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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 조절이 안 되는 남녀의 사랑

-실버라이닝 플레이북

by sweet little kitty

실버라이닝 플레이북(Silver Linings Playbook)


개봉 2013.02.14.

장르 코미디

감독 데이비드 O. 러셀

출연 제니퍼 로렌스(티파니), 브래들리 쿠퍼(패트릭), 로버트 드니로(팻 아버지)

원작 소설

러닝타임 122분

수상내역 제85회 미국 아카데미 최우수 여우주연상, 그 외 최우수 작품상, 남우주연상, 남우조연상, 여우조연상 감독상 각본상 등 후보


감정 조절이 안 되는 그들의 만남


감정 조절이 좀처럼 되지 않는 두 남녀가 있다.

패트릭(이하 팻)은 아내의 외도 장면을 목격하고 상간남을 죽기 직전까지 폭행한 죄로 병원에 수감된다. 아내의 외도 장면을 봤으니 그럴 수도 있을 것 같지만, 법원이 판단한 팻의 분노는 정상 범위를 벗어났다. 팻은 양극성 장애 I형으로 진단받고 8개월간 감옥 대신 입원치료를 받았다. 팻의 어머니가 노력한 끝에 법원의 허락을 받아 퇴원했지만, 팻은 여전히 조증 삽화를 보인다. 밤새 책을 읽어도 피곤하지 않고, 새벽에 갑자기 부모님을 깨워 쉴 새 없이 말을 쏟아내며, 사소한 자극에도 분노가 폭발한다. 무엇보다 그의 머릿속에는 아내와 예전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확신이 가득 차 있다. 다른 사람들 눈에는 비현실적인 확신이다. 반면 절망과 우울로 기분이 저하되는 시기도 간혹 있다.



티파니는 명확한 진단명이 나오지 않지만 감정 기복이 매우 심하고 종잡을 수 없다. 그녀는 남편의 갑작스러운 죽음 이후 슬픔, 공허감, 자기 비난에 시달린다. 경찰이었던 남편은 티파니의 선물을 사러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사고를 당했기에 누구라도 비통하고 죄책감을 느낄 만한 상황이다.


그러나 티파니의 애도는 자기 파괴적이다. 이전 회사에서는 동료들과 무분별한 성관계에 몰두해 회사에서 해고됐다. 더불어 대인관계가 불안정하고 충동적인 모습이 있어 경계성 인격장애를 의심해 볼 수 있다. 타인과 자신의 경계가 불분명한 경계성 인격장애는 감정 기복이 심하고 충동적이며, 무엇보다 타인의 시선으로 본 자기 모습에 과도하게 민감하다. 자아 정체성이 뚜렷하지 않아 늘 마음이 공허하고 우울장애를 동반하는 경우가 많다.



팻과 티파니는 팻의 친구이자 티파니의 형부인 로니의 소개로 만나게 된다. 티파니는 처음부터 호감을 느끼고 직진하지만, 팻은 전 부인 니키에 대한 미련으로 쉽게 다가가지 않는다. 애가 탄 티파니는 니키에게 편지를 전해주겠다며 함께 댄스 대회에 파트너로 출전하자고 거래를 제안한다.


티파니의 경계성 인격장애를 특징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 있다.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던 중 티파니가 ‘우리 같은 사람들’이라고 하자, 팻은 자신은 당신과 다르다며 정색한다. 기분이 나쁠 만한 상황이긴 하지만, 티파니는 ‘내가 당신보다 훨씬 더 미친 여자니까’라며 테이블 위의 그릇과 컵을 모두 깨뜨리고 식당을 떠나버린다. 언어로 불쾌함을 표현하기 전에 온몸으로 파괴적 분노를 터뜨린 것이다. 타인의 시선에 과도하게 민감하고, 감정을 통제하지 못한 채 폭발하는 모습은 경계성 인격장애의 전형적인 특징이다.


댄스 대회 당일, 팻의 전 부인 니키가 관객석에 있는 것을 본 티파니는 좌절해 다음 순서 출전 직전임에도 낯선 남자와 술을 마신다. 충동적이고 자기 파괴적인 행동이다. 팻에게 처음엔 당신을 최고의 선물이라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최악의 선물이라고 말한다. 한 사람에 대한 평가가 온탕과 냉탕을 오가며 이상화와 평가절하를 반복하는 모습 역시 경계성 인격장애의 특징이다.


경계성 인격장애가 속한 B군 인격장애(연극성, 자기애성, 반사회성 인격장애)는 모두 감정의 기복이 심하다는 공통점을 가진다. 그렇다면 감정이란 무엇이며, 우리 뇌에서는 어떤 작용을 일으키는 걸까?


감정은 정서와 느낌으로 구분된다


감정은 우리가 외부 자극을 받아들일 때 태그를 붙이는 작업과 비슷하다. 인간은 외부 자극을 감각으로 받아들이지만, 감각은 곧 사라지기 때문에 기억으로 남기기 위해 감정이 필요했다. 좋은 자극에는 좋은 감정이라는 꼬리표를, 불쾌한 자극에는 불쾌한 감정을 태그 하는 식이다. 감정은 외부 자극에 대한 반응과 행동을 결정하는 중요한 근거가 된다.


