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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weet little kitty Jun 26. 2024

그림 속 아동의 삶과 역사

소아는 작은 어른이 아니다


안녕하세요? 오늘은 아동을 그린 그림에 대해 이야기해 보려고 합니다.

  

15-16세기 르네상스 시대 이전 그림 속 아동은 성경에 나오는 이야기를 그린 경우가 대부분이었습니다. 예수는 아이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신성한 종교적 의미를 지닌 존재였습니다. 16세기 이후의 종교화와 비교해 보면 인물 표현이 사실적이지 않고 선이 딱딱하표현되어 있어 엄마와 아기를 그렸음에도 불구하고 따뜻한 느낌은 아닙니다.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대 그림 속 아동은 로마 신화 속의 큐피드가 많았습니다. 이들은 처음에는 Amorini라고 불렸지만 차차 성경에 등장하는 체루빔 천사의 모습을 한 Putti가 되었습니다. Putti는 대개 벌거벗은 학령기 이전 유아의 모습을 하고 날개가 있습니다.


왕실이나 귀족의 자녀들은 예외적으로 초상화의 대상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부유한 가문의 일원 또는 상속의 대상으로 그림에 등장했지만, 자신의 존재보다는 어느 가문 소속인지가 중요했습니다. 또 놀거나 웃는 모습이 아니라 격식을 갖추어 옷을 입고 경직된 자세로 그림에 등장했습니다. 소아과학에서 중요하게 언급되는 <소아는 작은 어른이 아니다>라는 문구가 있습니다. 소아는 단순히 몸이 작은 어른이 아니라 발달 단계에 따라 고유한 특성을 가지고 있어 독립된 존재로 인식하고 치료해야 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시대 부유한 가문의 아이들은 그저 작은 어른(miniature adult)처럼 행동해야 했습니다. 그림의 모델이 되기 위해 오랜 시간 서 있었을 텐데, 지금 같으면 아동 근로법 위반입니다.


코넬리스 데 보스(Cornelis de Vos), 엄마와 아이 , 1624, National Gallery of Victoria Collection

위의 그림은 네덜란드의 화가 코넬리스 데 보스(Cornelis de Vos,1584-1651)의 <엄마와 아이>입니다. 코넬리스 데 보스는 우리에게 친숙한 화가는 아니지만 왕실과 귀족의 초상화를 많이 그린 화가입니다. 그는 특히 어린이와 가족 초상화를 섬세하게 잘 그렸습니다. 그는 1617년 경 루벤스를 비롯한 다른 화가들과 함께 종교화를 공동 작업하기도 했습니다. <엄마와 아이>는 엄마와 아이의 화려한 복장을 볼 때 이 아이는 귀족의 자녀인 것 같습니다. 아이는 학령 전기 4-5세 전후의 여아로 보이는데, 몸을 조이는 옷을 입고 있어 답답하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주로 부유한 가문의 자녀가 초상화에 등장하던 시기에도 가난하고 소외된 아동을 그린 그림이 있습니다.



17세기 스페인의 바로크 화가 바르톨로메 에스테반 무리요(Bartolomé Esteban Murillo,1617-1682)<거지소년(The young beggar)>입니다. 누더기 옷을 입고 있고 맨발인 거지 소년이 구석에 앉아 벼룩을 잡고 있습니다. 그런데 소년의 모습과 대조적으로 환한 빛이 들어와 소년을 비춥니다. 소년은 언젠가는 햇살처럼 밝고 따뜻한 시간을 보낼 수 있을까요?


화가는 10세경 부모를 잃고 누나에게 맡겨졌습니다. 그는 종교화를 많이 그렸지만 거리의 부랑아, 걸인들처럼 소외된 사람들의 일상 그렸는데, 어린 시절 부모님을 잃고 외로웠던 경험이 작용한 것은 아닌가 생각해 보게 됩니다.  


바르톨로메 에스테반 무리요, 1645-1650, 거지소년, 루브르 박물관


인상주의, 사실주의 화가들이 등장하면서 화가의 자녀나 화가가 바라본 일상의 아동을 그린 그림이 등장했습니다. 아이들은 밝게 웃거나 일상을 즐기고 있으며, 개나 고양이 등을 안고 있기도 합니다. 아동이 동물을 안고 있는 그림은 선하고 아름다운 이미지에 잘 부합됩니다.             


