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근으로 운동하는 사람
사실 첫 풋살 체험(!)을 하면서 제일 많이 한 생각은 '나 이거 못하겠는데?'였다.
기본기조차 이 정도로 따라하지 못하는데 어떻게 "경기"를 한단 말인가! 공을 차는 그 잠시 동안도 한 발로 서지 못하는데 도대체 어떻게 뛰면서 한 발씩 번갈아가며 공을 밀며 드리블을 하고 패스를 하고 슛을 넣는단 말인가!
"P님, 도대체 어떻게 한 발로 서서 공을 차요?"
"와하하하 호밀님 그게 무슨 말이에요?"
P님은 한 번도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며 와하하하 웃었다. 그러니까 보통 사람들은 풋살에 필요한 패스나 드리블, 슈팅 등을 하면서 한 발로 균형을 잡아야 한다는 걸 의식할 필요도 없이 그냥 자연스럽게 수행한다는 말이렷다. 아, 그렇구나 ㅋㅋㅋㅋㅋㅋ 나 진짜 코어 힘도 없고 균형감각도 없구나.
얼떨결에 연습경기를 뛰었지만 이걸 제대로 하려면 엄청난 훈련과 경험이 필요하겠구나 싶었다. 처음에는 테니스보다 진입장벽이 낮다고 생각했다. 테니스는 공을 주고받기라도 하려면 최소 6개월에서 1년은 레슨을 받아야 해서 시작한다고 바로 게임을 할 수 있는 종목이 아닌데 풋살은 막 패스만 할 줄 알면 경기 투입이라니 진입장벽이 낮네! 했다. 그러나 어떤 스포츠건 마찬가지겠지만, "제대로" 하려면 꾸준한 훈련과 경험이 필요하다. 그 당연한 사실을 잊고 있던 과거의 나를 규탄한다.
하여간에 풋살은 재밌다. 근데 역시 나는 운동을 드럽게 못한다. 하지만 재밌으니까 계속 하고 싶고 잘하고 싶다. 잘하려면 훈련을 해야 하는데 혼자서 어떻게 하지? 나도 소속 팀이 있으면 좋겠다. 근데 주변 지인들이 활동하는 팀들은 지금 자리가 없다고, 하나같이 당장은 신입회원 모집 계획이 없다고 했다. 이럴수가. 팀스포츠는 하고 싶다고 할 수 있는 게 아니구나.
언제 자리가 날지도 모르는 자리를 기다리기는 싫다. 불이 붙었으니 화르륵 태우고 싶단 말이다!
이런 나에게 지인은 풋살아카데미라도 다녀보는 건 어떠냐는 제안을 했다. 엉? 풋살도 학원이 있어? 역시 K학원... 없는 게 없다. 찾아보니 마침 동네에서 가까운 곳에 ㅇㅇ여성풋살아카데미가 활발하게 운영 중이었다. 우왕. 역시 사교육만이 살길인가...
"당근에서 찾아보는 거 어때요?"
아카데미를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을 때, 당근으로 만난 테니스 랠리 멤버가 당근에 '초보 풋살 모임'이 있다는 귀한 정보를 줬다. 생각해보니 당근에 '테니스 초보 모임'이 있었고, 그 모임에서 랠리 멤버를 만나 테니스를 치고 있잖아... 그럼 당연히 '풋살 초보 모임'도 있겠지!
초보 풋살 모임은 매주 토요일마다 한 시간은 기본기 연습, 한 시간은 미니게임을 한다고 했다. 나처럼 풋살 찍먹해본 사람이든, 풋살을 아예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사람이든 모두 참여할 수 있다고 했다. 와 와 와 신난다. 당장 참여 신청!
그런데, 낯가린다며. 모르는 사람 20명이랑 풋살을? 자네가?
참으로 놀라운 것이... 운동은 모르는 사람이랑 해도 아무 상관이 없더라. 어느날인가 심야에 공공서비스 예약 사이트에서 우연히 테니스코트를 예약하게 되면서 당근으로 랠리 멤버를 구했다. 예약 시간이 되자 4명이 모였고 인사하고 테니스 치고 인사하고 헤어졌다. 테니스 랠리를 하는 동안에는 스몰토크도 필요없다. 적당히 서로의 구력을 확인하기 위해 레슨 기간 정도나 물어보고, 어느 동네에서 왔는지, 레슨은 어디서 받는지 정도의 정보를 주고받으면 나머지는 말없이 호잇 으익 우학 으억 꺄욱 오옷 하며 랠리를 했다. 그렇게 몇 번 랠리를 했더니 호흡이 잘 맞는 멤버도 생겼고, 다음에 또 같이 치자는 의미로 단톡방도 만들었고 그 안에서 누군가 코트를 예약하면 참여할 사람 손들고 가서 또 랠리를 하고... 세상 평화롭고 편안하다.
풋살도 그랬다. 어떻게 모인 사람들인지, 모인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몰라도 상관없었다. 한 명, 한 명 인사하고 친해질 시간도 없다. 기본기 배우고 게임하기 바쁘다. 초보 모임이라 그런지 수준도 비슷하고 열정도 비슷해서 다들 열심이었다. 누가 못한다고 타박하지도 않고, 잘하면 다같이 물개박수를 쳐줬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승부욕이 없기(!) 때문에, 기본기 연습도 하면서 승부에 상관없이 즐겁게 게임할 수 있다는 것이 그저 신났다.
