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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음의 자수 Oct 27. 2022

봉인 해체의 날

감추었던 비밀을 세상에 알린 날



 



어떻게 한 번도 보지 못한 아빠의 얼굴이 보고 싶을까?

어떻게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아빠의 목소리가 듣고 싶을까?    


얼굴을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아빠가 종종 그리웠다. 참 신기한 일이다. 그런 날에는 옥상에 올라가 하늘을 바라보곤 했다. 엄마에게 혼날 때, 친구가 아빠 직업 이야기를 할 때. 인형이 갖고 싶을 때... 등등등. 시도 때도 없이 아빠가 그리웠고 또 보고 싶었다.     


꽁꽁 숨겨왔던 아빠에 대한 이야기를 드디어 누군가에게 하고 싶은 날이 찾아왔다.

서러움에 벅차올랐던 그날은 한 번도 밝히지 않았던 '아빠의 죽음'에 대해 아니, '아빠'라는 존재 없음에 대해 일기장에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일기장인데도 불구하고 나만 보는 일기장이 아니었던 지라 밝은 이야기만, 착한 어린이가 되어야겠다는 다짐만 가득했던 일기장이었는데.. 아빠의 이야기가 불청객처럼 불쑥 끼어들었다.    

 

국민학교 6학년인 나와 중학교 2학년인 언니.

졸업을 앞두고 수학여행을 가야 했던 언니와 나.

언닌 95,000원, 나는 25,000원(지금 생각해도 너무 비싼 금액이다.)

혼자서 생계를 유지해야 했던 엄마는 그때 당시 몸이 아파 일을 하지 못했다. 둘 다 수학여행을 보내자니 그 돈의 액수가 천근만근 무거우셨을 테다. 일하지 못하는 마음의 무게까지 더해져서.


그런데 차마 나는

"내가 그럼 안 갈게."라는 말이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엄마는 처음으로 우리에게 확인사살을 날렸다. 아빠는 죽고,  엄마 혼자 우리를 위해서 고생했노라고. 너흰 무엇을 했냐고... 윽박지르셨다. 이미 외할머니를 통해 어느 정도 알고 있었지만, 엄마에게 확인 사살을 받은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서러웠다. 눈물만 흘렀다.  

   


 아무런 대꾸도 할 수 없었던 나는 피할 길 없는 단칸방에서 엄마의 폭발적인 서러움을 들으며 일기에 꾹꾹 써 내려갔다. 서러움을 더 이상 감출 길이 없었는지 그날 처음으로 그동안 묵혀왔던 이야기를 남김없이 털어놓았다. 노트 앞 뒷장을 채워가며 혼자서 되뇌었던 이야기를 처음으로 솔직하게 글로 써 내려갔다.


 어쩌면.... 누군가라도, 이 일기를 보고 있는 당신이라도 나를 도와달라고, 수학여행을 보내달라고 울부짖는 얄팍한 계산이었는지도 모른다.


다음날, 선생님은 일기장을 다 보신 후 나에게 다가오셨다. 그리고 말없이 어깨를 지긋이 토닥이셨다.      

공기놀이에 빠져있던 나는 당신과 나만 아는 비밀의 언어로 큰 위로를 받았다. 일기장 속에 적혀 있던 “어려운 일이 있으면 언제든 이야기하세요.”라는 그 말로 더없는 위로를 받았다.   

   



... 지금 그때를 떠올리면 나의 얄팍한 계산이 통해 죄 없는 선생님이 나의 수학여행비용을 부담했는지 아닌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다행히도 사진 속 나는 짧은 반바지에 검은색 티셔츠를 입고 친구들과 어깨동무를 한 채 웃고 있는 걸 보니, 가긴 갔나 보다. 그리고 꽤나 즐거웠나 보다.   

    




상실의 고통 속에서도 하루하루를 살아낼 수 있었던 건 주변의 누군가의 손길이었다. 상실, 슬픔, 애도는 잠잠하다가도 성낸 파도치듯 나를 덮치기도 했는데 내 곁에 머물러 주었던 이들로 다시 또 살아갈 수 있었다.      

오늘은 그분들께 글로나마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 싶다.

“제 비밀을 처음 알게 됐던 김 00 선생님!

그때 토닥여주시고 힘들면 의논하라고 이야기해주셔서 감사해요.

빨간 볼펜으로 쓰인 그 말들이 제 삶에 선명하게 새겨졌어요.


제가 중학교 때, 유학 간 딸의 부탁으로 저에게 매달 십만 원씩 통장에 쏴주셨던 00 아저씨.

사실 엄마 통장에 들어간 돈이라 어떻게 쓰였는진 저도 잘 몰라요.

그래도 그 돈으로 엄마가 저 운동화도 사주고, 문제집도 사주셨어요.

저희 엄마가 감사의 인사로 드렸던 양주는 입맛에 맞으셨나요?


매일 이만한 각목을 가지고 다니면서 여자 화장실까지 서슴지 않고 들어와 자습시키셨던 고3 담임 한 00 선생님!

우리 반에서 네가 제일 사정이 딱하다며 학교에서 주는 장학금에 추천해주셨죠!

그때 떨리는 마음으로 감사의 인사를 전했는데 여전히 무섭게 해 주셔서 연민에 찰 시간조차 허락하지 않아 주셔서 감사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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