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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3-4. <이별연습>

"빛이 보이지 않을 땐, 잠시 눈을 감고 기다리면 돼" 중에서

by 구정훈
<#9 에세이 '빛이 보이지 않을 땐 잠시 눈을 감고 기다리면 돼' 2025.07.18 출간>




이별은 인연의 끝이 아니라
매일을 다시 살아내야 하는 삶의 방식이었다.


공허한 상실감은
하루도 빠짐없이 밀려왔고
나는 매일
이별에 익숙해지는 법을 배워야 했다.


이별은 끝이 아니라
견디며 살아가야 하는 또 다른 시작이었다.





1일 차.


뒤척이다 잠에서 깨어
이불 가장자리에 손을 뻗었다.
그녀가 사라진 자리
그 자리엔 공허만이 남아 있었다.


손에 닿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주인 잃은 베갯잇 위로 손끝만이 허공을 더듬었다.


다시 눈을 감았다.
꿈이기를 바랐다.
그러나 기억은 무의식보다 깊었고
그 어떤 꿈보다 선명했다.


오후의 카페.
습관처럼 두 잔의 커피를 주문했다.
그녀가 오지 않을 걸 알면서도
비어 있는 자리를 외면하지 못했다.


테이블 위 한 모금도 마시지 않은 머그잔 하나가
그녀의 부재를 외로이 증명하고 있었다.




7일 차.


휴대폰을 들었다.
그녀의 이름이 스치기만 해도
손가락이 먼저 반응했다.


연락하지 않겠다고 다짐했지만
그녀를 잊지 못하는 손끝을 늘 이성보다 빨랐다.


떠나간 사람을 그리워하는 마음은
이미 사라진 시간을 붙잡으려는 손짓 같았다.


다시 휴대폰을 내려놓았지만
갈 곳을 잃은 마음은 허공을 맴돌았다.


오래전 사두었던 책을 꺼냈다.
첫 문장을 읽으며
그리움이 나를 삼키지 않기를 바랐다.


그러나 문장들은 흩어졌고
페이지를 넘길수록 떠오른 것은
잊은 줄 알았던 그녀의 눈빛이었다.


결국 보내지도 못할 문자를
다시 쓰고 지우기를 반복했다.


그 사람은 없었지만
내 마음은 여전히 그 자리에 머물러 있었다.




15일 차.


이 주가 흘렀다.
이성은 이별을 받아들였지만
감정은 아직 그 문 앞에서 머뭇거렸다.


흐려질 줄 알았던 기억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 선명해졌다.


나는 손을 놓았다고 믿었지만
가장 아픈 부분을 여전히 꼭 쥐고 있었다.


손아귀에 남아 있던 건
이별이 아니라
미련이었다.


창밖에는 가을비가 내리고 있었다.
빗소리에 기대어
잠시 마음을 달래 보려 했지만
그리움은 빗물이 되어
창문을 타고 흘러내렸다.




30일 차.


한 달이 지났다.
우연히 들려온 이별 노래가
가슴에 저며 들었다.


함께 걷던 길목에서 발이 멈췄다.
그녀의 부재는 시간이 지날수록
더 짙은 그림자가 되었다.


그날 밤,
처음으로 참지 못하고 눈물이 흘렀다.
그리움이 파도처럼 밀려와
베갯잇을 적셨다.


그 사람을 불러보았지만
대답은 오지 않았다.


나는 살아간다기보다
그 그림자 속에서 방향을 잃은 채
그저 버티고 있었다.


하루는 더 이상 삶이 아니라
고통스러운 견딤의 반복이었다.


그러다 문득,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정말 그만하고 싶다.”




60일 차.


두 달이 지났다.
기억은 가끔 떠오르는 것이 아니라
공기처럼 매 순간 나를 감쌌다.


그녀는 한때 나의 전부였고
나는 그 세계에 갇힌 죄수처럼 살아가고 있었다.


이별은 새로운 시작이라 했지만
나는 아직 시작점에도 닿지 못한 채
제 자리만을 맴돌고 있었다.


창가에 놓인 작은 화분이
잎을 하나 더 틔웠다.
그 작은 변화를 보며
나는 처음으로
‘내가 아닌 것’을 돌보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화분에 물을 주며
내 마음도 조금 적셔본다.
슬픔이 무너지지 않기를 바라며
그렇게 조심스럽게.




90일 차.


벌써 세 달이 지났다.
우연히 마주친 그녀의 흔적 앞에서
또다시 멈춰 섰다.


그 시간들이 후회로 다가오기 시작했지만
그 기억은 여전히 나를 휘감았다.


그날은 일부러
평소와 다른 길로 걸었다.
익숙한 풍경이 낯설게 느껴졌다.


그 낯설음 속에서
나는 비로소 스스로를 마주했다.


아주 잠깐
그리움도 별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앞으로 걸어가야 한다고 결심했지만
그 길의 입구가 어디인지
아직은 보이지 않았다.


나는 여전히
이별한 사람으로 살아가고 있었고
그 정체성은 내 모든 하루를 정의했다.


그녀의 부재는
사라진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내 안에 존재하는 방식이었다.




120일 차.


네 달이 지났다.
억지로라도 웃는 법을 다시 배워야 했다.
그러나 웃음은 내 얼굴에 낯선 표정이었다.


다시는 돌아보지 않겠다고 말했지만
여전히 지나간 풍경 안에 머물러 있었다.


나는 이별을 극복한 것이 아니라
매일 이별하는 연습만 하며 살아가고 있었다.


하지만

그리움은 연습으로 사라지지 않는다.
잊으려 하면 할수록
마음속으로 더 깊이 파고들었다.


고통은
무뎌지는 것이 아니라
내면 안쪽에 틈을 만들며
점점 더 눅진하게 번져왔다.


창가의 화분에 작은 꽃이 피었다.
한참을 그 꽃을 바라보았다.
아직은 괜찮지 않지만
그 또한 내 삶의 일부임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오늘도 또 한 번
이별을 연습한다.


그리움은 잊히는 것이 아니라
그저 살아가는 방식이 되어 가고 있었다.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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