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그림자만 남겨둔 날>

"빛이 보이지 않을 떈, 잠시 눈을 감고 기다리면 돼" 중에서

by 구정훈

그녀는 웃고 있었지만
나는 웃지 못했다.


잔잔한 물결 같은 그녀의 표정 뒤로

어딘가 닳아버린 눈빛이 내 주변을 서성였다.


나는 그 눈빛을 애써 외면했다.
무언가 지나갔다는 걸
이미 알고 있었기에.


마주 앉은 테이블 위

힘없이 놓인 두 손에는
닿을 듯 말 듯한 아쉬움이 주저앉았다.


오후가 느릿하게 기울고 있었다.
노을빛이 조금씩 물러나며
우리 사이에 그림자를 길게 늘어트렸다.


말없이

커피잔만 돌리는 그녀의 두 손.
함께 있었지만

마치 혼자 있는 것 같았다.


마음속에 알 수 없는 불안감이 일었다.
모른 척했던 그녀의 얼굴에는
낯선 그림자가 번지고 있었다.


나는 웃고 있었다.
웃음 뒤로 스치는 내 낯선 기척을
그녀에게 들키고 싶지 않아서.


그리고
우리는 아무 일도 없던 듯

말없이

각자의 그림자를 안고 일어섰다.


#9


https://product.kyobobook.co.kr/detail/S000217098182


keyword
이전 02화1-1 <이별통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