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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3-3. <사랑, 가장 먼 고요의 바다>

"빛이 보이지 않을 땐, 잠시 눈을 감고 기다리면 돼" 중에서

by 구정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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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요는
모든 말과 다정함이 가라앉은 뒤
감정이 가장 깊이 머무는 공간이었다.




사랑이 끝났을 때
모든 감정이 멈추었다고 믿었다.


나는 고요함이라는 이름의 낯선 공허 속에 머물렀다.


그러나 그 공허 속으로
사라진 줄 알았던 감정들이
다시금 채워지고 있었다.


Interstellar의 ‘First Step’.
광활한 우주의 어둠을 가르는 파이프오르간의 진동이
마치 어둠을 통과해 도착한 장송곡처럼 내 안에 울려 퍼졌다.


어둠을 통과한 빛
그 빛이 만들어낸 짙은 그림자.


그곳에...

돌아오지 않을 사람의 뒷모습이 있었다.


‘그 사람은 지금 어디쯤 떠다니고 있을까.’




그날 그곳은
우리가 함께한 마지막 카페였다.

창밖에는 어둠이 깔리고 있었고
테이블 위에는 뜨거운 커피 한 잔과
녹아내리는 아이스크림이 담긴 잔이 나란히 놓여 있었다.


그녀는 내게 자신의 옆에 앉으라고 말했다.

“무슨 일 있어?” 라고 물었지만
그녀는 불편한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 미소가 작별의 의미였다는 것을 그때는 알지 못했다.
카페를 나서던 그녀의 뒷모습이 유난히 멀게 느껴졌다.


어둠이 내려앉은 도로
집으로 돌아가야 할 길은 여전히 멀었다.

차 안에는 차가운 침묵만이 흐르고 있었다.


그 순간
내 안에 있던 불안의 한 조각이 떠올랐다.


‘혹시 내가
이 사람에게 짐이 되는 건 아닐까.’


집에 돌아와 불 꺼진 방에 앉았을 때
‘First Step’의 마지막 선율이
이어폰을 통해 내 안에 울리고 있었다.




사랑은
이별과 함께 사라지는 감정이 아니라
모든 것이 지나간 후
내 안에 번지는 존재의 파동이었다.


나는 그 어지러운 삶의 파동을
매일 견뎌내야 했다.
돌이킬 수 없는 시간의 흔적과
무수한 기억들이
아직 그 안에서 흔들리고 있었다.


이별 이후 나는 거의 잠만 잤다.
무의식이 의식을 삼키도록...

감당할 수 없는
절망과 슬픔을 견디기 위해
내 몸은 스스로 스위치를 내려버렸다.


그녀의 우는 모습은 보지 못했다.
그녀는 작별을 고하지 않았다.
어떤 말도 없이 모든 감정을 순식간에 끝내버렸다.


가장 잔혹한 이별은
아무런 말이 없는 침묵의 이별이다.
침묵은 사랑을 무너뜨리는
가장 정교하게 의도된 결말이다.


사랑이었기를 믿고 싶었다.
나는 그녀의 침묵이 끝나길
다시 사랑이 시작되길 기다렸다.


하지만
시간은 내 마음을 돌보지 않았다.
흘러가는 대신
희망이라는 이름의 고문으로
나를 서늘한 현실에 옭아맸다.


사랑이 떠난 자리에 남은 건
영원히 이루어지지 않을 희망뿐이다.

지나간 사랑보다
끝나지 않은 희망이 더 쓰라렸다.


그 부질없는 미련은
시간이 흐를수록
침묵의 빈 공간을 따라
더 멀리 더 깊게 번져갔다.


사랑이 내 곁을 떠나가고 있다.

아무 말도 닿지 않는 침묵의 경계 너머
의식의 등불마저 꺼져가는 심연 속으로...

기억이 가라앉아 잠든
가장 먼 고요의 바다로...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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