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호밀밭의 사기꾼 Jan 17. 2020

‘주간 어린이책 편집자’란 무엇인가

내가 어린이책을 만들게 될 줄은 몰랐다. 어린이책 편집자가 되기 위해 지금도 어디선가 고군분투하고 있을 분들을 생각하면 고백하기 무척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구인공고를 발견했고 지원했고 합격했다. 어린이책을 만들어본 경험이 없는 나를 무슨 생각으로 경력편집자로 입사시켰는지 회사의 생각도 알 수 없었다. 어쨌거나 나는 새로운 경험이라면 마다하지 않기 때문에 어린이책 출판사 출근을 앞두고 무척 설렜다.


어린이책을 만드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모두가 꿈과 사랑이 가득한 파란나라의 천사들일까? 모두 유자녀 기혼 편집자들일까? 어린이를 너무나 사랑하는 사람들일까? 자녀는커녕 아직 결혼도 안 했고 심지어 아이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내가 과연 어린이책을 만들 수 있을까? 생각이 아주 많아지면서 근심도 늘어갔다. 


하지만 출근해서 마주한 풍경은 기대했던 것과는 달라도 너무 달랐다. 나의 상사는 숨 쉬듯 술과 담배를 즐기는 전형적인 아저씨의 모습이었고 화가 나면 전화기나 모니터를 때려 부수는 것으로 유명하다고 했고, 출장 갔다 돌아온 선배 역시 꼬장꼬장해 보이는 아저씨였다. 내가 입사하기 전 이 팀의 멤버는 다섯 명이었는데 전원이 남자(아저씨?)였다고 했다. 사람을 외모로 평가하면 안 된다고 스스로를 질책했지만, 자꾸만 ‘이 사람들이 그림책을 만들고 어린이 교양책을 만들고 있다고?’ 하는 생각이 지워지질 않는다.


첫 출근을 했으니 당연히 환영 회식도 이어졌다. 나는 그날 ‘사람이 몸에 구멍이 뚫리지 않고도 이렇게까지 술을 퍼마실 수도 있구나’ 하는 깨달음을 얻었다. 아까 낮에 봤던 옆팀 팀장님은 분명 중전마마 같은 인자한 미소로 가득한 분이었는데, 알코올이 주입되는 순간 노련하게 소주와 맥주를 황금비율로 섞어 소맥을 말아 돌리는 제조(製造)상궁이 되어 있었다. 아니 대체 저들은 언제까지 얼마나 마실 작정인가. 술주정도 아주 다채로웠다. 나의 상사 아저씨는 모든 말의 어미가 욕설이었고 끊임없이 술을 권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술집이 떠나가라 목청을 드높이는 사람도 있었다. 첫날부터 나는, 이미 지쳤다. 


숙취는 지독했다. 다음 날 눈을 뜨는 것도 죽을 듯이 힘들었다. 아직도 온몸에 알코올이 돌고 있는 게 분명했다. 들숨과 날숨 사이로 술 냄새가 느껴졌으나 누구를 탓할 수도 없다. 이것은 내 몸이 발산하는 향기(?)니까….


그러나 사무실은 평화로웠다. 누구도 지각하지 않았고 누구도 나처럼 흐리멍덩한 눈으로 모니터에 코를 박고 있지도 않았으며 마치 누구도 술을 마시지 않았던 것처럼 멀쩡하고 쌩쌩해 보였다. 뭐지 이 사람들…. 제조(製造)상궁은 다시 중전마마가 되어 있었고 개가 되어 짖던 상사도 다시 사람이 되어 있었다. 태연하게 어린이 독자 분석 결과와 학부모 심층 인터뷰 분석, 홈쇼핑 매출 분석 등을 읊으며 회의를 진행하는 상사와 선배들을 경이로운 눈으로 지켜봤다. 


그들의 손에서는 매일 깜짝 놀랄 만큼 훌륭한 어린이 동화와 교양서, 그림책 등이 만들어졌다. 회사는 전통 있는 어린이책 출판사로 깨나 인정받는 곳이었으므로 결과물이 훌륭한 것은 그리 새삼스러울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나는 이들의 낮과 밤을 직접 목격하지 않았던가. 심지어 이런 일은 매우 자주, 거의 매일 일어났다. 이건 무슨 밤이 되면 늑대로 변하는 늑대인간도 아니고… 낮에는 천사 같은 미소로 ‘어린이 여러분’을 외치며 표지 카피를 쓰던 사람들이 밤이 되면 소맥을 말고 필름이 끊길 때까지 퍼마시는 주정뱅이가 된다는 도시괴담 아니냔 말이다. 


어린이책을 만드는 사람들은 여전히 동심으로 가득 찬 맑고 깨끗한 영혼을 가졌거나 모성애와 부성애가 넘치고 흘러서 어린이의 밝은 미래와 정서적 안정을 위해 애쓰는 반듯한 학부모일 것이라 생각했던 내 기대는 그렇게 무참히 깨지고 말았다. 혹시 이 회사 사람들이 좀 특이한 게 아닐까 생각한 적도 있다. 그러나 어린이책 편집자를 위한 강의를 들으러 다녔을 때 그곳에서 만난 선배 편집자, 기획자, 동화작가, 그림작가 들이 몸소 증명해주었다. 아… 그냥 대체로 이렇구나….


어쩌면 어린이책을 잘 만들기 위해 가장 중요한 덕목은 ‘스트레스 관리’인지도 모르겠다. 영혼이 맑고 순수한 사람이 아니라 스트레스 관리를 잘 하는 사람만이 매일의 암흑을 털어내고 영혼을 리셋하여 ‘멀쩡한’ 어린이책 편집자로 살 수 있는 게 아닐까. 그 도구가 알코올과 니코틴과 카페인이라는 것 역시 현재의 시대상을 생각하면 그저 자연스러운 선택일 뿐인 게 아닐까? 술독에 빠져 사는 어린이책 편집자라는 존재에 충격받으신 독자 여러분, 그러니까 놀라지 마세요. 알았죠? (찡긋)


일러스트: 김재호













이전 13화 오세요, 출판사!  하세요, 편집자!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