훌륭한 운동처돌이
몇 번 언급한 적이 있지만, 나는 지난해 성인 ADHD 진단을 받은 ADHD인이다. 이 진단을 받게 된 계기는 매우 드라마틱한데 간단히 요약해 말하자면 이러하다.
지난해 어느 출판사의 기획자로부터 '성인 ADHD에 관한 책'의 턴키 편집을 의뢰받았다. 평소와 다름없는 외주 편집 일이었지만 주제가 성인 ADHD라니, 몹시 큰 관심이 갔다. 주의력 결핍 하면 내가 또 한 결핍하기 때문이다. 다만 그때는 그냥 궁금한 정도의 단순한 호기심 수준이었다. 책은 정신과 전문의 선생님과의 인터뷰 형식으로 쓰였으므로 나는 정신과 선생님과 매주 인터뷰를 진행하며 성인 ADHD에 대해 물었다. 그렇게 자꾸 묻다 보니, 그렇게 자꾸 답변을 듣다 보니, 아니 잠깐, 이거 나잖아?
나는 유치원 때부터 직장인이 될 때까지 평생을, 거의 하루도 빠짐없이 지각을 해온 지각왕이었는데, 아니 보통 제정신인 사람이라면 이걸 게으르거나 잠이 많다고 생각하지 어떤 질환의 증상으로 생각하진 않잖아요? 근데 이게 증상일 수도 있다고요? 그러니까 ADHD인들은 기본적으로 시간 관리가 안 된다고 했다. 시간을 생각하는 개념이 보통 사람들과는 조금 달라서 선생님의 표현에 의하면 "ADHD인은 고양이"라고 한다. ADHD인에게 시제는 '지금'과 '지금이 아닌 때'뿐이라는 것이다. 이야기를 들을수록 나는 고양이였다. 일평생 내가 게으른 쓰레기라고 생각해왔는데 아니 내가 사실은 고양이일 수도 있다잖나!
책을 만드는 중에도 마감 관리가 잘 안 되어(그렇다 ADHD 책을 만들면서도 시간관리 안 됨) 공황발작을 몇 번 겪은 후 다니던 정신과에 가서 선생님한테 내가 아무래도 ADHD인 것 같다고 주장(!)했다.
"왜 그렇게 생각하세요?"
"제가 유치원 때부터 직장인이 될 때까지, 매일, 정말 매일 지각을 했거든요. 출퇴근하는 게 힘들어서 8년 전에 아예 회사를 그만두고 프리랜서로 살고 있어요. 근데 프리랜서한테 제일 중요한 마감 지키기가 너무너무 어려워요."
'집중력이 떨어져요!'가 아니라 '지각을 해요!'를 ADHD의 근거로 주장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책을 진행하면서 얻은 정보 덕분이었다. 나의 의혹(!) 제기(!) 이후 여차저차하여 두 달간 면담을 하고, 다른 질환이 원인은 아닌지 검사를 하고, 생활기록부도 제출하고, 가족면담을 한 뒤 최종적으로 성인 ADHD 진단을 받았다는 얘기다. 이럴수가. 간단히 요약하겠다고 해놓고 또 'ADHD 책 만들다 ADHD 진단받은 썰' 같은 소리를 늘어놓아버렸네(쉴 새 없이 말을 하는 것도 ADHD 증상일 수 있는데 나는 현실의 말도 -비교적- 많은 편이지만 문장도 많이 쏟아내는 것 같다...).
어쨌든 ADHD 약을 먹은 뒤로 나는 좀 사람처럼 살게 되었다. 약속을 잊는 일도 줄었고, 주변 환경을 정리하는 것도 조금 덜 어렵게 됐고, 아침에 일어나고 밤에 자는 패턴도 조금씩 잡혀갔고, 정해진 시간이나 마감을 지키는 일...은 아직 완전하진 않지만 전보다는 많이 나아졌다. 특히나 나는 약을 먹으면서 바로 그 ADHD 책 편집을 마감할 수 있었다.
한동안은 내가 운동에 빠져들게 된 것이 바로 이 약 덕분이라고 생각했다. 약을 먹고 사람 사는 것처럼 살게 되니 이제 건강도 생각하고 중독도 끊고 바른생활 어린이로 살게 되는구나. 대박이다. 약물치료, 인지행동치료 등 ADHD 치료 과정에서 최종보스는 '운동'이라고 생각했는데 내가 그걸 하고 있다니 후후 제법인걸.
