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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쓰양푼이 Sep 22. 2021

공포의 체르니 50

6세 여아, 피아노 못 친다고 집에서 쫓겨나다!

 "피아노 그 따위로 치려면 나가!"


내가 치던 피아노 책은

내팽겨 쳐지고

나는 집 밖으로 쫓겨났다.


혼자 복도에

서 있을 때는

눈물이 나지 않았던 것 같은데

집에 들어가서

 다시 피아노를

쳐야 하는 상황이 오자

 울지 않을 수가 없었다.


 "오늘 유치원에서
뺑뺑이를
너무 많이 타서
머리가 아파요.
더 이상 못 치겠어요."


아직도 피아노가

내 마음대로 안쳐지던

그날의 기억이

생생하다.


왜냐하면

피아노를 못 친다고

쫓겨 난 사건은

6살에게 너무나도

가혹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안친 것도 아니었다.


해야 하는 일을

불량한 태도로

임했던 것도 아니었다.


하고 있는데

안 되는 걸

어쩌란 말인가?


 처음으로

피아노를 배우던 날,

뭐가 그렇게 신이 났는지


내 몸집으로

옮기기에는

큰 피아노 의자도

스스로

옮겨가면서


피아노 선생님을

반갑게

맞이 했던 기억이 난다.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면

그날로 가서

피아노를

배우지 않겠다고 

말하겠다.


그날의 

잘못된 선택으로 

나는 5살부터 10살까지

고달픈 인생을 살았다.


내가 구박받아 가며

피아노 치는 

모습을 봐온 

 동생은 


엄마의 피아노 권유에 

자신은 

절대 피아노를 

배우지 않겠다고 

말했다.


동생은 피아노를

배우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피아노에 대해

나와 비슷한 감정을

공유한다.


공포 그 자체였다.


엄마가 원하는 

수준으로  때까지 

연습은 끝나지 않았다.


아직도 

그때를 생각하면

 피가 거꾸로 솟아오른다.


그래서 

피아노 이야기만 나오면 

나는 매번

엄마한테 화를 낸다.


 그럴 때마다

엄마가 항상 하는

말이 있다.


 "피아노 연습하던 습관 때문에
네가 책상에 오래 앉아 있을 수 있는 거야."


확실히  말은 일리가 있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한 번 책상에 앉으면

잘 일어나지 않았다.


해야 할 공부가 있으면

내가 계획했던

분량이 끝날 때까지

계속 봤다.


배가 고파서 

밥을 먹는 순간 

다시 책상으로 오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니


배고픈 것도 참아가면서

공부했던 적이 많았다.


피아노 덕분에

좋은 습관이

만들어졌다는 것은

인정한다.


하지만

5년 동안

체르니 50번까지 쳤는데

지금은

 '도레미파솔라시도'가

악보에서

어디에 있는지도 잘 모른다.


의식적으로

그것을 

읽지 않으려고 했던 

나의 노력으로

악보 까막눈이

되어 버린 것이다.


초등학교 4학년이 되자

나의 피아노에 대한

반감이 커졌다.


더 이상

엄마 말만 잘 듣는

어린이가 아니게 되었다.


나의 피아노에 대한

분노로

우리 집은

피아노까지

팔아 버렸다.


 나는 무엇을 위해

그렇게 열심히도

피아노를 쳤던 것일까?


참을성과 지구력이라는 것을

얻었다는 점에서는

큰 성과가 있었지만,


단순히

피아노만 놓고 봤을 땐

배울 필요가

없었다고 생각한다.


스파르타로 배워서

실력이 수준급이기나 하나,

무언가를 배우면서 느끼는

만족감이나 즐거움이 있었길 하나,

그 무엇 하나

충족되는 것이 없었다.


오로지 엄마의

대리만족만 있었을 뿐.


 똑똑한 엄마는

공부를 했어야 하는 사람인데

여자는 공부할 필요 없다고

생각하는 보수적인

가정에서 자라왔다.


그것이 엄마에게는

평생의 한으로

자리 잡혀 있었다.


엄마의 고급진 취향과

지식을 향한 높은 열망은

외할머니에 의해서

매번 좌절됐다.


내 동생이

어렸을 적

엄마의 피아노 교육방식이

이해되지 않았다고

말하듯이


외삼촌도

공부하려고 했던 엄마한테

외할머니께서 했던 행동들이

과했다고

이야기해줬다.


 결국 엄마가 치고 싶었지만

칠 수 없었던 피아노를

내가 치게 되었던 것이다.


나는 안다.


엄마가 나에게 과하게

피아노를 가르쳤던 것이

엄마의 넘치는 

사랑이라는 것을.


그것이

우리 시대 엄마들의

사랑 방식이란 것도.


엄마의 엄마가

엄마에게

부족하게 해 주었던 것만큼은


절대 내 자식에게

똑같이 물려주지 않겠다는


 ‘엄마의 사랑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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