산업혁명 시대의 아동은 상반된 2가지 이미지로 그려졌습니다. 부르주아의 자녀들은 순수하고 낭만적인 이미지로 아동을 대표했지만, 가난한 아동들은 비참한 노동자의 삶을 살았습니다. 영국에서 방직기의 사용으로 몰락한 직조공의 자녀들은 공장의 노동자로 전락했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은 하루에 12시간 이상 일했고, 제대로 먹거나 교육받지 못했습니다.


소설 <공장에서 일하는 소년, 마이클 암스트롱의 삶과 모험> 중에서, 1840

프란시스 트롤로프 (Frances Trollope,1779-1863)가 쓴 소설 <공장에서 일하는 소년, 마이클 암스트롱의 삶과 모험>은 영국 산업혁명으로 인해 노동자, 특히 어린 노동자들이 얼마나 고통받았는지를 최초로 표현했습니다. 트롤로프는 맨체스터의 방직공장에서 6세 아동이 노동하는 것을 보았던 경험을 살려 소설을 썼습니다. 이 책에 실린 일러스트를 보면 옷은 찢어지고 뼈가 드러날 정도로 마른 아동이 보입니다. 그 옆으로 먼지를 뒤집어쓰고 쭈그리고 앉은 아동도 있습니다. 부조리한 현실을 고발하는 소설 덕분에 영국에서는 1844년 8-13세 아동은 하루 6시간 반까지만 일할 수 있도록 공장법을 개정하였습니다. 


데이비드 앨런(David Allan), 1780년대, Lead Processing at Leadhills, National gallery of Scotland


위의 그림은 스코틀랜드의 화가 데이비드 앨런이 납 광산의 소유주인 James Hope-Johnstone 백작으로부터 의뢰를 받아 그린 것으로, 납 공정의 첫 단계인 납 부수기 과정을 표현했습니다. 그림에 보이는 아이들은 9세 정도였다고 하며, 도구를 이용해서 납을 내려치고 있습니다. 아동의 뒤쪽에는 백작과 부인이 서서 공정을 지켜보고 있군요. 초등학교 2학년 정도 아이들이 하루 종일 고된 일을 하고 어른은 뒷짐을 지고 지켜보다니, 기가 막힐 노릇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15세 미만이거나, 18세 미만이면서 중학교 재학 중인 소아청소년은 근로자로 일할 수 없습니다. 예술 공연의 경우 13세 미만도 가능하지만, 2014년부터 만 15세 미만 아역 배우는 밤 10시부터 새벽 6시까지 밤샘 촬영을 할 수 없습니다. 15세 미만은 주 35시간, 15세 이상은 주 40시간까지 촬영을 할 수 있다고 합니다. 1998년부터 2000년까지 방영되었던 <순풍 산부인과>의 미달이 역을 맡았던 아역배우가 당시 촬영시간제한 법이 없어 너무 힘들었다는 이야기를 하며 눈물을 보였던 기억이 납니다.


유니세프 아동권리협약에 따르면 아동은 차별받지 않고 생존과 발달을 위해 지원받을 권리가 있으며, 아동 최선의 이익을 우선 고려하여 결정하고 의견을 존중받을 권리가 있습니다.  


소아청소년의 진료에 있어서도 크게 4가지 의료 윤리원칙이 적용되는데, 첫째 자기 결정권을 존중하는 자율성의 원칙, 둘째 환자에게 해를 가하지 않아야 하는 해악 금지의 원칙, 셋째 환자에게 최대한 이익이 돌아가도록 하는 선행의 원칙, 마지막으로 최대한 공정하게 의료 자원을 분배하는 정의의 원칙입니다.


성인의 경우 자율성의 원칙이 강조되지만, 소아는 환아의 이익을 중심에 두고 결정하는 선행의 원칙이 가장 중요합니다. 무엇이 아동에게 최선인가에 대해서는 부모의 의견과 대립할 수도 있고, 이때 의사는 독립적으로 판단해야 하는 경우도 생기기 때문입니다. 


저에게는 기억하고 싶지 않은 부끄러운 사건이 하나 있습니다.