뇌과학자 안토니오 다마지오(Antonio Damasio, 1944~)는 감정을 정서(emotion)와 느낌(feeling)으로 구분한다. 정서는 심박수 변화, 호르몬 분비, 근육 긴장 등 즉각적이고 무의식적인 신체 반응인 반면, 느낌은 정서가 일어나는 과정을 의식적으로 알아차리는 대뇌의 작용이다. 우리 몸은 생존을 최적화하기 위해 항상성을 유지해야 하는데, 느낌은 몸의 상태를 감시하고 조절해 항상성을 유지하도록 돕는다.


감정을 담당하는 뇌의 주요 영역은 변연계(limbic system)다. 변연계는 해마, 편도체, 대상회, 시상하부 등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본능적 행동, 감정 조절, 동기부여, 학습, 기억을 담당한다. ‘주변부, 경계’라는 뜻의 라틴어 limbus에서 유래했으며, 변연계는 뇌줄기와 대뇌피질 사이의 경계 영역에 위치한다.


변연계의 구조, 공포와 감정을 담당하는 영역은 편도체


동물도 공포, 분노와 같은 감정을 느낄 수 있다. 그러나 동물의 감정이 본능적 욕구에 속해 있는데 반해, 인간은 전전두엽이 본능적 감정을 억제하고 순화된 정서로 바꾸어 준다. 술에 취하면 해서는 안 될 말이나 행동을 서슴없이 하는 것은 이러한 억제 기능이 풀렸기 때문이다. 경계성 인격장애를 비롯한 B군 인격장애는 공포와 불안을 다루는 편도체의 기능은 과민하고, 전전두엽의 억제는 잘 이루어지지 않는 질환군이라고 볼 수도 있다.



두 사람의 첫 만남에서부터 정신과 약물의 구체적인 이름이 나온다. 팻은 리튬을 먹으면 머리가 멍해지고 속이 더부룩해져 이제 먹지 않는다고 말한다. 팻이 복용했던 리튬은 양극성 장애의 조증 삽화에 잘 듣는 약물이다.


리튬이라면 주기율표에서 외우던 원소이자 금속인데, 왜 약물로 등장할까?
리튬은 원래 요산을 분해해 통풍 치료제로 쓰였는데, 1949년 호주의 정신과 의사 존 케이드가 리튬을 기니피그에 주사해 본 결과 자극에 대한 민감성이 떨어지는 것을 발견했다. 이후 조증, 조현병, 중증 우울증 환자에게 투여해 보니 조증 환자에게 특히 효과가 있었다. 덴마크의 정신과 의사 모겐스 쇼우가 대조군을 설정한 연구로 리튬의 효능을 입증했다.


하지만 조현병 치료제인 클로로프로마진이 1950년대에 이미 개발된 것과 달리, 리튬은 1970년대가 되어서야 FDA 승인을 받았다. 금속 성분이면서 작용 기전이 명확하지 않았기 때문으로 보인다. 리튬은 혈중 치료 농도를 지속적으로 모니터링해야 한다. 용량이 과하면 손떨림, 근육 경직, 구토가 생기고, 고농도에서는 경련, 혼수, 신부전, 부정맥이 생겨 혈액투석이 필요할 수도 있다. 그럼에도 여전히 리튬은 조증 삽화에 가장 효과적인 약물로 쓰이고 있다.


티파니는 자낙스(성분명 알프라졸람)를 복용한 적이 있다고 말하고, 팻은 클로노핀(성분명 클로나제팜)을 써본 적이 있는지 묻는다. 두 약은 모두 벤조다이아제핀 계열로 중추신경계를 억제해 불안장애나 공황장애, 불면증 치료에 쓰인다. 기존의 발륨(성분명 다이아제팜)은 근이완 작용이 강해 불편했지만, 자낙스는 부작용이 적고 불안을 효과적으로 완화해 1980년대 FDA 승인을 받았다.

트라조돈(성분명 동일)은 세로토닌 수용체에 작용하는 항우울제로 개발됐으나, 진정 효과가 강해 수면제로도 쓰인다. 요즘은 효과가 좋고 부작용이 적은 항우울제가 많아졌지만, 여전히 불면증에 자주 처방된다. 불면의 원인을 정확히 진단하고 알맞은 약을 쓰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Can you forgive it?


이렇게 정신과 약물을 복용하고 현실에서 좌충우돌 사고를 일으키는 팻과 티파니지만, 때로는 인생을 관통하는 대사를 던지는 것이 이 영화의 묘미다. 티파니는 자신의 무분별한 과거 성관계를 비하하는 팻에게 “과거에 나는 그랬지만 그런 나까지도 사랑한다. 당신은 스스로를 용서할 수 있나?(Can you forgive it?)”라고 묻는다. 팻은 정곡을 찌르는 질문에 아무 말도 하지 못한다.


