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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밀밭의 사기꾼 Mar 10. 2020

말하는 책, 말 없는 편집자

어떤 예1.

성폭력 피해자의 이야기를 담은 책이 출간된 출판사의 사장은 성폭력 가해자다. 가해 사실은 공론화된 적이 없고 그는 SNS를 통해 정의롭고 진보적이고 신념 있는 출판인의 이미지를 구축하고 있다. 성폭력 피해자의 책을 편집한 편집자는 사장의 성폭력 가해 사실을 알고 있다.


어떤 예2.

사회 초년생이 꼭 알아야 할 노동법에 대한 책을 만든 편집자는 근로계약서를 써본 적이 없고 대체인력이 없다는 이유로 회사로부터 육아휴직 사용을 거부당했다. 그가 만든 책은 이 출판사의 전략도서이므로 노동법을 꼭 알아야 할 이들이 구매할 수 있도록 유혹적인 표지 카피를 작성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어떤 예3.

이 회사의 어떤 책은 10주 연속 종합 베스트셀러 5위를 기록하고 있다. 이 책을 만든 편집자는 회사가 사재기로 순위를 올렸음을 알고 있다. 사람들은 자꾸만 이 책의 성공 비결을 묻고 마케팅 전략을 궁금해한다.


차라리 책이 아무런 목소리가 없는 상품이었으면, 하고 바랄 때가 있다. 내가 만드는 책의 메시지와 책을 만드는 환경이 정반대의 지점에 놓일 때, 특히 그렇다. 내가 비누받침이나 연필꽂이 같은 공산품을 개발하는 사람이었다면 사장이 어떤 개자식인지, 회사가 얼마나 쓰레기인지 이토록 생생하게 실감하지 않아도 됐을 텐데. 실무의 모든 순간마다 그것을 떠올리며 괴로워하지는 않았을 텐데. 하지만 책은 끊임없이 말을 한다. 책은 외형적으로는 생물이 아니지만 기능적으로는 늘 살아 숨 쉬는 상품이다. 


상품이 스스로 목소리를 내고 생각을 하고 메시지를 전달하는 매체라면 그 상품을 만드는 사람의 목소리와 생각에 대해 고민해보지 않을 수 없다. 수많은 출판노동자들이 자신이 만드는 책과 자신이 일하는 회사와 그 회사의 경영 기조 사이에서 혼란을 겪는다. 저 성범죄자는 성폭력 피해자의 책을 출판하고 정의로운 자신의 이미지를 만들어나가는 데에 활용하겠지, 독자들에게 노동법을 꼭 알아야 한다고 대대적으로 홍보하면서 정작 이 책을 만든 노동자의 권리 따위는 가볍게 무시해버리겠지, 모두를 속이고 사재기라는 불법을 저지르면서 부당 이득을 취하고도 털끝만큼의 죄책감조차 갖지 않겠지.


그저 어딘가에 고용된 월급 받는 직원이기에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편집자로서 내가 하는 일이 이들의 기만과 사기에 일조하는 게 아닐까 싶어 머리를 쥐어뜯는다. 저는 노동자의 권리가 없는 상태지만 노동법을 꼭 알아야 한다구 합니다! 물론 저는 이 책을 읽고 만들었기 때문에 노동법을 잘 알아요! 하지만 우리 사장님은 노동법을 지키지 않아요! 그런데 사장님이 노동법을 꼭 알아야 한다고 홍보 문구에 쓰라고 하시네요! 


출판사가 한 권의 책을 ‘출판’한다는 것은 그 책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에 공감하고 이를 더 많은 이들에게 전파하고자 하는 의지를 보여주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출판도 이윤을 얻기 위한 사업 아이템이라는 것을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단순히 더 많은 이윤을 창출하는 것만이 목적이었다면 굳이 책을 팔아야 할까? 단군 이래 최악의 불황이 아니었던 적이 없었다는데? 


책은 아주 상식적인 상품이다. 아주 상식적인 메시지를 기본으로 사회의 정의를 부르짖기도 하고 인간의 마음을 들여다보기도 하고 일상에 필요한 정보들을 전달하기도 한다. 그러니 굳이 출판사를 차려 책을 만들어 팔겠다는 사람이라면 본인이 책을 통해 간접적으로나마 사회에 전하고자 하는 신념이나 정신이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러니 내가 지금도 이해할 수 없는 부류의 사람들은 본인이 출판하는 책들이 전하는 메시지와 정반대로 말하고 행동하고 살아가는 이들이다. 이들은 심지어 자신뿐만 아니라 ‘고용’이라는 형태로 그런 위선의 자장 안에 타인을 끌어들인다.


좋은 글을 만나고 그것을 잘 만들어서 더 많은 이들에게 가닿을 수 있도록 애쓰는 일이 좋아서, 또한 그것이 가치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 일을 선택했는데, 현실과의 간극이 점점 더 멀어질 때마다 자주 회의감에 빠졌다. 편집자가 책을 만들면서 매번 진심으로 책의 메시지에 공감하고 동의하는 것은 아니지만, 어쨌거나 책의 효용과 가치를 믿으며 일했는데 그것을 아주 간단히 부정해버리는 현실의 존재를 코앞에서 목도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인류애를 잃고 매일 조금씩 냉소만을 쌓아가다가는 영영 출판계를 떠나버릴 것 같아서 회사를 떠나버린 적도 있다. 시간이 지나고 경력이 쌓이면서 내가 얻은 능력은 그저 이런 괴리를 최소화할 만한 환경을 찾아나가는 것이었다. 그것은 어쩌면 편집자로서의 능력치를 쌓는 것만큼 중요한 것인지도 몰랐다. 일의 즐거움과 괴로움 중에 근본적인 괴로움을 줄이지 못하면 즐거움의 영역에 닿기도 전에 나가떨어질 테니까…. 이제는 프리랜서가 되었으니 이런 고민을 할 필요조차 없어졌다는 게 그나마 다행인 걸까. 아니 이걸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업에 대한 근본적인 고민을 할 필요가 없는 일이라니, 어쩐지 스스로가 한없이 무력하게 느껴진다. 


일러스트: 김재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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