킹스 스피치
킹스 스피치(King's Speech)
개봉 2011.03.17.
장르 드라마
감독 톰 후퍼
출연 콜린 퍼스(조지 6세), 제프리 러시 (라이오넬 로그), 헬레나 본햄 카터 (엘리자베스 왕비)
러닝타임 118분
수상 제83회 아카데미 작품상, 남우주연상, 감독상, 각본상
말더듬이 왕
말을 더듬는 왕이 있다. 누구보다 연설을 할 일이 많은 사람인데, 대중 앞에서 말하는 게 힘들다. 영국의 왕 조지 5세(George V, 1865-1936)의 차남 요크 공은 5세 경부터 말을 더듬었다. 요크 공은 우리가 알고 있는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아버지다. 조지 5세는 말을 더듬는 아들을 무섭게 다그쳤고, 형은 말 더듬을 따라 하며 놀렸다. 유명하다는 의사에게 치료를 받아보았지만 헛수고였다. 아버지와 형은 늘 우월한 위치에 있었고, 그들 앞에서는 늘 말문이 막혔다. 요크 공의 아내 엘리자베스 대공비는 수소문 끝에 용하다는 언어치료사를 찾아간다.
언어치료사 라이오넬 로그(Lionel George Logue, 1880-1953)는 건물 지하의 작은 사무실에서 직원 없이 치료실을 운영하고 있다. 연극배우 출신이지만 호주에서 영국으로 넘어온 뒤 무대에 설 기회는 오지 않았다. 웅변과 연설에 뛰어났던 로그는 호주에서 참전 군인들이 돌아온 뒤 생긴 말 더듬을 치료한 경험이 있었다. 학위도 없고 의사도 아니었지만 관찰력이 좋고 사람의 마음을 잘 읽었던 그는 일반적인 언어치료가 참전군인에게 듣지 않음을 깨달았다. 참전 군인의 말 더듬은 전쟁의 참상과 공포가 편도체에 각인된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였던 것이다.
의사소통 장애에는 크게 말(구어) 장애와 언어의 이해 및 표현에 문제가 생긴 언어 장애가 있다. 우리가 흔히 접하는 아동의 언어장애는 언어 이해나 표현의 장애에 속하지만, 말 더듬은 유창성 장애의 한 종류로 말 장애에 해당한다. 말 더듬은 언어발달이 시작되는 2-5세에 시작된다. 처음에는 낱말이나 음절을 반복하며 말이 막히고, 말을 순조롭게 하지 못하며 말더듬에서 빠져나오려는 탈출 행동, 말을 기피하는 회피 행동도 나타난다. 이러한 상황이 반복되며 심리적으로 위축되고, 부정적인 자아상을 가지게 된다. 영화에서 조지 6세에게 로그는 언제부터 말을 더듬었냐고 묻자, 처음에는 대답을 회피하는 그의 모습에서 해묵은 상처가 드러난다. 말 더듬은 언어와 심리가 복합된 문제인 것이다.
언어를 담당하는 영역이 따로 있을까
20세기 프랑스의 외과 의사 폴 브로카(Paul Broca, 1824-1880)는 ‘탄’이라는 단어밖에 말하지 못하는 환자 뤼보른을 진료했다. 뤼보른은 30세에 말하는 능력을 잃었고 우측 편마비를 겪다가 51세에 사망했다. 브로카는 그의 시신을 부검해 뇌의 왼쪽 전두엽 근처 안쪽 조직이 괴사되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얼마 후 브로카는 실어증 환자를 한 명 더 만났고, 그 뇌를 부검하자 같은 위치에 괴사가 있었다. 브로카가 발견한 영역은 말하기, 즉 언어의 발화와 운동 능력을 관장한다고 보았다.
2007년 프랑스 연구팀이 뤼보른의 부검 조직을 3D CT와 MRI로 복원한 결과, 병변은 기저핵과 섬엽, 전두엽 하방까지 퍼져 있었기에 현대적 진단으로는 허혈성 뇌경색에 동반된 실어증으로 볼 수 있다.
