듯 분유는 바쁘게 돌아가는 현대 사회의 삶의 속도와 효율성을 충족시켜 주는 장점이 있고, 모유 다음으로 좋은 선택지입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Leonardo Da Vinci),1590, <리타의 성모(Madonna Litta)>, 성 페테르부르크 에르미타주 미술관
이 그림은 모유수유를 언급할 때 흔히 인용되는 그림입니다. 다 빈치의 제자들이 공동으로 그렸다는 논란이 있지만 에르미타주 미술관은 다 빈치의 작품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리타 백작가문이 소유했기에 리타의 성모라고도 부릅니다. 마리아의 유방이 다소 높은 위치에 있는데, 이를 두고 성적인 의미가 배제된 모유 수유의 기능적 의미를 표현하고자 했다는 해석이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 그림의 진짜 매력은 성모 마리아와 아기 예수만으로 채운 단순한 구도라고 생각합니다. 이 그림에는 시선을 분산시키거나 모유 수유를 방해하는 요소가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
모유수유에 성공하려면 다 빈치의 그림처럼 엄마와 아이가 모유 수유에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고, 실질적인 도움을 줄 수 있어야 합니다.
모유의 의미에 대해 여러 생각을 종합해 보니, 소아청소년과 의사로서 저의 바람은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었습니다. 첫째로 모유의 의학적인 장점이 충분히 알려지고 모유 수유를 위한 가정과 사회의 지원이 충분해지기를, 둘째로 모유 수유가 여성의 고된 노동으로 인식되었던 과거의 이미지에 매몰되지 않기를, 셋째로 질병이나 개인적 사정으로 모유를 먹이지 못한다고 해서 죄책감을 느끼거나 타인과 비교하지 않았으면 하는 것입니다. 모유는 모유지 모성의 지표는 아니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