티파니의 말은 심리학적으로 ‘통합(integration)’이라는 개념과 맞닿아 있다. 경계성 인격장애 환자들은 세상을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으로 극단적으로 나누는 경향이 있다. 이를 대상관계이론에서는 ‘분열(splitting)’이라고 부른다. 냉혹한 이분법의 사고방식이다. 반면 통합은 분열의 반대 개념으로, 자신 안에 좋은 면도 나쁜 면도 공존함을 인정하는 것이다.


티파니는 결정적인 순간, 단점 투성이었던 자신의 과거를 숨기지 않고 받아들인다. 이전까지는 충동적이고 대책 없는 인물처럼 보였지만, 이 장면에서만큼은 자기 자신을 인정하고 용서하려는 어른스러운 모습이 드러난다. 그래서 그녀는 경계성 인격장애의 증상을 보이면서도 동시에 희망(Silver lining)을 보여주는 인물이다.



한편, 팻의 아버지는 리모컨이 항상 같은 자리에 있어야 하고, 미식축구 경기를 볼 때는 아들이 옆에 있어야 팀이 승리한다고 믿는 등 강박적인 행동을 보인다. 동시에 그는 스포츠 도박에 심하게 집착해 비물질 중독 질환 중 하나인 도박장애(gambling disorder)가 의심된다.


경기에 거는 돈이 점점 커지고, 한 번 지면 만회하려 더 큰 금액을 베팅하며, 가족이 만류해도 통제하지 못한다. 이러한 패턴은 전형적인 중독 행동으로, 뇌의 보상회로가 도파민에 과도하게 반응해 ‘이길 수도 있다’는 기대감이 강화되는 것이다.


팻의 아버지에게 도박은 단순한 취미가 아니라 삶의 중심이 되어버린 강박적 의례처럼 보인다. 경기 결과와 아들의 존재를 연결 짓는 미신적 사고는 불안을 통제하려는 심리적 시도일 수도 있다. 하지만 결국 그의 도박은 가족의 경제적 기반을 무너뜨릴 수 있는 위험한 집착이 된다.


춤, 신체의 움직임이 가져다준 치유의 효과


팻은 처음에는 니키에게 편지를 전하기 위해 티파니와 춤을 추지만, 대회를 준비하고 참가하는 과정에서 규칙적인 생활 패턴을 되찾고 정서의 회복을 경험한다. 무용동작치료(Dance/Movement Therapy, DMT)는 이러한 원리를 이용한 정서적 치유 방법 중 하나다.


춤이 어떻게 정서를 치유할 수 있을까? 첫째, 춤은 언어로 표현하기 어려운 감정을 신체를 통해 안전하게 방출하게 해 준다. 둘째, 타인과 함께 움직이는 과정에서 신뢰감과 소속감을 느끼며 사회적 연결이 강화된다. 마지막으로 음악과 리듬에 맞춘 움직임은 뇌의 보상회로를 자극해 도파민 분비를 높이고, 자율신경계를 안정시켜 긍정적인 감정 상태를 만든다. 이런 이유로 DMT는 우울, 불안,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 등의 치료에도 활용되고 있다.


팻은 티파니와의 관계를 통해 현실 감각과 감정 조절 능력을 되찾고, 아버지는 아들과의 관계 속에서 강박과 집착을 조금씩 내려놓는다. 티파니 역시 팻을 통해 자존감과 소속감을 회복한다. 영화는 정신질환을 개인의 문제로만 보지 않고, 가족과 주변의 지지적 관계 속에서 회복이 가능하다는 메시지를 전한다.



극 중에서 팻의 정신과 의사는 “희망은 당신 안에 있다(Silver lining thing is yours)”라고 말한다. 실버라이닝(silver lining)이란 구름 뒤에 해가 있을 때 틈 사이로 비치는 햇빛을 의미하며, 희망의 상징이다. 'Every cloud has its silver lining'이라는 격언에서 유래한 표현이다.


신체 질환은 수술이나 약물로 조절할 수 있지만, 정신과 질환은 나 자신의 뇌에서 일어나는 일이기에 약물 복용, 상담 치료뿐 아니라 삶의 태도와 행동 패턴을 통해 회복의 여지가 더 넓다. 정신과 의사가 희망은 당신 안에 있다고 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어떤 이들은 이 영화를 정신 질환은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만 해결된다는 메시지로 해석하지만, 정신과 진료 장면, 구체적 약물 이름, 법적 문제 등을 세밀하게 다룬 것을 보면 꼭 그렇지만은 않다. 정서의 불안정은 타인과 자신을 해치는 행동으로 이어질 수 있기에, 적절한 약물과 전문적 치료가 병행되어야 한다.


영화의 제목 Silver Linings Playbook에서 실버라이닝은 희망, 플레이북은 미식축구에서 세우는 전략모음집을 의미한다. 팻과 티파니가 겪는 정신 질환을 이겨내는 전략은 의학적 치료와 함께 신체적 움직임, 인간관계의 회복을 통한 ‘투 트랙의 치유’ 일 것이다.


요즘 같은 세상에 정서적으로 완벽하게 건강하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우리는 모두 감정을 가진 존재고, 감정 때문에 힘들어 본 적이 있다. 영화를 통해 감정 조절에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에 대한 편견을 줄이고, 희망의 투 트랙으로 삶을 치유하는 바람을 가져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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