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해와 자살 문제는 터놓고 논하기 어려운 주제입니다. 이유가 무엇이든 자기 신체를 해하는 행위는 종교적, 윤리적으로는 생명을 귀하게 여기지 않았다는 점, 특히 유교 문화권에서는 부모에게 받은 신체를 소중히 여기지 않았다는 점에서 죄의식과 두려움, 수치심을 동시에 자극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소아·청소년 자해와 자살 문제는 2000년대 이후 꾸준히 증가추세로 더 이상 음지에 묻어둘 수 없습니다. 통계청이 2022년 12월에 발표한 <아동 청소년 삶의 질 2022> 보고서에 따르면, 국내 아동 청소년의 사망원인 1위는 자살이며 2021년 아동 청소년(0-17세)의 자살률은 10만 명당 2.7명입니다. 12~14세 자살률은 2000년 이후 꾸준히 증가하다가 2016년 1.3명까지 감소했지만 2021년 5.0명으로 크게 증가했습니다.
'자해'하면 떠오르는 화가는 빈센트 반 고흐입니다. 그는 자기 귀를 자르고 그 모습을 자화상으로 남겼습니다. 고흐는 훗날 권총으로 자신을 쏘았고 그 탓에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귀를 자를 당시에는 고갱과의 갈등이 있었고 자살의도가 없는 자해 행동에 가깝습니다.
고흐에게는 정신건강과 관련된 문제가 몇 가지 있었다고 추정합니다. 측두엽 간질(뇌전증), 양극성 장애(조울증), 경계성 인격장애, 압생트 중독 등입니다. 이 중 경계성 인격장애는 충동적이고 변덕스러운 성격, 유기 불안 (버림받을지 모른다는 두려움), 불안정한 자아상, 자기파괴적 행동 등을 특징으로 하며 자해와 관련성이 깊습니다. 고흐는 고갱이 떠날까봐 늘 불안했습니다. 고흐의 행동을 견디기 힘들었던 고갱은 ‘정말 떠날거냐’는 고흐의 질문에 ‘그렇다’고 답했습니다. 그러자 고흐는 신문에서 ‘살인자가 도주했다’라고 쓰인 문장을 찢어서 고갱에게 쥐어주었다고 합니다. 저녁을 함께 먹은 뒤 고갱이 홀로 산책을 나가자, 고흐는 집으로 돌아와서 면도칼로 귓불을 잘랐습니다.
경계성 인격장애는 자아상이 뚜렷하지 않아 나와 타인의 구분도 명확하지 않은데, 자해를 통해서 이러한 희미함을 선명하게 구분짓고 순간적으로 살아있는 느낌을 받을 수 있습니다. DSM-5의 기준에 따르면 인격장애는 만 18세 이후에 진단할 수 있지만, 많은 자해 청소년은 이미 경계성 인격장애의 특성을 보이기도 합니다. 고흐는 고갱으로부터 버림받을지 모른다는 불안에 시달렸고, 대화가 필요한 상황에 무턱대고 자해를 했다는 점에서 경계성 인격장애와 유사합니다.
자해의 정의는 다양한데, 미국정신의학협회(APA, 2013)에서는 자살의도가 없으며 신체에 직접적인 손상을 주는 행위로 정했고, 식사거부나 약물과다 복용 같은 간접적 행위, 일회성 자해 등은 포함하지 않았습니다. 또, Simeon과 Favazza는 자해행동을 상동형, 주요형, 강박형, 충동형 4가지로 분류했는데, 현재 이슈가 되는 청소년의 비자살적 자해는 대부분 충동형에 해당합니다.
