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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밤은 낮보다 밝다

호퍼의 <밤을 지새우는 사람들>

by sweet little kitty


죽음을 연상시키는 잠


두 사람이 기대어 잠을 자고 있습니다. 둘 다 눈을 감고 있지만 한쪽은 생기 있고, 한쪽은 핏기가 없습니다. 어둠 속에 있는 사람은 솔직히 귀신같아 무섭습니다. 영국의 화가 존 윌리엄 워터하우스(John William Waterhouse, 1849-1917)의 <잠과 그의 형제의 죽음>입니다.


워터하우스, <잠과 그의 형제의 죽음>, 70x91cm, 1874


이들은 그리스 신화의 잠의 신 히프노스(Hypnos)와 죽음의 신 타나토스(Thanatos)를 상징합니다. 밤의 여신 닉스(Nyx)의 자식들이지요. 히프노스가 쥐고 있는 양귀비는 통증을 완화시켜 주고 최면에 들게 하는 식물니다. 히프노스는 어둠의 동굴에 살며 양귀비꽃을 가득 심어놓고, 밤이 되면 인간세상에 양귀비 즙을 뿌려 사람들은 잠들게 했습니다.


히프노스의 이름은 잠과 관련된 의학용어의 어원이 되었습니다. 최면술을 뜻하는 단어 히프노시스 (Hypnosis)는 히프노스에서 유래했지요. 로마신화에서는 잠의 신을 솜누스(Somnus)라고 하는데, 불면증을 뜻하는 인썸니아(insomnia)와 몽유병을 뜻하는 somnambulism 은 모두 솜누스에서 따 온 것입니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잠과 죽음이 쌍둥이처럼 깊이 연결되어 있다고 믿었습니다. 잠이 들면 근육이 이완되고 맥박도 느려지지요. 이렇듯 고요한 신체 반응을 보면 죽음을 연상할 수도 있습니다. 무엇보다 고대인들의 밤은 지금보다 훨씬 어두웠을 것입니다. 전기가 없으니 희미한 촛불로 어둠을 버텼을 것이고, 문을 연 가게도 없었을 겁니다. TV나 인터넷이 없으니 집에서 즐길 일도 적었겠지요. 그들의 밤은 활동이 멈춘 어둠의 장막으로, 죽음을 연상시켰을지 모릅니다.


19세기 유럽 도시의 밤은 그리스 로마 시대의 밤보다 밝았지만, 죽음의 그림자가 존재했습니다. 도시가 밀집되면서 결핵을 비롯한 감염병이 창궐했고, 죽음은 일상에서 흔히 만날 수 있는 존재였던 것입니다. 워터하우스도 몇 해전 결핵으로 동생들을 잃었습니다. 가까운 이의 죽음 앞에 화가는 죽음이 그저 영원한 잠이라고 믿고 싶었는지도 모릅니다.


한편, 과학의 발달은 죽음을 관찰 가능한 자연 현상으로 보기 시작했고, 의식과 최면 등에 대한 관심도 높아졌습니다. 신체활동과 의식이 고요히 멈추는 잠은 삶과 죽음의 경계처럼 느껴집니다.


우리의 밤은 낮보다 밝아


에드워드 호퍼 <밤을 지새우는 사람들>, 1942, 84.1 ×152.4 cm, 시카고 미술관


어느 도시의 밤 풍경입니다. 골목의 코너에 식당이 있습니다. 측면이 넓은 통유리로 되어 있어서 가게 안이 훤히 보입니다. 식당 내부 인테리어는 단순하다 못해 공허해 보입니다. 바(Bar) 형태로 되어 있는 손님 자리에는 남녀 한 쌍과 신사 한 명이 거리를 두고 앉아 있습니다. 실내의 빛과 레몬색 벽이 너무 밝아 눈이 부십니다. 그림은 크고 옆으로 넓어 꿈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한 느낌이네요. 미국의 화가 에드워드 호퍼(Edward Hopper, 1882-1967)의 가장 유명한 그림, <밤을 지새우는 사람들 (Nighthawks)>입니다.


호퍼는 뉴욕 주 나이액에서 태어난 뉴욕 토박이 화가입니다. 도시에 화려한 고층빌딩과 다리가 들어서는 동안, 그는 낡고 사라져 가는 건축물이나 다리의 아래 같은 도시의 구석을 그렸습니다. 이 그림 역시 뉴욕의 번화가나 고층 빌딩이 아니라 한적한 골목의 식당을 표현했지요.


식당 내부를 한 번 살펴볼까요? 밤이라면 은은한 조명이 좋을 것 같은데 이 식당은 너무 밝습니다. 손님들 앞에는 잔이 하나씩 놓여 있고, 여자 손님은 작은 샌드위치를 먹고 있습니다. 도대체 이 사람들은 왜 잠들지 못하는지 학적 관점에서 풀어보고 싶어 집니다.


'배꼽시계는 정확하다'는 말이 있지요. 그런데 배꼽시계와는 별도로 우리는 진짜 체내시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뇌의 시상하부에 존재하는 시교차상핵(suprachiasmatic nuclei, SCN)입니다. 이 시계의 주기는 지구의 자전주기와 같아서 24.3시간이지만, 빛과 식사, 운동과 사회활동, 온도 변화 등에 맞추어 24시간의 주기를 완성합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강력한 신호는 빛입니다. 체내시계가 하루에 재설정할 수 있는 최대 시간은 1시간 30분으로, 시차가 12시간 나는 곳으로 여행을 가면 적응하는데 8일이 걸리게 됩니다.