새내기 전문의 시절, 지방의 종합병원에서 근무할 때였습니다. 기관지염으로 입원했던 4세 남아가 있었습니다. 엄마가 동남아 사람, 아빠는 한국 사람인 다문화가정 자녀였습니다. 아이는 어느 정도 호전되어 퇴원을 앞두고 있었습니다. 오후 회진 시간에 아이를 진찰하고 나가려는데, 아이의 아버지가 그제야 병실로 들어왔습니다. 아버지는 아이 상태에는 관심이 없는지 저를 쳐다보지도 않았고, 아무것도 묻지 않았습니다. 그때, 아이가 무슨 일인지 약간 떼를 쓰자, 아버지가 갑자기 아이를 때리기 시작했습니다. 사실 아버지는 병실에 들어올 때부터 얼굴이 상기되어 있었고, 술 냄새도 났습니다. 아버지는 아이의 등을 발로 걷어찬 후에야 매질을 그만두었습니다. 아이의 엄마와 할머니는 겁에 질린 얼굴이었지만 아버지를 말리거나 아이를 감싸지 않았습니다.     

 당시에는 아동학대 신고라는 개념이 없었습니다. 당시에는 스마트폰도 없던 때라 증거 동영상을 찍을 수도 없었습니다. 병실에 있는 다른 보호자들도 폭력 앞에 그저 겁에 질렸을 뿐 말리거나 신고하지 못했습니다. 당시에는 아동학대로 신고해도 경찰의 현장 대응이나 관련 법률, 지원, 사회적 인식이 모두 부족했습니다. 만약 제가 선행의 원칙을 적용하여 진료했다면, 증거가 없어도 경찰이나 사회복지기관에 신고하고 기관지염이 좋아졌어도 아이를 퇴원시키지 않고 정형외과나 소아정신과 진료를 봤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그런 시도가 아동에 대한 보호나 부모에 대한 조치는 이루어지지 않고, 오히려 신고자에 대한 보복으로만 돌아오는 사례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아빠가 아이를 때려도 가만히 있는 엄마와 할머니를 보면서 ‘이 사건을 공론화해도 보복이 두려워 아이 편에 서지 않겠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아버지는 그 날 일이 부끄러웠는지 퇴원할 때까지 병원에 오지 않았고, 아이는 기관지염이 좋아져 곧 퇴원했습니다. 선행의 원칙대로 진료하지 못한 저는 아직도 그날 일이 계속 생각납니다. 퇴원 후 아이가 폭력적인 아버지와 무기력한 어머니 밑에서 어떻게 성장했을지 마음이 아픕니다. 그때 제가 조금 더 용기를 내었다면 아이의 삶이 달라졌을까요?          


과거 아동은 독립적 존재로 인정받지 못하다가 근대에 들어 독립적이고 개별적 존재로 인식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현대 사회의 아동은 과도한 학습 경쟁에 노출되고 수면이 부족하며,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것이 더 줄어들었습니다.


초록우산어린이재단에 따르면 지난해 초등학교 5학년∼고등학교 2학년 2231명을 대상으로 한 ‘2023 아동행복지수’ 조사에서 86.9%의 행복지수가 ‘하(下)’로 나타났습니다. 아동행복지수는 수면·공부·미디어·운동 등 4가지 생활영역으로 아동의 하루를 분석하고 권장시간과 비교해 일상 균형 정도를 산출한 것입니다.


충동적으로 자살을 생각한 적이 있다는 응답은 2021년 4.4%, 2022년 7.7%에서 올해 10.2%로 꾸준히 늘었습니다. 행복지수가 낮은 아이들은 ‘늦은 수면, 집콕, 저녁 혼밥, 온라인 여가활동’ 등이 특징이었다고 합니다.


소아청소년과 의사로서, 두 아이를 키우는 엄마로서, 그리고 대한민국의 국민으로서 누구보다 아이들이 행복하기를 바랍니다. 아이들에게 행복이란 쾌락을 주는 자극에 지속적으로 노출되는 것이 아니라, 잘 자고 잘 먹고 잘 노는 것인지도 모니다. 지금보다 조금 더 자고, 조금 덜 공부하고, 더 많이 뛰어놀며 가족과 한 끼를 같이 하는 아이들의 모습을 꿈꿔 봅니다. 아이들의 그림과 이야기에 귀 기울여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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