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호밀밭의 사기꾼 Apr 08. 2020

와식업무는 비싸다

허리와의 전쟁이 될 줄은 몰랐다. 프리랜서가 되겠다고 사무실 짐을 바리바리 싸들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 내가 싸워야 할 대상은 불안정한 통장이지 작은방에 우뚝 존재하는 책상이 될 줄은 몰랐다. 


1) 책상에 앉는다. 2) 컴퓨터를 본다. 3) 그 자세 그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대부분의 현대인들이 그러하듯, 편집자의 일이란 보통 이런 1,2,3의 자세로 이루어진다. 회사에 다닐 땐 이 정도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프리랜서가 된 뒤 이상하게 허리가 너무 아프다. 일터가 바뀌었어도 1,2,3의 자세로 일하는 것에는 변함이 없는데 어째서 이토록 유난한 요통에 시달리게 되었을까. 분석을 시도해봤다. 


1. 사무실에서 일할 때와 자세가 다른가?

예 → 자세를 바꾸시오 

아니오 → 음…


2. 사무실에서 일할 때보다 더 오래 일하는가?

예 → 일하는 시간을 줄이시오

아니오 → 음…


3. 사무실 의자보다 우리 집 의자가 더 불편한가?

예 → 의자를 바꾸시오

아니오 → 음…


세 가지 질문에 대한 답은 전부 ‘아니오’였다. 2번 항목에 대한 답이 설령 ‘예’라고 하더라도 을 중의 을인 외주편집자가 일하는 시간을 조정하기란 쉽지 않으며, 3번 항목에 대한 답이 의심스러워 큰맘 먹고 의자를 비싼 걸로 바꿔봤지만 크게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결론은 하나다. 출퇴근이 없다는 것. 회사에 다닐 때는 그나마 하루에 한 시간이라도 걷고, 지하철을 타고, 버스를 탔다. 점심시간에는 동료들과 회사 주변 식당을 찾아 걸어 나갔다. 엉덩이 붙이고 일 좀 할 만하면 회의에 불려가고 화장실도 다녀와야 하고 자료도서 정리도 해야 하고 외근도 가야 했다. 생각해보면 사무실에서의 일이란 단순한 1,2,3 자세가 아니었다. 그렇다면 1번 항목에 대한 답을 바꿔야 한다.


집에서 혼자 일하며 일부러 출퇴근을 할 수는 없다. 그러니 조금이라도 몸을 움직일 만한 일을 만들어야 한다. ‘나를 일으키는 개’ 덕분에 하루에 30분 산책을 할 수 있다. 길고양이와의 우연한 만남으로 캣맘의 길에 들어선 덕에 밥셔틀을 돌아야 했으므로 30분은 더 걸을 수 있다. 나 어쩐지 좀 괜찮은 거 같다!는 건 물론 착각이다. 하루에 두 번은 움직이니까 괜찮…을리가 없다. 그 정도로는 어림도 없다. 


편집자 친구들은 내게 이런저런 운동을 권했다. 수영을 하면 허리가 좋아진다, 살이 쪄서 무리가 온 거다 개인트레이너에게 운동을 배워라, 헬스장에 가는 게 귀찮으면 달리기를 해라, 요가를 하면 관절 건강에 도움이 된다더라, 필라테스가 대세다, 발레가 짱이다, 아니다 주짓수가 짱이다… 아니 다들 언제 그렇게 운동선수들이 된 거지?


하지만 그들이 간과한 것이 있었으니, 나는, 정말, 운동이, 싫다. 멍멍이 산책, 고양이 밥셔틀로 하루 두 번 밖에 나가는 것도 귀찮아 죽을 것 같은데 일부러 몸을 움직이러 나가라니, 나를 그렇게 모르나? 친구들아 나한테 관심 좀 가져라. 나만 빼고 다들 바쁘고 건강한 도시인처럼 사는 것 같아서 좀 부끄럽지만 역시 몸과 마음이 동하지 않는 건 어쩔 수가 없다.


그리하여 내가 찾은 방법은 눕는 것이다. 역시 와식생활이 최고다. 앉아 있는 게 서 있는 것보다 허리에 더 나쁘고, 그나마 허리를 가장 편안하게 하는 것은 눕는 것이니 누워서 일을 해보자. 와식업무에 있어서 첫 번째 문제는 컴퓨터가 아니다. 초경량, 초소형 노트북들이 넘쳐나는 시대에 누운 채로 노트북을 거치하는 것 정도는 문제될 게 없다. 진짜 문제는 교정지다. 수십 장의 A4, 때로는 A3 사이즈의 종이 뭉치를 어떻게 누워서 볼 것인가. 이걸 모두 들고 보려면 허리 이전에 팔과 어깨가 먼저 나가버릴 것이다.


처음에는 교정지 뭉텅이를 바닥에 놓고 누워 한 장씩 들고 원고를 봤다. 종이는 가벼우니까. 하지만 흐물흐물한 종이 한 장을 한 손으로 빳빳하게 들기는 어렵고 양손 모두를 쓰자니 빨간펜을 들 수가 없다. 게다가 누운 상태로 종이에 교정부호를 적어 넣을 수가 없으니 그때마다 몸을 일으켜 엎드려야 한다. 이게 무슨 짓인가 싶어 아예 자세를 바꿔 엎드려봤다. 와! 허리가 으스러질 것 같네요! 


그리하여 나는 비장한 각오로 컴퓨터를 켜고 사과전자 사이트에 들어가 전자펜슬 지원이 된다는 태블릿PC를 주문했다. 누워서 아이패드로 PDF파일에 애플펜슬로 교정봐야지! 종이 낭비도 줄이고 최고야, 짜릿해, 새로워! 아, 그런데 10.5인치 패드는 양 팔로 들기엔 좀 무겁구나. 그럼 거치대도 사야지… 흠집 나면 안 되니까 케이스도 사야지… 화면에 스크래치 생기면 안 되니까 보호필름도… 어디 보자, 밖에 들고 나가려면 파우치를… (그만해!)  


일러스트: 김재호



이전 17화 제주, 가까운 미래의 먼 거리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