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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weet little kitty Aug 29. 2024

유치원과 학교의 풍경을 그린 그림들

처음 시작하는 아이들의 사회생활

안녕하세요? 오늘은 아이들이 처음 시작하는 사회 생활인 어린이집, 유치원과 학교에 대한 그림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유치원의 풍경을 그린 그림이 있습니다. 19세기 독일의 화가 휴고 오이미헨(Hugo Oehmichen, 1843-1933)이 그린 '유치원에서'입니다. 예쁘게 차려입은 아이들이 교실에서 놀고 있습니다. 벽에는 동물을 그린 그림들이 있고, 선생님도 분 보입니다. 아이들은 3세-7세 정도 되어 보이고 자유롭게 놀고 있습니다.


휴고 오이미헨, 유치원에서(Im Kindergarten), www.stiftung-volmer.de


17,18세기 영국에는 Dame school이라는 교육기관이 있었는데, 2-5세의 아이들에게 읽기, 쓰기, 산수 등을 가르쳐 주는 지역의 사립시설이었습니다. Dame이라고 불리는 여선생님이 대개 자신의 집에서 아이들에게 공부를 가르치는 것으로 시작되었습니다. Dame school은 16세기부터 19세기 중반까지 있다가 국가가 주도하는 의무교육으로 바뀌면서 사라졌는데, 기관의 특성상 오늘날 유치원 또는 초등학교의 전신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1)


요즘 어린이들의 첫 공동체 생활은 어린이집으로, 아이마다 다르지만 대개 12-24개월, 빠르면 생후 3-6개월부터 가기도 합니다. 그러면 어린이집을 보내기에 가장 적절한 시기는 언제일까요?


물론 아이마다, 상황마다 다르고 무엇에 중점을 두느냐에 따라 다를 것입니다. 그러나 유아의 발달과 의학적 관점을 종합해 보면 36개월 전후가 되어야 불필요한 감염에의 노출을 막고 언어 소통을 통해 사회적 관계를 맺을 수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소아청소년을 진료할 때 '무엇이 아동에게 가장 이익이 되는가'를 우선에 두고 진료하는 '선행의 원칙'이 있듯이, 학령 전기 아동을 기관에 보낼 때에도 '선행의 원칙'을 적용할 수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토마스 웹스터, Dame school에서


18세기 Dame school 또는 사립교육기관의 모습을 담은 것으로 추정되는 그림이 있습니다. Jan josef Horemans the elder(1682-1759)의 <바느질>과 <수업>이라는 그림입니다. 그림 속 선생님은 오른손에 안경을 쥐고  왼손에는 나뭇가지를 모아 묶은 도구를 들고 있습니다. 그림에 대한 해석이 없어 알 수 없지만 아이들의 자유분방한 자세와 분위기를 볼 때 체벌의 도구 같지는 않습니다. 선생님은 나뭇가지 다발을 어디에 사용했는지 궁금해집니다.



좌) Jan Josef Horemans the Elder, <바느질>   우) <수업>, 개인소장


한편 시험 보는 장면을 그린 그림도 있습니다. 휴고 오이미헨의  <학교 시험>이라는 그림입니다. 학령 전기 아동으로 보이는 아이가 선생님과 1:1로 구두시험을 보고 있습니다. 아이는 다소 긴장한 자세있고, 선생님은 손에 무언가를 쥐고 있습니다. 뒷자리의 아이들은 벼락치기 공부라도 하는 듯 열중해서 무언가를 쓰고 있습니다. 아이는 어떤 시험을 보고 있었을까요? 1:1 구두시험이라니 어른인 저도 긴장되는 순간입니다.


좌) 휴고 오이미헨, 학교 시험, 우) 토마스 웹스터, 지각, 1834, 테이트 모던 뮤지엄


지각하는 장면을 그린 그림도 있네요. 이미 수업이 시작한 교실 문 앞에 남자아이와 더 어린 여자아이가 서 있습니다. 아이들의 표정은 주눅 들어 있고 언제 들어가야 할지 눈치를 보고 있습니다. 당시 아이들은 걸어서 유치원이나 학교에 갔을까요?부모님이 데려다 주었을까요? 가방을 메고 오빠의 등 뒤에 숨은 여자아이의 눈빛이 안쓰럽습니다.    