자해의 원인은 명확하지 않으나, 스트레스에 대한 부적절한 반응과 연관된다고 봅니다. 자해하는 청소년은 자신의 몸에 신체적 상처를 가함으로써 일시적으로 심리적 고통을 중단시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 낮은 자존감으로 자기를 처벌하고 싶을 때 자해를 선택하기도 합니다. 그 외 타인의 관심을 끌거나 상대를 조종하기, 무감각한 해리상태에서 벗어나 살아있다는 느낌을 얻기 위해 자해를 선택하기도 합니다. 2)
위그 머렐, 주홍글씨, 1853, 볼티모어 월터 박물관
위의 그림은 프랑스의 화가 위그 메를(Hugues Merle,1822-1881)의 주홍글씨입니다. 한 여인이 아이를 안고 있는데, 가슴에 A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습니다. 당시 청교도 사회에서는 간통을 한 사람의 가슴에 A(Adultery, 간통)를 새겨 낙인찍는 관습이 있었습니다. 여인의 뒤로는 두 남자가 걸어가고 있습니다. 이 그림은 나다니엘 호손의 소설 주홍글씨를 모티브로 그린 그림입니다. 주인공 헤스터가 아이를 안고 있는 구도는 성경의 <마돈나와 아기>를 연상시킵니다.
호손은 이 그림을 자신의 소설을 예술적으로 표현한 삽화로 생각했다고 합니다. 여인의 뒤로 걸어가는 두 남자는 아이의 아버지인 딤스데일 목사와 헤스터의 나이 많은 남편 칠링워드입니다. 검은 옷을 입고 있는 딤스데일은 남편을 두고 먼저 미국으로 건너온 헤스터와 사랑하여 아이까지 낳았지만, 헤스터는 그의 사회적 지위를 고려해 아이의 아버지가 누구인지 밝히지 않습니다. 이 과정에서 딤스데일은 견딜 수 없는 죄책감에 스스로를 채찍질하기도 하고, 자신의 가슴에도 A라는 글자를 새깁니다. 청교도 사회의 비난과 괴롭힘에도 불구하고 헤스터는 꿋꿋하게 버텨나가지만, 딤스데일 목사는 죄의식에 고통스러워 하며 자해를 통해 죄의식을 덜어갑니다. 딤스데일의 자해는 '스스로를 처벌하려는 마음'에 가깝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자해 청소년은 자해를 효과적인 대처수단으로 잘못 인식하고 있기 때문에 섣불리 자해를 포기하라고 요구하면 치료를 받아들이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치료법을 결정할 때에는 자해의 유형이나 동기를 먼저 고려해야 합니다. 2)
자살을 다룬 그림은 역사적으로 많습니다. 그중 첫 번째로 루크레티아(Lucretia)의 죽음을 다룬 그림이 있습니다. 루크레티아는 기원전 500년 경 로마의 귀족부인으로, 섹스투스 타르퀴니우스(Sextus Tarquinius) 왕자에게 무력에 의해 강간당한 뒤 가족들에게 자신의 결백을 증명하고 자살했다고 전해집니다. 그녀의 죽음은 동시대의 역사적 기록이 없으나 분노한 루크레티아의 남편과 가족들이 반란을 일으키고,로마를 왕정에서 공화정으로 바꾸는 계기가 된 중요한 사건으로 회자되었습니다. 3)
역사적 기록이 없어 당시로마의 반란을 미화하기 위한 명분이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후대의 화가들은루크레티아가 칼을 들고 스스로를 찌르는 장면을 그렸습니다. 아래 그림은 그 중렘브란트(Rembrandt Harmenszoon van Rijn,1606-1669)의 작품으로, 루크레티아의 표정이 슬픔과 체념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일부 화가들은 자극적이고 피학적인 성폭행 장면을 그리며 그녀를 알몸으로 표현했지만, 렘브란트는 위엄이 느껴지는 귀부인의 모습으로 루크레티아를 그렸습니다. 그녀의 표정에서 폭력과 야만 앞에 무너질 수밖에 없었던 좌절감, 슬픔, 자아의 붕괴가 느껴지며, 단지 여성이 아닌 한 인간으로서 겪어야 했던 고통이 고스란히 드러납니다. 죽음에 사용된 칼이라는 도구는 루크레티아의 강인하고 단호한 면을 보여주는 상징이기도 합니다.
