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2 살려줘요. 내 발꼬락
실내 클라이밍을 할 때 필요한 물건은 그리 많지 않다. 단지 집에서 입던 운동복, 초크, 초크 백, 초크 볼, 암벽화만 있으면 된다. 야 그럼 너도 클라이밍 할 수 있어!! 본격적 운동이 아니라 한번 체험을 하려고 동네 클라이밍 장을 가신다면 아무것도 필요 없습니다. 다 대여가 가능합니다. (초크와 관련된 물품은 동네 암장마다 다름 / 그리고 초보는 초크가 필요 없..) 아.. 돈만 있음 다 되는 이 자본주의의 맛이여!
초크와 관련된 물품은 다른 물건을 살 때와 마찬가지로 인터넷에서 비교해서 마음에 드는 것을 사면된다. 하지만 암벽화는 절대 인터넷에서 사는 것을 추천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사람마다 다 다른 족형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어떤 회사의 어떤 제품이 자신의 발에 맞는지 사진으로는 알 수 없어 직접 신어봐야 내 발에 맞는 암벽화를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운동을 시작하기로 마음을 먹은 나는 S와 함께 종로로 암벽화를 사러 갔다. (암벽화를 파는 매장은 많지만 종로로 주로 가는데 그 이유는 종로만 유일하게 3개의 매장이 근처에 있기 때문에 다양한 제품 비교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무엇인가를 시작한다는 마음과 오래간만에 가는 서울 방문에 들떠 있었다. 그때 나의 설렘을 무참히 짓밟은 S의 의미심장한 이야기
“언니 클라이밍을 사람들이 많이 포기하는 이유가 뭔지 알아요?”
“몰라”
“하나는 손가락이 아파서고 더 큰 이유는 발이 아파서 에요.”
(손이 아픈 이유는 예상이 된다. 근데 발은 왜 아프지?)
“근데 발이 왜 아파?”
“암벽화는 발에 꼭 맞는 신발을 신거든요.”
그렇다. 암벽화는 보통 운동화 사이즈보다 한 치수에서 한 치수 반 작은 사이즈를 산다. 그 이유는 암벽화의 앞 쪽 코로 홀드를 찍는데 이때 사이즈가 크면 홀드를 잘 찍지 못해 떨어질 위험이 있어서 엄지발가락이 접힐 정도로 딱 맞게 신기 때문이다.(그리고 이렇게 신어야 발가락에 힘이 더 잘 들어간다.) 운동 초보인 내가 이런 걸 알 리가 만무했다. 발에 꼭 맞는 신발을 신어도 그 까짓게 아파봤자 얼마나 아프겠어? 역시 무식한 자가 용감하다. 나는 이런 안일한 생각으로 암벽화 쇼핑을 시작했다.
세상에 이렇게나 많은 암벽화가 있다니. 아니 근데 왜 다들 이렇게 예뻐? 이렇게 예뻐도 되는 거야? 뭘 사야 잘 샀다고 소문이 날까? 나는 알록달록 휘황찬란한 암벽화를 구경하며 설렜다. 하지만 설렘도 행복도 잠시 내가 예쁘다고 고른 암벽화들은 다 중고수용 암벽화였다. 나와는 일절 상관도 없는 아이들. 나를 위한 암벽화는 한쪽 구석 정갈한 모양으로 가지런히 놓여있다. 쳇. 예쁜이들아 너희들은 나중에 언니가 실력이 많이 늘면 데리고 갈게 조금만 기다려줘. (하지만 일 년이 지난 지금까지 아직도 두 번째 암벽화를 사지 못하고 있다. 아직도 실력이 늘지 않는 초보이기 때문이다.)
이전에 고른 암벽화에 비해 예쁘지는 않았지만 걔 중 제일 나아 보이는 암벽화를 고르자 사장님은 나에게 사이즈를 묻고 내 발에 맞는 암벽화를 가져다주셨다. 어? 이거 발에 잘 안 들어가는데?
나 - “사장님 신발 사이즈가 작은 거 같은데요?”
사장님 - (신발 사이즈 확인 후) “아닌데? 맞는데?”
S - “언니 그렇게 신는 게 맞아요.”
