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금만 더 기다려보자, 조금만 더, 그리고 때가 되면.. )
나의 자녀들과 비슷한 또래의 아이를 키우는 친구가 집에 놀러 오곤 했다. 그 친구는 자녀양육을 위해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전업주부로 있었고 나는 직장을 유지하고 있어 자주 볼 수는 없었지만 시간이 되면 함께 시간을 보내려 했다. 동년배 아이가 있어 아이들도 서로 친구가 되고, 나 또한 친구와 서로 힘든 얘기를 나누기도 하는 좋은 말벗이었다.
하지만 함께 시간을 보낼 때마다 친구와 내가 상충하는 부분이 있었는데 바로 아이를 훈육하는 방법에서였다. 나는 전반적으로 아이들에게 관대한 편이라는 소리를 들었다. 웬만한 일이 아니면 화를 내거나 큰 소리를 치지 않는다. 나의 이런 모습을 양육을 도와주는 시부모님께서도 높게 평가하시곤 했다.
하지만 나와 달리 친구는 아이가 잘못을 하면 곧바로 소리를 지르며 방이나 발코니 등 어디론가 끌고 간다. 다른 아이들이 없는 곳에서 훈육을 하려는 이유는 알겠지만, 아이에게는 엄청 공포스러운 시간이 될 것 같았다. 문을 닫고 방에 들어서면서 소리를 지르며 손에 잡히는 것 아무거나 들고 매질을 한다. 예고 없이 불규칙적으로 들려오는 매질 소리, 적어도 내가 보기에는 약속을 지키지 않고 같은 실수를 반복한 아이를 탓하는 것이라기보다는 '감히 엄마 말을 무시해?'라며 본인의 화를 주체하지 못한 공격으로 보였다. 내가 관여할 수가 없어 '아이고, 아이고'를 연발하고 있었지만 같이 놀던 아이들 모두 겁을 먹고 위축되어 버린다. 나는 이런 모습이 보기에 좋지 않아 친구에게 부탁했다. '적어도 우리 집에 왔을 때 만이라도 그러지 말라고...'
내가 아이들에게 처음부터 관대했던 것은 아니다. 다자녀를 낳아 기르면서 나름대로 깨달은 바가 있어서다. 자녀가 둘 일 때만 해도 두 아이를 비교하고 심지어 다른 집 아이까지 빗대어 누가 더 잘난 아이인지 구분하려 했다. '쟤는 저런데 우리 아이는 왜 이러지?’라는 의문으로 시작한 감정이 짜증과 화로 이어지는 나를 발견한 것이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화가 나고, 목소리가 높아지고, 눈을 치켜뜨게 되었다. 아마 과거에 내가 화내면서 뱉은 말이 내 기억 속에는 없지만 아직도 아이들의 가슴속에 남아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그게 잘못된 행동이었다는 것을 셋째 아이를 낳은 후에 알게 되었다. 같은 부모에게서 태어나고 같은 밥을 먹고 같은 환경 속에 자라나도 아이들 각자가 너무나 다른 것을 보면서 무릎을 탁 치게 되는 깨달음이 있었다. 아이들마다 타고난 천성에서 오는 차이가 분명히 있다는 것을. 물론 훈육을 통해 남들과 유사한 모습의 성장과정을 유도할 수도 있겠지만 나의 의지대로 될 확률은 미지수다.
그리고 양육 스타일도 부모가 된 본인이 겪어 온 환경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고 한다. 원칙적이고 엄격한 부모님 밑에서 자랐다면 자신도 그런 성향으로 자녀를 양육할 확률이 높다. 물론 정반대인 경우도 있다. 나처럼 말이다.
내 기억 속에 엄마는 항상 무서운 사람이었다. 웃으시거나 칭찬을 하는 말은 거의 들어본 기억이 없다. 그리고 잘못한 일이 있을 때는 항상 채벌을 하셨다. 엄마에게 혼이 나고 눈물을 흘리면서 잠든 적이 많았던 것 같다.
그런 엄마와는 달리 아빠는 큰 소리 한 번을 치지 않으시는 분이셨다. 두 분 성향이 이렇게 다르다 보니 다투기도 많이 하셨던 것 같다.
어린 시절을 가만히 회상해보면, 엄마에게 혼나지 않으려고 공부하고, 채벌을 피하기 위해 착한 아이인 척했던 것 같다. 스스로 무엇인가를 생각하거나 할 겨를도 없이 항상 엄마 눈치를 보기에 바빴다. 물론 내가 자녀들에게 관대한 성향으로 대하는 것이 나의 어머니를 염두에 두고 반대로 하겠다는 계획을 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자녀들에게 나의 눈치를 살피게 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은 확고했다.