렘브란트, 루크레티아, 1664, 내셔널 아트 갤러리, 워싱턴 D.C.
클레오파트라의 자살을 다룬 그림도 있습니다. 클레오파트라는 독사를 이용하여 죽었다고 알려져 있는데, 주로 가슴에 독사의 독을 퍼지게 하여 죽었다고 알려져 있지만 가슴이었는지 팔과 같이 다른 신체부위였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습니다.
당당하고 강인한 여성의 모습을 많이 그렸던 바로크 화가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Artemisia Gentileschi,1593–1653)의 <클레오파트라>입니다. 피부가 창백한 클레오파트라가 벗은 몸으로 고개를 뒤로 젖힌 채 누워 있습니다. 클레오파트라의 앞에는 작은 뱀이 있는데 아마도 죽음에 사용되었던 뱀으로 생각됩니다. 클레오파트라가 실제로 어떻게 죽었는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지만, 가슴을 드러낸 장면이나 앞에 놓인 꽃바구니 등을 볼 때 후대의 사람들은 그녀의 자살을 미화하거나 에로틱하게 만들고 싶어 했던 것 같습니다. 다른 화가의 그림에서도 클레오파트라의 죽음은 뱀과 함께 주로 가슴을 드러낸 나체로 그려졌습니다.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 클레오파트라, 1633-5, 개인컬렉션, 로마
프랑스의 화가 제임스 티소(James Tissot, 1836-1902)는 <그리스도의 생애>라는 연작에서, 예수의 제자였지만 예수를 배신하고 팔아넘긴 유다의 자살장면을 그렸습니다. 유다는 자책감과 수치심을 이기지 못하고 스스로를 벌했지만, 사실 기독교에서 자살은 도리어 큰 죄로 여겨지기에 유다는 또 한 번 죄를 지은 셈이 되었습니다. 흙빛으로 변해 매달려 있는 유다의 모습이 비참하고 초라하게 느껴집니다.
제임스 티소, 유다의 자살, 1890, 브루클린 미술관
에두아르 마네(Édouard Manet,1832-1883)의 그림 중에도 <자살>이라는 작품이 있습니다. 그림 속 인물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는데 마네의 작업실에서 마네의 조수가 자살한 사건을 두고 그렸다는 견해도 있고, 에밀 졸라가 잡지에 기고한 무명화가의 죽음과 살롱전에 대한 비판에 대한 기사에 영감을 받아 그렸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4)
후자의 경우 1866년 홀트차펠(Jules Holtzapffel,1826-1866)이라는 프랑스의 무명화가가 자살했는데, 그가 남긴 유서에는 "살롱 미술전의 심사위원들이 내 작품을 다시 낙선시켰다. 나에게는 그림 그리는 재주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죽어야 한다."는 내용이 있었습니다.
살롱전이란 프랑스 정부의 공인 미술 전시회였는데, 1667년 처음 전시회가 열린 장소가 루브르의 Salon Carre였기에 살롱전이라고 이름 붙였습니다. 살롱전은 세계적으로 권위 있는 미술 전시회였고 신인 화가의 등용문이며, 미술작품의 기준을 상징하게 되었습니다. 살롱전은 인기가 많아 일반관객들도 관람했지만, 1863년 무렵에는 미술계에 새로운 사조가 나타나면서 낙선자가 많아져 쿠르베, 마네와 같은 화가들의 작품도 낙선되었습니다. 심사기준에 대한 여론의 불만이 거세지자 낙선전을 따로 개최하기도 했지만, 인상파 화가들은 심사기준이 유연하지 못한 살롱전에 대항하는 의미로 1874년 자신들만의 전시회를 개최하게 됩니다.