독일의 의사 베르니케(Carl Wernicke, 1848-1905)는 언어는 잘 구사하지만 일관성 없는 단어를 늘어놓거나 타인의 말과 글을 이해하지 못하는 환자들을 연구했다. 베르니케 역시 환자의 뇌를 부검하여 좌측 측두엽 뒤쪽 손상을 확인했다. 언어를 이해하는 능력을 관장하는 영역을 베르니케 영역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브로카 영역이 아닌 곳에 손상을 입어도 실어증이 생길 수 있고, 브로카 영역에 손상이 있음에도 언어 능력에 큰 문제가 없는 사람도 있다. 우리 뇌는 어떤 한 영역만 언어에 관여하는 것이 아니라 회로 형태로 복잡하게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그 언어치료사의 비법
영화에서 주인공 요크 공의 정체성은 크게 세 가지로 나뉜다. 어린 시절에는 가족들이 앨버트의 애칭인 버티라고 불렀고, 왕이 되기 전에는 요크 공이었다. 치료를 진행하던 중 왕위를 물려받은 형 데이비드는 왕실에서 받아들일 수 없는 여성과 결혼하기 위해 물러난다. 갑자기 왕위를 물려받은 요크 공은 조지 6세(George VI, 1895-1952)가 된다.
그런데 로그는 요크 공과 통성명을 한 뒤, 감히 ‘버티’라고 부르겠다고 한다. 표면적으로는 원활한 치료를 위한 평등한 호칭 같지만, 엄격하고 폐쇄적인 왕실에서 자라난 버티에게는 아버지와 형에 대한 트라우마가 말 더듬을 일으킨 원인이었다. 말 더듬은 어린 시절 ‘버티’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버티’는 트라우마를 직면하기에 가장 적합한 호칭이었다. 왕실에서 추천한 의사들과는 전혀 다른 접근이었다.
첫 치료 시간에 그 어떤 기술도 가르쳐주지 않고 질문만 하는 로그를 보고 버티는 분노하며 돌아간다. 그러나 자기 목소리를 듣지 못하게 헤드폰을 끼고 책을 읽은 구절을 녹음한 레코드를 집에 가서 들은 버티는 자신의 유창함에 깜짝 놀라며 로그를 다시 찾아온다.
왜 자기 소리를 못 들으면 유창해질 수 있을까?
말을 할 때 우리 뇌는 소리를 듣고 실시간으로 조정한다. 브로카 영역에서 말을 계획하고 운동 명령을 내리면, 운동 피질에서는 성대와 혀, 입술을 움직이게 한다. 이때 대뇌의 청각피질에서는 자기 목소리를 듣고 발음을 교정한다. 이 과정을 청각 피드백 루프라고 하는데, 말 더듬은 청각 피드백이 과도하거나 불안정할 때 생긴다. 자신의 목소리를 들으며 다음 음절을 어떻게 내야 할까를 과도하게 의식하면 운동 명령이 끊기고 과잉 억제 상태가 되는 것이다.
로그는 끊임없이 버티를 자극하며 분노를 유발한다. 버티는 극도로 화를 낼 때에는 말을 별로 더듬지 않고 해낸다. 로그는 버티가 담배를 끊게 하고, 노래와 춤을 이용하며, 상처받은 마음을 꺼내도록 도와준다.
이 영화에는 조지 6세보다 우리에게 더 친숙한 인물이 나온다. 바로 영국의 수상 윈스턴 처칠(Winston Churchill, 1874-1965)이다. 조지 6세가 1936년 즉위했을 때 처칠은 정치적으로 좌절된 상태였다. 신중하고 말더듬이 있는 조지 6세와 달리 처칠은 저돌적이고 언변도 뛰어났다. 1930년대 후반 히틀러가 이끄는 독일이 프랑스에 이어 런던까지 공습하자 내각은 교체되고, 1939년 조지 6세는 2차 세계대전 개전 연설을 하게 된다. 입헌군주제 국가에서 전시에 왕의 연설은 국민을 단결시키는 중요한 행사였다.