중세시대의 학교란 신학을 가르치는 대학이었고 교육기관이지만 종교시설에 가까웠습니다. 당시의 수업 과목은 신학, 법학, 철학 등이었고 학생들은 대부분 귀족들로 어릴 때부터 가정교사를 통해 어느 정도 기본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대학인 이탈리아 볼로냐 대학의 강의실 풍경을 보면 그 당시 수업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알 수 있습니다. 아래 그림은 라우렌티우스 데 볼톨리나(Laurentius de Voltolina)의 <강의하는 독일의 헨리쿠스>입니다.


그림을 보면 교수님은 성직자가 설교를 하듯이 연단에서 강의를 하고 있는데, 칠판 같은 수업 도구나 자료를 보여주는 장면은 없습니다.


라우렌티우스 데 볼톨리나, 강의하는 독일의 헨리쿠스, 1350년경, 베를린 판화와 소묘 박물관(Kupferstichkabinett Berlin)


르네상스 시대 교육 목표는 교양과 인품을 기르는 이었고, 대상은 귀족에 한정되었습니다. 배우는 과목은 읽기, 쓰기, 역사, 철학, 수학, 음악, 미술 등으로 교양을 갖춘 지도자, 과학자, 예술가나 철학자 등 사회를 이끌어 갈 소수의 엘리트를 위한 교육이었습니다.


그러나 이후 일어난 종교개혁 당시 루터(Martin Luther,1483-1546)는 의무교육의 필요성을 주장했고, 17세기 신대륙으로 진출한 청교도들은 대학부터 세웠습니다. 1763년 프로이센의 계몽군주 프레드리히 2세(Friedrich II, 1712–1786)는 유럽에서 가장 먼저 국가 의무 교육제도를 정비하여 5세부터 14세까지 남녀 아동에게 무상교육을 시행했습니다. 이는 부국강병을 위한 인재를 양성한다는 분명한 목표를 가진 교육이었습니다.


프랑스혁명(1789-1799) 정신은 평등한 교육의 권리를 주장했습니다. 이어 산업혁명(1760-1820)이 일어나면서 기본적인 역량을 갖춘 노동자를 양성하기 위한 교육이 필요했습니다. 산업혁명 시대의 노동자는 숫자와 과학에 대한 기초적 이해, 규율준수하고 명령을 시행할 수 있는 능력이 필요했습니다. 중세시대 소수의 지배계급을 위한 교육에서 보편적 능력을 갖춘 노동자를 키우는 교육으로 목표와 방향이 바뀐 것입니다.


18세기말부터 유럽에서 근대식 학교가 생겨나면서 국가는 능력을 갖춘 노동자를 양성할 뿐 아니라, 국가라는 공동체 이념을 가르쳐 민족주의를 강화하고자 했습니다. 제국주의와 민족주의의 확장은 유럽을 전쟁과 혼란에 빠뜨렸고, 혼돈과 재건의 20세기를 지났습니다.


21세기가 되었지만 이러한 근대식 학교의 모습과 목표는 아직도 남아 있습니다. 오늘날 공교육의 목표는 교양과 인성을 갖춘 전인적 인간을 만드는 동시에 공동체의 평범한 시민으로, 또 국가에 이바지할 수 있는 인재로 양성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학교의 기능을 요약해 보면, 첫째 지식의 전달이고 둘째 공동체 생활을 배우는 것, 셋째로 정해진 시간 동안 아이들을 데리고 돌보아 주는 보육의 기능이 있습니다. 그러나 지식전달의 측면에서 보면 현대는 급속히 진행된 IT 문명으로 인해 대부분의 지식이 학교가 아닌 곳에서도 배울 수 있게 되었고, 우리나라의 경우 사교육 시장에 상당 부분을 의존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개인에게 지식과 정보, 각종 플랫폼이 열려 있어 가정이나 국가 단위로 모든 것이 가능했던 과거에서 개인 단위로 삶이 바뀌어 가고 있습니다. 이렇듯 <개인의 시대>에 학교는 어떻게 변하는 것이 바람직할까요?