마네는 홀트차펠과 친분이 있거나 그의 죽음에 대해 잘 알고 있었던 것이 아니지만, 마네 역시 살롱 전에서 여러 차례 낙선하거나 비난을 받았기 때문에살롱전의 부조리에 공감하고 분노하여 이 작품을 그리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에두아르 마네, <자살>, 1877-81년, 뷔를레 컬렉션
위에 소개한 그림 중 저는 마지막 그림에 가장 끌립니다. 홀트차펠은 청소년은 아니었지만 화가로서는 사회 초년생이나 다름없었고, 그의 죽음은 기성세대의 기준에 들어맞지 않는 오늘날 젊은 층의 좌절과 우울, 불안, 자살 동기를 가장 비슷한 형태로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인의 자살이 청소년 자살에 비해 결코 가볍게 넘길 현상은 아니지만, 청소년은 성인보다 충동적으로 자살할 가능성이 있으며 청소년을 둘러싼 환경을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은 어른들이기에 조금 더 안쓰럽고 관심 있게 보이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지지적이지 못하고 갈등이 반복되며 감정적으로 고립되어 있는 가정은 자살의 주요 위험요인입니다. 또래 관계를 비롯한 학교 환경도 자살에 영향을 미칩니다. 자살하는 청소년의 90%에서 우울장애, 불안장애, 조현병,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중 한 가지 이상이 동반되며 음주나 흡연 같은 물질남용도 자살의 위험요인으로 특히 남아에서 더 큰 영향을 미칩니다. 한편, 청소년이 성인과 다른 점은 우울장애나 조현병이 없어도 충동적으로 자살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평소 절망감이 크고 충동성이 높은 청소년은 작은 위기나 갈등 상황에도 자살의 위험이 커진다고 할 수 있습니다.
자해나 자살 자체에 효과적인 약물치료는 없으나 불안, 우울, 물질 남용과 같은 동반질환, 충동성 억제 등을 위한 약물을 사용하는 치료를 시도해 볼 수 있습니다. 자살 고위험군의 경우 입원치료를 고려하는데, 최근 자살시도력이 있거나 구체적 자살계획을 세운 경우 등이 해당됩니다.
무엇보다 예방이 중요한데, 자해의 경우 학생 간에 자해행동에 관해 섣부른 토론을 자제하고 구체적 정보를 전달하지 않도록 합니다. 부모가 자녀의 자해 사실을 알게 된다면 힘들더라도 냉정하고 차분해야 합니다. 또 자해 행동자체에 초점을 맞추기보다는 자해를 통해 표출하려는 감정을 이해하고 수용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가정에서 자해가 일어나지 않도록 자해 도구를 치우고 자녀가 혼자 자해하는 상황에 놓이지 않도록 가능성을 줄여줍니다. 1)
자살 위험도가 높은 청소년에 대해서는 게이트키퍼(gatekeeper)를 활용하여 접근합니다. 게이트키퍼란 자살 위험성이 높은 학생을 발견하고 도움을 주는 교사, 상담교사, 또래 등을 말합니다. 이미 발생한 자살사건에 대해서는 영웅적, 낭만적 사건으로 미화하지 않고, 애도감정을 표현하도록 하며 추가적 자살 예방 교육이나 자살 고위험군에 대한 치료를 실시합니다.
자해와 자살을 다루는 데 있어서 핵심이 되는 것은 자해 행동이나 자살 자체를 막기보다, 행동 너머의 다양한 동기와 쌓인 문제를 다루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해'를 하는 청소년도, '자살'을 하는 청소년도 마음속 깊은 곳에 고통이 있다는 면에서 비슷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자 다른 동기와 이유가 있습니다. 한편으로는 이것이 청소년기에 갑자기 생긴 문제행동이 아니라 아동기부터 경험한 스트레스 상황을 적절히 대처하지 못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지난번 연재에서 다루었던 불안과 더불어, 앞으로 달려 나가기보다는 느리게 현재에 머물며 부모-자녀관계와 우리 사회를 돌아보고 교육과 양육을 재정비하는 시간을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한 순간에 카리스마 있는 지도자와 마법 같은 제도가 나타나기를 기대하기보다는, 개인과 개별가정의 고민과 의식 변화가 모였을 때 더 큰 힘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오늘도 무거운 주제를 그림과 함께 읽어주셔서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