해군성 장관으로 복귀한 처칠은 왕이 연설장으로 들어가기 직전, 자신이 단설소대(tongue-tie)가 있다고 말한다. 설소대는 혀의 바닥과 구강을 연결하는 얇은 끈으로, 너무 짧으면 혀를 움직이기 힘들어 수유나 발음에 문제가 된다. 실제로 처칠은 단설소대가 있어 th, s 같은 발음에 약했고 훈련을 통해 극복했다. 단설소대로 인한 언어장애는 말 장애 중 조음장애에 속한다. 요즘은 신생아 시기 간단한 시술을 통해 단설소대를 제거할 수 있고, 처칠처럼 훈련을 통해 발음을 교정하기도 한다.
처칠이 일부러 혀 짧은 소리를 하며 왕에게 유머를 던지는 것은 중요한 첫 연설을 앞둔 조지 6세의 긴장을 풀어주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1940년 체임벌린 총리가 사임하고 나서 처칠은 총리로 취임하여 조지 6세와 협력하며 영국을 이끌어 간다. 로그와 처칠은 조지 6세보다 나이가 많고 성격도 사뭇 반대지만, 누구보다 그를 이해하고 존중하며 협력했던 인물들이었다.
언어가 시작되는 곳에 마음이 있다
인간은 언제부터 언어를 사용했을까?
약 200만 년 전, 호모 에렉투스는 직립 보행과 함께 도구 사용이 본격화되며, 습득한 지식을 후대에 전하기 위해 언어가 필요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현대 인류의 조상인 호모 사피엔스는 설골(hyoid bone), 후두의 위치, 청각 기관이 발달했고, 추상적 그림이나 상징을 사용한 흔적이 있어 적어도 10만 년 전에는 언어가 존재했을 것이라 본다.
신경은 뇌신경과 말초신경으로 나뉘는데, 특히 10번 뇌신경인 미주신경(vagus nerve)은 ‘말하기’의 중추다. 미주신경에서 유래한 상후두신경은 성대 압력을 조절해 음성의 높이를 바꾸고, 하후두신경은 성대를 열고 닫는 역할을 한다. 미주신경핵은 뇌줄기의 연수에 있으며 브로카 영역, 편도체 등과 연결되어 감정과 의도를 음성으로 전달한다. 언어는 단순한 생각의 출력이 아니라, 신체와 감정이 연결된 발성이다. 조지 6세의 말더듬이 생긴 것도, 로그의 치료가 효과를 낸 것도 언어가 단순한 기술이 아니기 때문이다.
언어는 흔히 의사소통의 도구로 여겨지지만, 뇌과학자 제럴드 에델만은 언어를 인간의 고차 의식을 가능하게 한 진화적 도구로 보았다. 그는 감각 경험만을 인식하는 동물의 1차 의식과, 과거를 회상하고 현재를 인식하며 미래를 상상하는 인간의 고차 의식을 구분했다. 언어를 통해 우리는 개념을 범주화하고, 추상적 사고를 하며 상징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언어는 완성된 생각을 단순히 담는 통로가 아니라, 생각과 상호작용하며 의식을 확장시키는 인간의 고유한 무기다.
모차르트는 “언어가 끝나는 곳에 음악이 있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언어가 시작되는 곳에는 무엇이 있을까? 아마도 ‘마음’일 것이다. 인간은 진화 과정에서 타인의 생각을 읽고 추론하는 능력, 즉 ‘정신화’를 통해 언어를 발달시켰다. 생성형 언어모델이 언어를 예측하듯 인간도 내적 상상과 경험을 통해 말을 배우지만, 인간의 언어에는 감정과 마음이 있다. 아이들이 엉뚱한 말을 할 수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언어는 우리 뇌가 만들어낸 최고의 발명품이다.
조지 6세는 재임 기간 동안 수많은 연설을 로그와 함께했고, 두 사람은 신분 차이를 넘어 친구가 되었다. 언어가 시작되는 곳에 마음이 있음을 알았던 변방의 치료사는 결국 왕실 훈장을 받았다. 비록 배우로는 성공하지 못했지만, 언어를 매개로 한 로그와 조지 6세의 이야기는 영화가 되어 제83회 아카데미 시상식을 휩쓸었다. 언어는 마음에서 시작되지만, 언어의 끝에는 예술이 있다. 오늘도 우리는 끊임없이 말하고 글을 쓴다. 우리의 언어는 결국 작품이 된다는 믿음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