2022년 개정된 교육과정에서는 '고교학점제'로 대표되는 개인 맞춤화 교육으로 방향을 전환하였습니다. 이전까지는 학생들이 기존 교과 내에서 적성과 진로를 선택하도록 했는데, 고교학점제가 시행되면 학생이 정한 적성과 진로에 맞추어 공교육을 제공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고교학점제에 대한 우려는 여전히 존재합니다.

우선 개별화 교육을 제대로 하려면 지금보다 훨씬 많은 준비와 비용이 필요합니다. 게다가 학교와 공교육은 여전히 입시를 향한 교육, 아니 교육보다는 평가에 주력하고 있습니다. 거기에는 경쟁을 통해 순위를 평가하는 문화, 정해진 틀에 맞추어 빠르고 정확하게 답을 골라내는 입시가 최종목표라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다음은 인디고 서원에서 쓴 <우리는 정의로운 세상을 만들 것이다>의 일부입니다.

한국 학생은 학교에, 국가에 어떤 존재인가?

배현진(16세)
-학생은 학교 실적을 위해 열심히 공부해야 하고 국가차원에서는 다른 나라와 경쟁시키기 위한 인적 자원입니다.

청소년이 생각하는 우리나라 교육의 참을 수 없는 지점은 무엇인가요?
-친구와 경쟁하고 싶지 않아요.
-공정하지 못한 사교육에서 벗어나고 싶어요.
-성적으로 평가하지 말고 존엄한 인간으로 대해주세요.

김태정(14세)
-저는 제 이름을 걸고, 구불구불한 길, 꺾인 길 등 자신의 선택에 따라 목적지가 달라지는 길이 있는 시대를 만들고 싶습니다. 새로운 시대엔 그 모든 목적지가 존중받을 것입니다.

-인디고 서원, 우리는 정의로운 세상을 만들 것이다.(청소년이 쓴 코로나 19 교육 보고서)


코로나 시기를 겪으며 학교의 의미에 대해 질문하고 답을 구하며 아이들의 의견을 모아 쓴 책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교육현장의 의견>을 묻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제는 공교육이 더 이상 국가에서 베푸는 수혜가 아니며, 학교가 사회의 변화를 따라가지 못하면 학교 밖 청소년들이 계속 늘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학교가 학생에게 의미 있는 곳이 되어야 학교가 지속될 수 있습니다. 교육 현장의 선생님과 당사자인 학생들의 의견을 적극적으로 묻고,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이 무엇인지 고민하는 미래를 꿈꾸어 봅니다.  



참고문헌

1) Dame school - Wikipedia



커버이미지


Playing Children, Enghave Square, Peter Hansen, 1907-1908, 덴마크 코펜하겐 국립미술관


이 그림은 학교는 아니지만 덴마크 앙해브 광장에서 노는 아이들을 그린 그림입니다. 아이들의 얼굴에 생기가 넘치고, 아이들은 함께 얼굴을 마주 보거나 나란히 서서 자유롭게 놀고 있습니다. 저는 학교에서도 이런 모습을 많이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학교의 기능 중 공동체 생활을 배워나가는 과정에 가장 적합한 것은 놀이일 것입니다. 특히 자유로운 놀이를 통해 서로의 표정을 보며 사람과 사람 간의 상호작용을 배우는 것은 모두가 각자의 스마트폰 세상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는 요즘 아이들에게 꼭 필요한 작업입니다. 싱그러운 자연과 탁 트인 광장, 웃으며 뛰어노는 아이들의 표정을 보면 행복은 가까운 곳에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번 화를 끝으로 <그림으로 펼쳐보는 소아청소년과>의 연재를 마무리합니다. 마지막 화를 <유치원과 학교>로 선택한 것은 그동안의 연재를 통해서 소아청소년의 질병은 사회와 깊게 연관되어 있다고 느꼈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이 하루 중 많은 시간 동안 머무는 사회, 유치원과 학교에서 건강하고 의미 있는 시간을 보낼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그동안 연재를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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