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히들 해라. 아침이면 소피는 이 세상에 없을 거다.” 나는 창가로 가서 커튼 뒤에 머리를 감췄다. 눈물을 멈출 수 없었다. 밤이 되었고, 소피는 고열에 시달리며 누워 있었다. 그녀의 눈은 충혈되고 마구 흔들렸다. “에드바르야, 나한테서 저걸 좀 데려가 주겠니,...... 저기 저 머리 보이지? 그게 죽음이란다.” 하지만 난 그녀에게서 그걸 떼어놓을 수 없었다. 나는 커튼 뒤에 숨어서 울었다.
1877년, 노르웨이의 화가 에드바르드 뭉크(Edvard Munch,1863-1944)의 일기입니다. 1년 전 뭉크는 객혈을 하고 열과 기침에 시달렸지만 회복했습니다. 그러나 한 살 위 누나인 소피는 뭉크처럼 운이 좋지 못했습니다. 당시에는 결핵약이 없어 질병으로 진행되면 치사율이 50% 이상이었습니다. 뭉크의 어머니도 뭉크가 5세 때 결핵으로 사망했기에 그에게 누이의 죽음은 두 번째 상실이었습니다.
뭉크의 아버지는 의사였지만 아내와 딸의 죽음 앞에 아무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아픈 아이>는 결핵으로 세상을 떠난 누이 소피를 모티브로 그린 것인데, 뭉크는 같은 주제로 총 6점의 그림을 그렸습니다. 이모 카렌이 돌아가신 어머니를 대신해서 아이들의 양육을 담당했지만, 뭉크에게는 한 살 터울의 소피가 어머니 같은 누이였습니다. 뭉크에게 소피의 죽음은 아무리 여러 번 그려도 지워지지 않는 슬픔이었나 봅니다.
에드바르드 뭉크, <아픈 아이>,1885-1886, 오슬로 국립미술관
<아픈 아이>는 채색이나 붓 터치가 세밀하지 않고 다소 거칠게 그렸습니다. 소녀는 베개에 몸을 기대어 힘없이 앉아 있고, 간호하는 여인은 우는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는 듯 고개를 숙이고 있습니다. 여인의 뒤로는 검은빛이 도는 커튼이 있는데, 뭉크의 일기를 보면 소피는 죽음이 거기에 있다고 말했고, 뭉크는 커튼 뒤에 숨어서 울었습니다. 소피에게는 어두운 커튼이 두려운 죽음을 상징하고, 뭉크에게는 슬픔을 꾹꾹 욱여넣은 공간이었나 봅니다.
아픈 가족과 함께 병실에 있어본 사람이라면 이 그림을 보고 느껴지는 뭉클한 감각이 있을 것입니다. 차가운 소독약 냄새, 병실의 건조한 공기, 아무리 밝게 불을 켜도 어둡게 느껴지는 빛, 여러 겹 껴 입어도 시리기만 한 가슴 한 구석, 제삼자의 눈으로 병실을 묘사한다면 다큐멘터리가 되겠지만, 아픈 가족을 둔 사람에게는 드라마의 한 장면이 됩니다. 투박하게 느껴지는 <아픈 아이>의 붓터치는 꾹꾹 눌러 담아야 했던 뭉크의 모든 감각인지도 모릅니다. 뭉크는 소피가 숨을 거둔 의자를 평생 간직했고, 지금도 뭉크 박물관에 가면 그 의자를 볼 수 있습니다.
에드바르드 뭉크, <봄>,1889, 오슬로 국립미술관
비슷하지만 구도가 다른 그림이 있는데 제목이 <봄>입니다. 뭉크는 <봄>을 <아픈 아이>보다 세밀하고 정교하게 그렸습니다. 소녀는 봄이 오는 창을 향해 앉아 있고, 피가 묻은 손수건을 쥐고 있어 객혈을 하는 결핵의 특징을 잘 보여줍니다. <아픈 아이>에서 소녀가 어두운 커튼을 바라보고 있어 죽음을 연상시킨다면, <봄>에서는 노란 꽃이 핀 봄이 오는 창가의 하얀 커튼을 바라보고 있어 질병과 죽음을 받아들이는 의연한 자세가 느껴집니다.
결핵은 공기로 쉽게 전파되어 반드시 격리가 필요한 2급 감염병입니다. 가족 중 한 명이 걸리면 다른 가족도 대부분 걸릴 정도로 전염력이 높습니다. 그러나 옛날 사람들은 감염병에 대한 이해가 없었고 제대로 격리하지도 않은 채, 결핵이 유전병이라고 생각했습니다. 1882년 코흐 (Robert Koch, 1843-1910)가 결핵균을 분리하고 나서야 감염병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1940년대 이후에야 스트렙토마이신, 아이소니아지드 등 제대로 약물을 사용하여 결핵을 치료하게 되었습니다.