여자 손님이 샌드위치를 먹는 걸 보면 늦은 시간에도 허기진 모양입니다. 우리는 왜 배가 고프면 잠이 안 오는 것일까요?

1990년대 후반, 일본의 사토시 사쿠라이 연구팀은 쥐실험을 통해 신경펩타이드라는 물질을 찾고 있었습니다. 신경 펩타이드는 신경세포간의 메신저 역할을 하는 작은 단백질입니다. 그중 처음 발견한 오렉신(Orexin)은 처음에는 식욕을 촉진하는 줄만 알고 그리스어로 식욕을 의미하는 'Orexis'에서 이름을 붙였지요. 그러나 오렉신은 식과 각성에 양다리를 걸치고 있었습니다.


인간을 포함한 대부분의 동물은 공복이 되면 먹이를 찾아 나서야 합니다. 야생에서 먹이를 찾는 과정은 전투나 다름 없지요. 깨어 있어야 하고 활동 수준도 높아야 합니다. 뇌와 척수 주위를 흐르고 있는 뇌척수액에는 당이 존재하는데, 배가 고프면 혈당이 떨어지듯 뇌척수액의 당 농도도 떨어집니다. 오렉신은 이것을 감지하고 재빨리 각성상태로 전환하는 것입니다. 배가 고프면 잠이 오지 않는 것은 오렉신 덕분입니다.


수면과 각성은 시소에 비유할 수 있어요. 일단 수면이 더 무겁습니다. 그런데 깨어야 할 때가 되면 오렉신이라는 구슬이 또르르 굴러가 각성에 무게를 실어줍니다. 배가 고프거나, 위험에 처했거나, 환경이 불안정하면 일어나는 일입니다.


그러면 오렉신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요?

미국 스탠퍼드 대학의 수면의학자 디멘트와 미뇨 연구 팀은 기면증에 걸린 개를 연구하던 중, 오렉신 수용체의 돌연변이가 개의 기면증으로 이어진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기면증은 깨어 있다가 갑자기 몸이 풀리며 잠에 빠져드는 독특한 병입니다. 오렉신의 기능을 한 마디로 정리한다면 각성 유지인 것입니다.


반면, 피곤해서 수면에 들어가는 신호는 아데노신에서 옵니다. 아데노신은 우리 몸의 에너지원 ATP를 다 쓰고 난 빈 지갑과 같습니다. 용돈을 쓰듯 인산기 3개를 모두 사용하고 나면 아데노신만 남는데, 이것이 수면신호로 작용하는 것입니다. 내일 쓸 돈을 담아야 하니 휴식을 취하며 지갑을 채우는 것이지요.


이제까지의 이론을 압축해 보면, 호퍼의 그림 속 인물들은 너무 밝은 빛 때문에 시교차상핵이 수면을 미루고 있고, 오렉신마저 풀가동되어 졸음 신호인 아데노신을 압도한 상태가 아닐까 추측해 봅니다.


그러나 이 모든 과학적인 설명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잠들지 못하게 하는 것이 또 있습니다. 이 그림이 발표된 1940년대 초, 세계는 2차 대전의 그림자로 한 치 앞을 모르고 불안했습니다. 불안해서 잠도 안 오고 막막해서 울고 싶은 그, 호퍼의 그림은 사람들의 고독과 불안을 거울처럼 비춘 것입니다. 호퍼의 그림 속 인물들은 괜찮은 척 속마음을 감추고 있지만, 사실은 너무 외롭고 불안한 사람들인지도 모릅니다.


국내에서 수면장애로 진료받은 환자는 2018년 85만여 명에서, 코로나 대유행을 지나고 2022년 110만여 명이 되었습니다. 수면제 처방 건수는 2010년에 비해 2022년 4배 증가한 수치입니다. 전쟁이 휩쓸고 간 20세기도 저물었는데, 무엇이 우리의 잠을 방해하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2020년대, 이제는 스마트폰에서 나오는 블루라이트가 세계인의 밤을 점령했습니다. 도시의 밝은 빛을 능가하는 빛입니다. 한편 인간을 능가하는 AI를 개발하고 있지만 우리는 여전히 외롭고 불안하지요. 의학이 아무리 발달해도 어떻게 해야 걱정 없이 푹 잘 만큼 행복해질 수 있는지 아직 모릅니다. 다만 밝은 빛은 우리 손에 들려 있기에 희망이 있습니다.


소설을 원작으로 한 일본 애니메이션 <밤은 짧아, 걸어 아가씨야>는 젊음과 자유는 짧으니 망설이지 말라는 은유입니다. 아가씨는 밤 동안 도시의 화려한 조명 속에서 술을 마시고, 책을 보고, 사람들을 만나며 젊음을 즐깁니다.


하지만 이렇게 밤을 계속 보내다 보면 수면 부족으로 기억력이 저하되고, 감정을 잘 조절하지 못해 우울과 불안을 겪을 수 있습니다. 집중력과 판단력이 떨어져 낮시간에 일을 제대로 해 낼 수 없기도 하고요. 수면은 섭식과 깊이 연관되어 있기에 충분히 자지 못하면 비만과 2형 당뇨가 악화되고 고혈압과 심근경색 위험이 높아집니다. 잠은 공짜로 누릴 수 있는 보약인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도시의 밝은 빛보다 더 밝은 빛을 손에 쥐고 있는 누군가에게 이렇게 얘기하고 싶습니다.


"밤은 너무 밝아. 걸어, 차라리 어둠을 향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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