신발을 발에 넣는 순간 무엇인가 잘못되었다고 생각되었다. 이거 그냥 아픈 게 아니다. 진짜 너어어어어어무 아프다. 암벽화는 앞 뒤쪽이 고무로 되어있어 잘 늘어나지 않는다. 근데 평소보다 작은 사이즈를 신으니 당연히 아플 수밖에. 거기다 내가 신발을 사러 간 날은 2월의 겨울날. 고무는 추위에 더 수축해 내 발을 조여 왔다. 간신히 발을 욱여넣어 암벽화을 신었지만 일어나서 걷는 것 자체가 고통이었다. 거기다 사장님은 나에게 까치발로 서는 것을 시키기도 했다. (보통 암벽화를 사러 가면 암벽화의 앞코에 내 발이 딱 맞는지를 확인하기 위해 이 자세를 꼭 시켜본다.)
전족들은 작은 발이 미인이라고 생각해 천으로 발을 감싸 더 이상 자라지 않게 했다고 했는데 그게 얼마나 고통스러운 건지 이 암벽화을 신기전까지는 몰랐다. 조금이지만 나는 전족의 고통을 이해했다. 이 전통이 사라지는 게 마땅하다!!!!! 내가 뒤져서 아직까지 이 전통이 남아있으면 발 벗고 나서서 이 전통을 없애고 말 거다!!! (찾아보니 선교사 로티 문 님 덕분에 전족이 없어졌다고 한다. 로티 문 님 당신은 천사이자 구세주이십니다.)
아무튼 사장님과 S는 암벽화을 신은 나의 발을 만지더니 둘이 속닥거리기 시작했다.
S – “좀 큰 거 같지 않아요?”
사장님 - “그죠? 한 치수 작은 거 가지고 올까요?”
나 - “아니요!!! 딱 맞아요. 전 이걸로 할게요. 이거 주세요.!!!!!!”
나는 다급하게 외쳤다. 이거보다 더 작은 걸 신으라니 나보고 죽으라는 거냐? 둘은 여전히 큰 사이즈라고 반 사이즈 작은 사이즈를 사는 것이 어떠냐고 권했지만 나는 그들의 말을 들을 생각이 1도 없었다. 지금도 이렇게 내 발꼬락이 아파 죽겠는데.. 결국 나는 귀를 닫고 그 암벽화을 구매하였다.
그 암벽화를 가지고 암장에 가자 센터장님을 비롯한 암장의 모든 사람들이 사이즈가 너무 큰 걸 샀다고 나에게 뭐라고 한 소리 하였지만 그 암벽화는 거의 3개월 동안이나 나를 괴롭혔다. 진짜 발꼬락이 너무 아파 운동이 끝나면 암벽화를 빨리 벗어던져버렸다. 하지만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라고 했던가? 시간이 지날수록 고통이 없어지지는 않았지만 아픔이 서서히 적응이 되었다. 참을 수 있는 아픔 정도? (고통은 익숙해지지 않는다는 말 다 거짓말입니다.)
그 암벽화를 신고 운동한 지 어느덧 일 년. 암벽화가 늘어나기도 했고 (앞에서 늘어나지 않는다고 했지만 오래 신으면 가죽 부분이 늘어나기도 하고 내 발에 맞는 모형으로 변한다.) 내가 그 암벽화에 너무 적응을 했는지 이제는 운동을 하지 않는 시간에도 암벽화를 신고 잘 돌아다닌다. 거짓말 조금 보태서 발에 딱 맞는 운동화 신고 걸어 다니는 느낌이랄까?
그래서 요즘 나는 암벽화를 새로 사고 싶다는 생각이 머릿속에 가득하다. 실력이 늘지 않으니 신력에 기대고 싶은 느낌적인 느낌?! 그래서 이번에 암벽화를 구매하게 된다면 지금보다 반 사이즈 혹은 한 사이즈 더 작은 사이즈를 사려고 생각 중이다. (사람은 멍청해서 고통을 잊고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하지만 지금은 겨울이라 추우니 봄에 새 암벽화를 사는 걸로. 이번엔 예전에 사지 못했던 알록달록 휘황찬란한 중급 암벽화를 꼭 데리고 와야지. 새 암벽화를 살 생각에 나는 벌써부터 설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