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이 보이지 않을 땐, 잠시 눈을 감고 기다리면 돼" 중에서
누군가의 시선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애쓰던 날들이 있었다.
그들의 마음에 들고 싶어서 고개를 숙였고
표정 하나 말투 하나까지 조심스레 다듬었다.
그들의 빛이 닿는 쪽에만 나를 내어주며
드러낼 수 없는 아쉬움은 침묵 속에 감췄다.
버티기 위해 살아내기 위해
내 존재의 가장자리를 조금씩 깎아냈다.
그렇게 나는 스스로를 지워냈다.
그건 살아남기 위한 선택이었지만
그 선택이 나를 서서히 무너뜨리고 있다는 걸
그땐 미처 알지 못했다.
어느 날
거울 앞에 선 나를 보았다.
익숙한 형태의 얼굴이었지만
그 어디에도 '나'는 없었다.
욕실의 밝은 조명빛은
생기 하나 없는 눈동자 위를 흘렀고
웃음은 마른 입꼬리에 억지로 걸쳐 있었다.
내가 입은 옷
내가 가진 말투
그저 누군가의 기대에 맞추느라
내가 만들어낸 껍질일 뿐이었다.
그들이 나를 좋아하면
나는 괜찮은 사람인 줄 여겼고
그들이 나를 떠나면
내 존재도 함께 지워지는 줄 알았다.
돌이켜보면
그 모든 시간은 스스로를 속인 기만이었고
그들의 시선에 맞춰 살아낸
오랜 침묵의 위선이었다.
사랑하는 이의 눈길조차
나를 억누르는 굴레가 되었다.
그녀가 나를 바라보는 동안
나는 언제나 ‘잘 살고 있는 척’을 해야 했으니까.
그렇게 나는
사랑받기 위해 나를 억눌렀고
잊히지 않기 위해 나를 감췄다.
인정받기 위해 마음을 숨겼고
버려지지 않기 위해 나를 깎아냈다.
단지 살아남기 위해 살다보니
나는 어느샌가 나를 잃어버렸다.
아무도 곁에 남지 않은
황폐해진 삶의 잿더미 속에서
나는 다짐했다.
더 이상 누구의 시선에도
나를 맞추지 않기로 했다.
나는 누군가를 비추는 거울이 되기보다
나를 위한 창이 되기로 했다.
누군가 나를 스쳐 지나가다
나를 들여다보고 싶을 때
내가 해줄 수 있는 가장 다정한 방식은
그 길에서 조용히 비켜서는 일이다.
이제는
누군가의 빛이 아니어도 괜찮다.
때로는 내 삶에
그림자가 창가에 드리워진다 해도
진짜 나로 살아갈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니까.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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