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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밀밭의 사기꾼 Apr 21. 2020

오늘도 오지 않는 ‘오늘의 커피’

대학을 졸업하고도 취업 생각은 1도 없고 어서 열심히 글을 써서 작가가 되어야겠다는 터무니없는 꿈을 꾸던 시절이 있었다. 고등학교 때부터 내 꿈은 영화감독이 되는 것이었고 한국에서 영화감독이 되려면 일단 시나리오를 잘 써서 투자를 받아야 하니까 일단 시나리오 작가가 되어야지,가 당시 나의 어리석은 계획이었으니 당연히 내 손에 들린 건 취업 지원서가 아니라 시나리오 작가를 배출한다는 작가교육원의 지원서였다. 


교육원 출신의 유명 감독과 시나리오 작가들 리스트를 훑으며 언젠가 나도 공모전에 입상해서 충무로를 휘젓고 말겠다는 다짐으로 주먹을 불끈 쥐었다. 실제로 교육원은 충무로에 위치했는데 어쩐지 벌써 영화인이 된 것 같은 기분에 취해 고독한 예술가병 초기 증세를 보이곤 했다.


교육비는 상당히 비싼 편이었는데 이제 막 직장인이 된 언니가 자신의 월급 절반이 넘어가는 교육비를 대신 내줬다. 나는 공모전에 입상해서 상금을 받으면 꼭 갚겠다며, 성공적인 투자가 될 수 있게 내가 정말 열심히 하겠다고 감사의 큰절을 했지만 언니는 투자가 아니라 기부를 했다는 듯한 인자한 표정으로 웃었다(결과적으로 정말 기부가 되었다는 게 몹시 슬픈 지점이다).


교육비도 땡겨 쓰고 직업도 없고 언니 집에 얹혀 사는 처지다보니 나는 몹시 가난했다. 가끔 언니가 주는 용돈으로 겨우 지하철을 타고 교육원을 오고가는 정도였고, 어쩌다 한 번 있는 교육생들끼리의 회식에 회비를 내는 것조차 부담스러울 정도로 돈이 없었다. 그래도 좋았다. 같은 꿈을 가진 사람들과 영화 이야기를 마음껏 나누며 같은 곳을 향해 같이 가고 있다는 현실 자체에 그저 안도했다. 아직 뭐가 되진 않았지만 뭐든 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이미 만족스러웠다.


교육원 근처의 지하철역에는 극장이 하나 있었고 극장건물 1층에는 스타벅스가 있었다. 교육원에 올 때마다 그 스타벅스를 매번 지나치는데, 친구끼리 연인끼리 영화를 보러온 사람들이 근심걱정 하나 없이 까르륵 까르륵 웃어대며 그 세련된 커피숍의 문을 드나드는 걸 보면서 나는 괜히 위축되곤 했다. 어쩐지 저 세계와 이 세계가 전혀 다른 것 같아서, 내 행색이 너무 꼬질꼬질해서, 내가 아직 실력도 없는 지망생인 걸 저들이 알아챌 것만 같아서. 


어느 날 강의를 마치고 집에 가는 길이었다. 갑자기 저 스타벅스에 들어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간이 늦어서 매장에서 마실 수도 없는데 너무나 간절하게 저 커피가 마시고 싶어진 것이다. 뭔가에 홀린 듯이 스타벅스에 들어가 ‘오늘의 커피’ 숏 사이즈(메뉴판에도 없는 가장 작은 사이즈)를 하나 주문했다. 너무 오래 전 일이라 정확한 기억은 아니지만 아마 3000원쯤 하지 않았나 싶다. 뜨거운 커피를 들고 나와 지하철을 탔다. 


때는 한파가 몰아치던 한겨울이어서 뜨끈한 종이컵을 두 손으로 쥐는 순간 손가락 관절이 다 사라진 것 마냥 노곤노곤해졌다. 잠깐 손을 녹이고 커피를 한 모금 마셨더니 온 몸이 아예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아아아아 겁나 따뜻하고 맛있어. 커피 사 마시길 잘했다는 생각을 하는 순간, 지하철은 금방 집 앞 역에 도착했다. 


문제는 여기서부터 시작됐다. 탈 때는 지하철역이 코앞이었지만 내릴 때는 지하철역에서 집까지 한참 걸어야 했다. 지상으로 올라오자 귀가 떨어져나갈 것 같은 칼바람이 몰아쳤다. 뜨거운 커피는 순식간에 아이스커피가 되었고 커피를 쥔 두 손은 손가락 끝부터 얼어붙는 것 같았다. 지옥문이 열렸다. 


아, 추워! 나는 왜 이 추운 날 스타벅스 ‘오늘의 커피’를 샀는가. 이 커피의 원래 이름은 혹시 ‘오늘 마시면 얼어 죽는 커피’인가. 편의점에서 500원짜리 온장고 캔커피를 샀다면 주머니 속에서 손을 녹일 수 있었을 텐데. 플라스틱 뚜껑 사이로 커피가 흘러나올까 봐 조심조심 걷는 바람에 집까지 가는 시간은 더 길어져서 더 춥잖아. 아, 추워! 500원이었다면 나는 지금 좀 더 따뜻했을 텐데 6배나 더 돈을 쓰고 이게 무슨 짓인가. 그 순간에는 스타벅스 커피보다 레쓰비가 천 배쯤 맛있을 것 같았다. 아, 추워! 내 3000원! 내 3000원! 


마음속으로 3000원을 부르짖으며 그 돈이면 지하철을 세 번은 더 탈 수 있는데, 레쓰비를 6개 살 수 있는데, 도대체 오늘 내가 쓴 3000원은 무엇을 위한 것이었단 말인가. 수백 번 자책하며 수백 번 욕을 했다. 그리고 문득 이런 나 자신이 너무 비참해졌다. 


돈도 없는 주제에 이렇게 비싼 커피를 탐한 자가 마땅히 받아야 할 형벌처럼 느껴져서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커피값 3000원이 뭐라고, 이게 뭐라고. 3000원짜리 커피 하나도 마음 놓고 사먹지 못하는 게 너무 서럽다. 언제까지 이런 삶을 살아야 하는 걸까. 작가가 되면 달라질까. 작가는 언제 될 수 있을까. 내가 쓰는 글이 커피가 되어 돌아올 날이 오긴 하는 걸까. 집에 돌아와 차갑게 식은 커피를 책상에 올려두고 글을 쓰기 위해 컴퓨터를 켰다. 하지만 추위에 곱아버린 손가락이 펴지질 않는다. 아무것도 쓸 수 없어 그대로 얼굴을 감싸고 울어버렸다. 


지금도 스타벅스 커피를 마실 때마다 그때 그 ‘오늘의 커피’를 떠올린다. 무언가가 되기 위해 애쓰던 시절의 사치스러운 기호식품은 이제 어떻게든 버티며 일하기 위해 습관적으로 쏟아 붓는 수액 같은 존재가 되어 있다. 이제 가슴에 3000원쯤은 있는데, 아니 스타벅스 카드에 5만 원쯤은 충전되어 있는데 하나도 행복하지 않은 걸 보니 아직도 내가 꿈꾸던 미래가 오늘의 커피가 되어 돌아오진 않은 것 같다. 


그래픽: 민선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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