근데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ADHD 진단을 받고 약물치료를 한 지 1년도 안 되어서 치료의 최종 단계(?)에 들어선다고요?(ADHD는 완치의 개념이 없고 평생 관리하는 질환인데) 그렇다 뭔가 이상하다. 가만 생각해보니 이것 역시 ADHD의 증상 중 하나일 수도 있겠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그러니까 제가 이제 운동에 과몰입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는 엄청난 취미 부자다. 이것저것 하고 싶은 것도 많고 궁금한 것도 많고 좋아하는 것도 많은데 그걸 다 직접 해보지 않으면 견디질 못하는 스타일이라서 뭔가 한 가지에 빠지면 죽어라고 그것만 판다. 근데 그걸 오래 하진 못한다. 미친놈처럼 빠져들었다가 영화 주인공들이 눈을 번쩍 뜨며 꿈에서 깨듯이, 어느 날 정신을 차려보면 거짓말처럼 그간의 흥미가 짜게 식어있다. 그러다 다음 취미로 넘어가면 또 미친놈처럼 그놈만 팬다. 이걸 수년째 반복하고 있었는데, 그러니까 지금껏 그 과몰입의 대상이 '운동'이었던 적이 없었고 설마 운동일 수가 없어서(나는 방바닥에 붙어사는 실내불가사리! 모든 것을 타고 기어다니는 대왕낙지다!) 운동에 과몰입한 지금 나의 상태를 'ADHD가 호전된 최상의 상태'라고 오해해버린 것이다.
그란데말입니다...
과몰입의 대상이 운동이라니, 얼마나 다행인가요.
ADHD인은 중독에 취약하며 한번 흥미를 가진 일이나 대상에 지나치게 과몰입을 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청소년 시기에 교과목의 성적이 극단적으로 큰 편차를 보이기도 하고, 공부 자체에 과몰입을 하는 아이들은 굉장히 높은 성적을 받고 상위권을 유지하기도 한다(그래서 ADHD 발견이 늦어지는 경우가 많다... 이 나라는 공부만 잘하면 다른 건 다 용서하는 이상한 나라라서...). 그런데 과몰입이나 중독의 대상이 게임, 도박, 약물, 술 등 삶의 질을 현저히 떨어뜨리는 반사회적 대상일 경우 인생이 굉장히 힘들어지는 것이다. 과몰입은 그 대상이 무엇이냐에 따라 사람을 사회적으로 유리한 위치에 오르게 하기도 하고, 생산성이 떨어지는 비효율적인 사회 구성원으로 전락시키기도 한다.
나는 그나마 그러한 과몰입의 대상이 사회적으로 치켜올려지는 '공부'도 아니었고, 인생 나락 갈 만한 '약물'이나 '도박' 같은 것도 아니었으니 매우 극단적이지 않다는 점에서 일차적 다행이랄까(아니야 공부는 좀 과몰입했어도 좋았을 텐...). 내 호기심의 대상은 너무나 하찮고 일상적이고 소소해서 그걸 과몰입이라고 인식조차 하지 않은 것 같다. 그런데 이제 '운동'이 과몰입 대상이 되다니. 참으로 바람직한 이차적 다행이다. 운동이라는 것에 단점이라는 것이 있습니까? 없잖습니까!
게다가 운동은 ADHD 치료에 큰 도움을 준다고 했다. ADHD인들은 도파민과 노르에피네프린의 기능이 떨어져 있는데 운동을 하면 엔돌핀도 막 뿜뿜하고 도파민과 노르에피네프린이 활성화된다고 한다. 도파민과 노르에피네프린은 약물로도 조절을 하지만 운동까지 곁들이면 운동 자체가 치료의 보조적인 역할을 하게 되는 것이다.
난생 처음 몸을 움직여 무언가를 해내고, 몸의 기술을 익히고, 그러면서 기분이 좋아지고, 당연히 건강해지고, 협동하여 성취를 이루고, 공감대와 연대의식을 공유하는 동료가 생기는, 지나치게 바람직하여 약간 삐뚤어지고 싶을 정도인, 그런, 운동이란 것에 과몰입하게 된 ADHD인의 일상이라는 것은, 참으로, 대단히, 옳다. 늘 생활습관이 불량했던 나에게는 어쩐지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어색한 모먼트지만, 그래도 이 과몰입은 너무 빨리 끝나지 않으면 좋겠다. 나의 질환을 역이용해(?) 이 운동처돌이 시절을 평생 증상으로 이어갈 수도 있지 않겠음?(아닌가)
"운동은 우울감, 불안, 기억력 저하, 주의력 저하 등의 모든 정신건강 문제에 큰 도움이 됩니다. ADHD 환자는 전전두엽에서 소뇌에 이르는 인지 조절 네트워크의 기능이 떨어진다고 하는데, 전전두엽은 운동을 통해 긍정적으로 강화되기 쉬운 부위입니다. 또한 근육 움직임과 몸의 균형뿐만 아니라 뇌 전체의 정보 흐름, 활성도의 균형과 리듬을 조율하는 소뇌도 운동을 통해 자극되고요. 운동을 통해 ADHD 뇌에서 특히 활성도가 떨어진다고 알려진 도파민과 노르에피네프린이 활성화되는 것도 주목할 부분입니다.
(...) 제가 늘 말하는데요, 규칙적인 일상은 우리가 진정 자유롭게 불규칙하기 위한 바탕이 됩니다. 가슴 뛰는 일을 원 없이 하기 위해, 매일 가슴이 뛰도록 움직이고 운동하세요!"
- 안주연, <어쩌면 ADHD 때문일지도 몰라>, 29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