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이 보이지 않을 땐, 잠시 눈을 감고 기다리면 돼" 중에서
'빛이 보이지 않을 땐, 잠시 눈을 감고 기다리면 돼'가 출간되었습니다.
작가님과 독자님 덕분입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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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소음이 멀어진 뒤에야
오랫동안 들리지 않던 숨결이
내 안에서 다시 깨어났다.
문득
너무 멀리 와버렸다는 생각이 스쳤다.
앞만 보고 걸었지만 돌아보니 내가 없었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앞은 보이지 않았고
마음만 제자리에서 맴돌았다.
걷고는 있었지만
어디로 가는지도 몰랐다.
무언가로부터 도망치듯 내달렸지만
멈춰 선 자리에는 언제나 나 혼자였다.
나는 나를 잃어버린 채 살았다.
모든 것이 어긋나 있었다.
그러나 그 어긋남의 원인을
찾을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삶은 점점 망가지기 시작했고
어느 날 나를 바라보았을 때는
이미 수습할 수 없는 모양이 되어 있었다.
내 삶은 방향을 잃고 있었다.
그것은 세상의 잘못이 아니었다.
내가 모른 척하고 외면한 시간들이
나를 길 밖으로 밀어냈다.
이제는 한 걸음도 내딛고 싶지 않았다.
숨 쉬며 존재하는 일조차 버거웠다.
나는 더 이상
나를 몰아세우지 않기로 했다.
그래서 아무것도 하지 않기로 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건
더는 나를 놓치지 않기 위한 저항이다.
그러면 적어도
길을 잃어버리지는 않을 테니까.
멈춘 그 자리에서
바람이 어깨를 스쳤다.
들리지 않던 작은 소음들이
다시 귓가를 채웠다.
그 멈춤의 끝에서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감정들이
바람처럼 스쳐갔다.
어디로 가야 한다는 지시가 아니었다.
그것은 내가 아직 사라지지 않았다는 흔적이었다.
지금 여기
아픔을 느끼는 단 하나의 감각.
그것은 존재의 아릿함이 깨어날 때
비로소 느껴지는 통증과 같은 것이었다.
삶을 포기하려던 그 순간에
비로소 나를 느꼈다.
어쩌면
길을 멈춘다는 건
다시 나를 찾기 위한
두려움 없는 선택일지도 모른다.
절망은
붙들려 할 때 찾아왔지만
희망은
버리려 할 때 찾아왔다.
오늘 멈춘 이 자리에서
나는 다시 나로 시작한다.
누군가의 시선이 아닌
나 자신의 눈으로 나를 다시 보면서.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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