결핵에 걸리면 몸이 마르고 핏기 없는 창백한 얼굴을 보이기에, 사람들은 결핵을 ‘마르는 병(Consumption)‘이라고 불렀습니다. 한편에서는 ‘낭만적인 병(romantic disease)’이라고 부르기도 했는데, 창백하고 마른 모습으로 투병하며 훌륭한 작품을 만들어 낸 예술가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산업혁명이 시작되고 도시로 인구가 몰리면서 노동자의 불량한 위생과 영양 상태는 결핵을 낭만에서 현실로 돌아오게 했습니다. 결핵은 공기로 전파되므로 노동자들에서 곧 중산층에게도 퍼지게 되었습니다.
모딜리아니(Amedeo Modigliani,1884-1920)는 이탈리아의 화가로, 11세 경 결핵성 늑막염을 앓았습니다. 결핵에 감염되면 처음에는 증상이 없으나 감염 수개월 후 질환으로 진행될 수 있고, 모딜리아니처럼 늑막염이 생길 수 있습니다. 사춘기 청소년이나 성인에서는 한 번 들어온 결핵균이 폐 윗부분에 공동(cavity)을 형성하는 재활성화 결핵이 잘 생깁니다. 이때에는 기침, 가래가 있다면 감염력도 매우 높아집니다. 모딜리아니도 늑막염에서 회복되었다가 16세경 재발했습니다. 모딜리아니는 1차 세계대전 때 군대에 지원했으나 결핵 때문에 징집되지 못했습니다. 그는 프랑스로 건너가 조각을 배웠지만 작업 중에 발생하는 먼지 등이 폐에 좋지 않아 결국 조각을 그만두었습니다.
결핵이 낭만에서 현실로 돌아온 시기에 살았던 모딜리아니는 결핵으로 인한 사회적 낙인이나 고립이 두려웠습니다. 그래서 결핵 치료를 제대로 받지 않고 일부러 방탕한 생활을 했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그는 알코올 중독이었고 마약에도 손을 댔습니다. 건강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았으니 결핵은 재발했고 1914년 이후로는 급격히 나빠졌습니다. 1920년, 모딜리아니는 결핵성 뇌수막염으로 사망했습니다. 그의 나이 겨우 35세였습니다. 결핵성 뇌수막염은 결핵약으로 치료하지 않으면 반드시 사망하는 치명적인 질병입니다. 모딜리아니는 죽기 한 해 전, 자화상을 남겼습니다. 여느 결핵환자처럼 마르고 핏기 없는 얼굴에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 있습니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예감했을까요? 처진 눈이 외롭고 슬퍼 보입니다.
모딜리아니, 자화상, 1919, 상파울루 현대미술관
결핵은 저에게도 가슴 아픈 질병입니다. 6년 전 결핵 합병증으로 돌아가신 아버지는 청소년기에 결핵에 걸렸습니다. 6.25 전쟁 때 부산으로 온 가족이 피난 갔던 아버지는 공부를 위해 혼자 서울로 올라왔습니다. 아버지는 친척 집에 얹혀 지내며 중학교에 다녔습니다. 당시에는 위생이나 영양 상태가 좋지 못해 결핵에 걸린 것도 모르고 지나갔다고 합니다. 대학 입학 당시 엑스레이에서 결핵이 발견되었지만, 아버지는 제대로 치료받지 않고 약을 중단했습니다. 진단이 잘못된 것도, 치료받을 돈이 부족했던 것도 아닌데 아버지는 왜 그랬을까요? 아버지는 결국 다제내성 결핵, 만성 폐질환, 2차 진균감염 등으로 한쪽 폐를 절제해야 했습니다. 뭉크의 <아픈 아이>를 보면 아버지의 병실 속 건조하고 어두웠던 공기가 코 끝을 타고 전해집니다.
한편, 의사가 되어 만난 결핵환자는 결코 낭만적이지 않았습니다. 인턴 시절, 중환자실에서 심폐소생술이 있었습니다. 20세 여성으로 전신에 퍼진 속립성 결핵 때문에 생을 마감했습니다. 비쩍 마른 체구에 가슴 압박을 하는 것조차 무리였습니다. 그녀의 아버지가 심폐 소생술 도중 면회를 들어왔습니다. 아버지는 ‘좀 더 일찍 데려왔어야 했다’라며 목놓아 울었습니다. 결핵의 모습은 환자마다 다양해도 ‘건강에 신경 쓸 겨를이 없어 적절한 시기에 약을 복용하지 못했다 ‘라는 공통점이 있었습니다.
결핵은 오랜 세월 인류의 목숨을 앗아간 질병이지만 이제는 인간의 노력으로 예방하고 치료할 수 있습니다. 국가가 최소한의 돌봄과 보건의료에 접근할 수 있는 권리를 보장하고 약을 잘 복용할 수 있도록 의료기관과 함께 관리하는 것이 결핵을 예방하는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랑하는 가족을 잃은 슬픔을 여러 번 그렸던 뭉크처럼, 저도 오늘은 글을 쓰면서 슬픔을 녹여 봅니다. 낭만에서 현실로 돌아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