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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밀밭의 사기꾼 Mar 26. 2020

제주, 가까운 미래의 먼 거리

책 만드는 일의 장점을 하나 꼽자면, 언제 어디서나 일할 수 있다는 것이다. 아니, 잠깐. 이게 장점이라고…? 언제 어디서나 일할 수 있다는 건 언제 어디서나 일을 해야 한다는 것과 같은 의미로 보이긴 하지만 일단 그 부분은 넘어가도록 하자. 다른 많은 일들이 그렇듯이, 책 만드는 공정 역시 상당 부분 디지털화된 덕에 편집자도 디지털 노마드형 노동자가 될 수 있다는 얘기다. 


시대가 이러한데 왜 아직도 출판사들은 편집자와 마케터와 디자이너들을 한 사무실에 몰아넣고 소모적인 회의를 반복시키며 에너지를 낭비하는지 모르겠다. 물론 얼굴을 마주하고 이야기를 나눠야 더 효율적인 업무도 있겠지만 그런 일은 매일 일어나지 않는다. 같은 사무실에서 일해도 모든 자료들은 디지털 데이터로 오고 가고 소통마저도 사내 메신저나 카카오톡으로 하는 터라 실제로 출판사 사무실은 독서실을 방불케 하는 정적만이 감돌지 않은가. 이제 대면을 최소화하고 매일 아침 같은 사무실에서 얼굴을 마주하며 어색한 인사를 나누지 않아도 될 때가 된 게 아닌가. 나는 그 바람을 실천하기로 했고 결국 회사를 뛰쳐나왔다. 회사라는 울타리가 아니어도 편집자는 언제 어디서나 일할 수 있으니까.


개인적으로 회의를 좋아하지 않는 이유는 제대로 기록되지 않기 때문이다. 회사에서 그토록 많은 미팅을 하고도 돌아서면 모두가 각기 다른 기억을 쏟아내던 경험을 떠올려보자. 누군가 회의록을 작성한다 해도 다르지 않다. 말은 온전히 텍스트로 옮겨지기 어렵고 맥락과 뉘앙스를 담아내기도 어렵다. 애초에 글로 쓰인 것이 아니라 소리를 문장으로 만들 때 그렇다. 게다가 회의가 끝난 후 기록을 담당했던 누군가가 전체 메일로 공유한다 한들 아무도 회의록 따위를 다시 열어보지 않는다.


나 같은 미팅회의론자에게 프리랜서는 아주 적절한 선택이었다. 일을 의뢰받거나 복잡한 내용을 전달해야 할 때 미팅은 효율적인 수단이 되지만, 그 일을 처리할 사람이 외부에 있다면 얘기가 조금 달라지기 때문이다. “잠깐 회의실로 모입시다”와 “ㅇㅇㅇ에 대해 회의를 했으면 하는데 00월 00일 ㅇ요일에 일정이 괜찮은가요? 시간은 몇 시가 좋으신지요? 장소는 어디로 할까요?”는 일을 발주하는 사람에게도 에너지 소모 측면에서 큰 차이가 있다. 정말 어지간한 일이 아니면 발주는 메일을 통하고 디테일한 문의사항은 전화나, 메일, 메신저로 보충하게 될 것이다.


작업한 교정지는 수도권 어디든 한두 시간 이내에 배달해주는 퀵서비스를 이용하면 된다. 택배로 보내도 1박 2일이면 클라이언트의 사무실에 도착한다. 심지어 태플릿pc가 있다면 교정지를 출력하지 않고 파일만 보낼 수도 있다. 마이너한 수정사항은 스마트폰으로 해당 페이지를 찍어 디자이너에게 메신저로 전송하면 된다. 사실상 모든 소통은 메일과 첨부파일로 가능하다. 


프리랜서가 되자 나는 좀 더 큰(?) 꿈을 꾸기 시작했다. 모든 소통이 인터넷으로 가능하다면, 회사라는 울타리를 벗어나는 걸 넘어 완전히 다른 지역으로 벗어나는 것도 가능하지 않을까? 인터넷이 가능한 곳이라면 어디라도 가서 살면서 일할 수 있지 않을까? 예산이나 비자의 제한만 없다면 국경을 넘나드는 것도 가능하지 않을까?


물론 현실은 당연히 예산과 비자의 제한이 있으므로 전 세계를 떠도는 디지털노마드의 꿈을 이루긴 쉽지 않다. 그렇다면 제주도는 어떨까? 서울에서 지리적으로 가장 멀리 떨어져 있어서 쉽게 오고 갈 수 없는 곳. 하지만 비행기로 한 시간 남짓이면 도착할 수 있는 곳. 비행기를 탄다는 점에서 여행하는 기분이 들기도 하고 적당한 고립감이 있으면서도 편의시설은 충분히 있어서 생활에 불편은 없는 곳. 여타의 도서 지역과는 묘하게 다른 이국적인 풍광을 일상적으로 즐기면서도 기존의 생업을 지속할 수도 있는 곳. 어쩐지 그곳에 가면 인생을 다시 시작할 수 있을 것만 같은, 마법처럼 새로운 삶이 펼쳐질 것만 같은 그런 곳. 무엇보다, 필요하다면 언제든 아날로그 자료를 2~3일 이내에 택배로 주고받을 수 있는 곳. 


섬이라는 특성 때문에 생활비가 많이 들고 치솟는 인기 때문에 주거비는 서울과 비슷한 수준이며 밀려드는 관광객들의 자비로운 씀씀이 덕에 외식비 또한 상당하고 자가용이 없으면 이동이 불편하다는 점 등 이주에 고려해야 할 문제들은 차고 넘치지만 그래도 여전히 제주는 로망이다. 


외국에 나와 있는 것은 아니니 꼭 필요하다면 직접 만나 회의를 할 수도 있지만 언제든 마음먹는다고 쉽게 오갈 수 있는 거리는 아니니 어지간하면 전화나 메일로 일할 수 있을 것이다. 바다가 보고 싶은 날엔 언제든 바다를 보고 먼 풍경을 보고 싶은 날엔 가까운 오름에 오를 수 있을 것이다. 지역 특산물을 맛보고 싶다면 로컬식당에, 조금 유니크한 음식이 당긴다면 힙스터들의 성지에 들를 수도 있을 것이다. 내가 생활하는 한 지역에서 도시생활의 편리함과 여행자의 여유, 적당한 고립과 적당한 소셜라이프, 그리고 생업의 지속이 동시에 가능한 유일한 곳은 역시 제주인 것이다.


언젠가 제주에 살며, 제주를 즐기며, 제주를 맛보며, 속세(?)로부터 적당한 거리를 유지한 채 책을 만드는 미래를 상상한다. 아직은 외국에서 사는 것 못지않게 극복해야 할 제약이 많지만, 언젠가, 정말로 언젠가 그런 날이 올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상상. 그런 꿈 같은 상상이 반복되는 마감과 프리랜서의 불안을 이겨내는 힘이 되어줄지도 모르니까. 

근데 먼 데 산다고 일하기 번거로울 것 같다면서 일 안 주면 어떡하지? 그건 일단 그때 가서 생각하자….


일러스트: 김재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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