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생 시절 대화의 한 토막.
아빠: "우리 딸, 할 줄 아는 요리 하나 없어서 나중에 결혼하면 욕먹을까 걱정이다. 지금부터라도 하나씩 배워둬야 하는 거 아니니?"
엄마: "닥치면 다 하게 되어 있어. 미리부터 배울 필요 없어."
그땐 어려서 몰랐는데, 아빠의 걱정도 엄마의 반대도 다 사랑의 방법이었던 것 같다.
아빠는 행여나 내 귀한 딸이 "제대로 배워오지도 못한 며느리" 취급을 당할까 걱정이셨을 테고, 엄마는 한번 시작하면 평생 하게 될 집안일을, 당신 딸만큼은 가능한 한 늦게 시작했으면 하셨을 것이다.
그런 엄마 아빠의 걱정에 나는 대답했다.
"나는 결혼해서도 안 할 건데? 요리 잘하는 남자 만나면 되지! 그게 안되면 이모님 쓰면 되고!"
(아무 생각 없이 그냥 한 말임. 그런 풍요로운 삶을 살아 본 적도 없음. 오해 없으시길 바람.)
그러면 엄마야 좋지. 우리 딸 제-발 그렇게 풍족하게 살아줘, 응?
그리고 나는...
돈은 없지만 요리는 잘하는 남자를 만났다. ㅎㅎ
결혼 전 자취를 오래 한 남편은 요리를 곧잘 한다.
나는 요리에 취미도, 특기도, 관심도 없다.
그래도 결혼 초반부터 아예 안 한 건 아니었다.
내가 먹고 싶은 밑반찬이 있거나, 레시피를 몇 개 뒤적이다가 '이 정도면 시도해볼 만하겠다' 싶은 게 있으면 필요한 재료를 사다가 해보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미리 양념된 걸 마트에서 사 온) 제육볶음을 메뉴로 정하고 저녁을 준비하고 있는데, 양파를 꺼내 반으로 잘라보니 양파가 썩어 있었다. 썩은 양파를 옆으로 밀어 두고 두 번째 양파를 깠는데, 두 번째 것도 세 번째 것도 다 썩어 있는 게 아닌가.
'뭐 양파는 꼭 안 넣어도 되잖아?’ 하며 썩은 양파를 음식물 쓰레기통 옆으로 밀어 놓고, 고기를 팬에 넣고 열심히 볶고 있는데 남편이 퇴근해서 돌아왔다.
내가 부엌에 있는 게 영 불안했는지 어느새 남편은 내 옆으로 와서 뭐를 어떻게 하나 지켜보다가 음식물 쓰레기통 옆에 나란히 있는 양파 3개를 발견했다.
"얘네는 왜 다 반토막이 나 있어?"
"이거 다 썩었어, 다 버려야 돼ㅠㅠ"
"어? 그럴 리가 없는데? 이거 지난주에 사 온 거야"
"여기 봐봐, 다 썩어갖고 이렇게 우윳빛 액체가 나오잖아"
그랬더니 남편이 배를 잡고 웃으며 말했다.
"양파가 원래 그래. 하얀 진액이 나오는 양파는 오히려 신선하다는 증거야.ㅋㅋㅋㅋㅋ"
찾아보니 진짜였다. 교과서에도 안 나오는 이런 정보를 남편은 어떻게 알았을까? ㅋㅋ (독자님들! 솔직히 이거 저만 몰랐나요?^^;)
그날부로 나는 부엌에서 퇴출됐고, 결혼한 지 10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우리 집 메인 셰프는 남편이다.
나야 뭐 땡큐지! ㅎㅎ
앞으로도 계속 잘 부탁해, 남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