양육에는 정답이 없다. 수많은 학자들의 논문과 책에서 올바른 양육법에 대해 나름대로 원칙을 알려주고 있다. 채벌이 필요한 시기에 대해서도 초등학교 이전에 해야 한다, 아니다 초등학교에 들어가고 나서 해야 한다 등등 상반된 주장들을 한다. 하지만 수학공식처럼 딱 맞아떨어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주체와 대상, 상황이 모두 다르기 때문이다. 그리고 맞다 틀리다를 판단할 기준도 없다. 모두의 희망사항이지만 자녀들이 우수한 성적을 얻어 좋은 대학에 가고, 대기업에 취업만 하면 양육을 잘한 것일까? 꼭 그렇다고 말할 수도 없다.
만약 한 두 번의 채벌로 자녀들이 동일한 잘못을 반복하지 않는다면 그런 훈육 방법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대부분 아이들은 동일한 잘못을 수차례 반복을 하고 그때마다 부모는 동일한 형태로, 때로는 점점 더 혹독한 대가를 치르게 한다.
심지어 어른들도 한 번에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바꾸는 것이 힘든데, 하물며 자녀들이 그렇게 하기는 쉽지 않을 것 같다. 적어도 내가 보기엔 아이들은 부모가 말하는 잘못된 행동을 의식한 상태에서 라기보다는 무의식적으로 나온 행동일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 어쩌면 진심으로 무엇을 잘못했는지, 왜 부모가 화를 내는지 이해하지 못하고 있을 수도 있지 않는가. 자녀를 이해시키기보다는 감정을 앞세우는 것은 아닌지 반드시 생각해보아야 한다.
자녀들은 커가는 과정에서 상황상황마다 나름대로의 옳고 그름의 기준을 정립하면서 자라나야 가치관이 올바르게 형성될 수 있다. 자녀를 이해시키는 과정을 생략하고 막무가내로 압박을 주면 자녀들이 성인이 되어서도 주체적으로 올바른 판단을 하는 것이 힘들어질 수도 있다.
자녀의 잘못된 행동을 보게 되면 한 번 더 생각하고 감정의 변화를 다스려보자. ‘왜 저런 행동을 할까? 예전에도 그런 적이 있나? 어떻게 설명하고 이해시켜야 할까?’를 고민하자. 시기를 놓치지 않고 말은 꼭 해주어야 한다. 그리고 동일한 상황을 반복하면 동일한 반응을 보이면서 머리와 가슴속에 새겨지도록 만들어 주자.
특히 직장을 다니며 자녀와 많은 시간을 함께 하지 못하는 우리들은 더더욱 훈육에 신중해야 한다. 대다수 직장맘들은 마음이 조급하다. 같이 있는 시간이 적기 때문에 있는 동안에 엄마 노릇을 충실하게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있다. 그리고 그 엄마 노릇의 많은 부분이 자식의 잘못을 혼내고 가르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나는 생각이 다르다. 같이 있는 시간이 적을수록 엄마는 관대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관대한 엄마를 이용해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하려는 아이가 있을 수도 있겠지만 대다수 아이들은 시기의 차이는 있겠지만 성장하면서 엄마를 화나게 하거나 실망시키지 않으려고 조심하게 된다.
혼나면서 눈치만 보는 아이는 결국 우리의 눈을 피해 동일한 행동을 할 확률이 높다. 결국 우리가 원하는 것은 눈치를 보면서 앞에서는 착한 척하는 아이가 아니라, 나를 믿어주는 엄마를 생각하면서 어떤 상황에서도 어긋나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자녀를 키워내는 것이 아닌가?
하루 중 많은 시간을 혼자 지내거나, 엄마가 아닌 사람과 함께 지내는 아이들에게 엄마라는 존재는 어떤 사람이어야 할까? 적어도 나는 무섭고 엄한 사람이 되고 싶지는 않다. 항상 보고 싶고, 언제나 내편이 되어주는 사람으로 생각되고 싶다.
나아가 자신을 위해 일하는 엄마를 원망하지 않고 감사하며 자랑스러워할 줄 아는 아이들의 엄마이고 싶다. 직장맘인 우리 모두는 같은 마음일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는 게 좋을지 다시 한번 생각하고 기다려줄 줄 아는 부모가 되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