이 모임에 가는 것 자체가 부담이 없고 풋살은 재미있으니 매주 토요일이 기다려졌다. 풋살화를 사고 공을 사고 훈련용 '콘'을 샀다. 아파트 단지 안에 패스 연습을 할 곳이 있나 찾아보려고 가로세로 1미터만 공간만 있어도 바닥이 평평한지, 공을 튕겨낼 벽이 있는지 살피느라 땅에 고개를 쳐박고 다녔다. 겨우 아무도 오지 않는 빈 공터 같은 곳을 찾았다. 혼자 스탭 연습을 하다 발이 엉겨 괴상한 모양으로 자빠지려 할 때면 얼른 고개를 들어 주변을 살폈다. 우엑 쪽팔려 아무도 안 봤겠지... 보지 마... 뚜쉬...
처음엔 어떻게 움직이고 뛰어야 할지도 모르겠어서 뚝딱거렸는데 조금씩 감도 생기고 수비도, 공격도 적극적으로 하게 되면서 게임은 더 재밌어졌다. 찬스가 왔을 때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일단 때려보자 싶어 슈팅도 시도해봤고, 우연찮게 골도 몇 번 들어갔다. 그렇게 신나게 당신 근처의 스포츠를 즐기고 있을 때, 지인들이 슬슬 신입회원을 뽑는 구단 소식을 알려줬다.
여기서 낯가림의 정의를 다시 해야할지도 모르겠다.
나는 낯을 가리는 걸까, 관계를 두려워하는 걸까. 낯선 사람 만나는 걸 부담스러워한다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관계맺기를 부담스러워한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갑자기 소속 팀이 생긴다고 생각하니까 엉거주춤 뒷걸음질을 쳤다. 승부욕 없는 내가 팀스포츠의 팀워크를 감당할 수 있을까? 나는 누가 못해도 크게 아쉽지 않고 누가 잘하면 와 입 벌리며 그저 감탄하는 사람인데, 팀이 생긴 이후에도 계속 그런 자세로 임해도 되는 걸까? 혹시라도 팀에 안 맞는 사람이 있으면 어떡하지? 팀 사람들이랑 못 친해지면 어떡하지? 아니, 친해지는 과정이 너무 귀찮으면 어떡하지? 소속감을 원하면서도 소속감을 원하지 않는 나의 이 상태를 뭐라 설명해야 할까?
대부분은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일들이고, 불안이란 대부분 일어나지 않는 일, 실재하지 않는 존재들에 대한 걱정으로 이루어지는 법. 그걸 잘 알면서도 막상 기회가 다가오니 주춤주춤 뒷걸음질을 치는 스스로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나마 당근으로 낯선 사람들과 운동하는 경험을 쌓은 덕분일까, 불안하고 걱정스럽지만 일단 그 불안과 걱정의 타이밍을 뒤로 미뤄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팀 활동을 하는 지인의 게스트 참여 제안을 냉큼 받았고, 두 달간 시즌제(?)로 운영되는 여성단체의 구단에 입단 신청을 했다(두 달간 훈련을 해서 삐약이들의 풋살대회에 참가한다는 목표를 가진 단기 팀이어서 마음이 편했다!). 지인들이 추천해준 각종 FCㅇㅇ, FCㅁㅁ, FCㄹㄹ 등 구단들의 인스타를 팔로잉하며 그들의 활동 모습을 지켜봤다. 아직은 마음이 조심스럽지만 뭐든 기회가 오면 경험하고 체험은 해보겠다는 게 달라진 지금의 나다. 당근 이전의 나였다면 뭘 해보기도 전에 아아아아 싫어 안 해 못해 하며 도망쳤을 것이다^^^^^^(테니스 동호회 가입이라는 귀한 기회를 즉시 거절했던 과거의 나처럼^^^^^)
어느 정도의 강제성이 없으면 스스로 운동할 에너지와 의지를 만들어낼 수 없는 나란 녀석에게는 러닝, 수영, 요가 같은 홀로 운동, 기록 운동 같은 건 지속할 수가 없다. 상대가 있어야 게임이 가능한 랠리 운동이나 동료들이 있는 팀스포츠여야 그나마 나의 궁디를 의자에서 떼어낼 수 있다.
일단 다른 사람과 "만나기로 약속"했다 하면 나는 며칠 전부터 계속 그 약속만 생각한다. ADHD인간이라 그렇지 않으면 그 약속을 바로 까먹기 때무네... 까먹지 않기 위해 다소 강박적으로 약속을 떠올리는 습관이 있고, 하여간에 '약속'이란 걸 해버렸으니 그것을 지키기 위해 몸을 일으켜야 한다. 비록 내 안의 게으름유전자(그런거있는지는모름)가 '누워있어라... 누워... 누울 수 있는데 왜 일어나니...'라고 주문을 외워도 하여간에 일어나야 한다. 오늘도 잊을 만하면 "땅, 근!" 알림이 울린다. 땅,근! 풋살 공지입니다. 땅,근! 테니스 랠리 미리 알림이애오. 땅,근! 운동해라 나녀석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