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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밀밭의 사기꾼 Aug 20. 2024

매우 낯가리는 사람의 풋살

나를 풋살시키러 온 나의 구원자

"호밀님, 풋살 같이 해보실래요?"

네?!?!?!? 뭐라구요!!!! 진짜요??? 해도 돼요??? 어떻게 해요???? 뭔데요 나 당장 할래!!! 할래요!!!! 뭔데뭔데 할래요!!! 


풋살 하러 같이 가자고 제안하는 사무실 동료 P님의 머리 뒤로 후광이 비쳤다. 나를 풋살시키러 온 나의 구원자... 드디어 제게 풋살을 할 기회를 내려주셨군요. 여자축구, 풋살, 하여간 공 차는 놀이. 그걸 정말 꼭 해보고 싶었다. 근데1) 막상 하려니 엄두가 안 났다 방법도 모르겠다. 근데2) 누군가 나를 끌고 가준다질 않나. 얏호! 


근데3) 자네, 매우 낯을 가린다고 하지 않았나? 

그렇다. 나는 낯을 가린다. 낯을 가리면서도 사회적 가면을 능수능란하게 바꿔 끼울 수는 있는데, 귀찮아서 하기 싫다,고 고백했다.(할 수 있다 다만 하기 싫다) 그래서 1대1 또는 2대2로 하는 테니스조차도 낯선 사람과 만나야 한다는 사실 때문에 부담스럽다고 했으면서, 팀스포츠인 풋살은 하고 싶다고? 왜? 

음... 그러게 나도 그 이유를 생각해봤다. 혹시 내가 알고 보니 사람을 좋아하는 핵인싸?일 리는 없다. 내가 가진 거의 대부분의 사회적 스킬은 직업적 필요에 의해 훈련된 결과이기 때문에 소셜액티비티 스타트 버튼을 누르면 저장된 설정이 구현되는, 뭐 그런 내면의 매커니즘이 생성되어 있을 뿐. 

그렇다면 내가 평소 축구를 좋아하는 축구팬이었나? 물론 그것도 아니다. 나는 전형적인 "월드컵 때만, 우리나라가 하는 경기만 보는 사람"이다. 그마저도 골 하나 먹히면 에이 졌네 하며 채널 돌리는 사람이다. 그렇다면 대체 이유가 무엇인가. 사실 뭐 모든 것에 이유가 있을 필요는 없는데, 그럼에도 한 번 더 이유를 생각해보고 내린 결론은, "할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한 충격" 때문인 것 같다. 


몇 년 전, 김혼비 작가의 <우아하고 호쾌한 여자축구>를 읽었을 때 나는 엄청난 충격에 빠졌다. 여자들이 모여서 축구를 한다고? 어디서? 어떻게? 무려 '여자축구단'이라는 게 있다고도 했다. 정말? 어디에? 

책을 읽어보니 어딘가에 있는 것 같기는 하다. 검색해보니 내가 사는 구에도 여자축구단이 있다고 한다. 이럴 수가. 나는 (프로 선수가 아닌) 성인 여성들이 모여서 팀 스포츠를, 그것도 축구를 할 수 있고, 하고 있다는 사실에 매우 놀라고 말았다. 그런 가능성을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조기축구회 같은 건 남자들만 하는 건 줄 알았는데 그런 걸 여자들도 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고? 

그리고 여자들이 모여서 축구하는 예능 <골 때리는 그녀들>이 시작됐을 때, 나는 그 프로그램의 열렬한 시청자가 되었다. <골때녀>를 보면서 나는 매회 충격과 환희 속에서 축구 로망을 키워나갔다. 


여성 연예인들이 땀 흘리고, 넘어지고, 뛰어다닌다.

모두가 경기 하나하나에 너무나 진심이다. 

같은 팀에 대한 전우애(!)가 또한 너무나 진심이다. 

지면 울고 이기면 웃는다. 골 하나에 세상 다 가진 것처럼 환호한다. 

이게 뭐 그렇게 대단한 일인가. 스포츠 경기에서 너무나 당연하게 보여지는 것 아닌가. 근데 이건 스포츠 경기가 아니라 예능이었다. 여성에게도 허락된(?) 팀스포츠의 위력은 정말 대단했다. 예능인데도 출연자들을 저토록 진지하게 만드는 힘이 뭘까. 축구에 뭔가가 있는 것 같다. 궁금하다. 나도 해보고 싶다.

<골때녀>가 처음 시작됐을 때 이런 생각을 하는 여성들은 아주아주 많았을 것이다. 그중에 대부분은 실제로 팀을 결성하고 풋살장에서 활동을 시작했을 테고, 일부는 나처럼 와와 재밌겠다 해보고 싶다 생각만 하면서 막연히 부러워하고만 있었을 것이다. 그렇게 영원히 입만 벌리고 부러워하다 끝날 줄 알았는데 드디어!! 퐈이널리!! 공을 차볼 기회가 생겼다. 이것은 내 인생의 사건이다!


혼자 지구 238123948바퀴를 돌고 왔을 법한 호들갑을 떨었지만 사실 이건 P님이 활동하는 구단의 연습 시간에 한번 참여해보는 것뿐이다. 그래도 몹시 설렜다. 왜 그런 거 있잖나, 기계의 기본 설정상으로는 실행이 불가능한데 대충 이케저케 매뉴얼 버튼을 추가하면 어케저케 작동하는 기계처럼. 낯선 사람을 두려워하지만 풋살을 하고 싶으니 내면의 낯가림 설정을 이케저케 조금 바꾸면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믿음. 발로 공을 컨트롤하다니, 내가 그걸 할 수 있을까. 내가 연습에 폐를 끼치면 어떡하지. 근데 어차피 참관 비슷한 거니까, 뭐 대단한 걸 하진 않을 테니까 괜찮을 거야(라는 안일한 생각을 해서는 안 되었다). 


함께 간 P님이 기본적인 패스와 드리블을 가르쳐줬다. 와, 이게 뭐야? 순간적인 힘으로 한 발에 체중을 다 싣고 버텨야 하잖아? 그러니까 패스를 하든 슈팅을 하든 공을 차려면 항상 한 발은 공 옆에 두고 한 발로 공을 차야 한다. 당연하다. 당연하다고! 근데 그게 너무 어렵다. 일단 디딤발을 놓고 다른 한 발이 공중에 뜨면 나는 균형을 잃고 휘청거렸다. 공을 차는 순간에 한 발로 서야 하는데 바로 그 순간 균형을 못잡아서 자빠지는 것이다. 와하하하하하.... 이게 뭐야.... 


게다가 공을 앞으로 밀고 가는 기본적인 드리블을 하는데, 발등을 세우고 공을 조금씩 미는 순간 손등이 꼬부라졌다. 엥... 손등은 왜ㅋㅋㅋㅋㅋㅋㅋㅋ 대학교 때 카트라이더 하면서 방향 전환을 할 때마다 몸도 방향 버튼과 함께 좌우로 움직이던 시절이 생각났다. 발등을 세우라니까 손등도 같이 세우게 되고 발등을 세우고 앞으로 가니까 손등도 앞으로 가듯이 뒤로 꼬부라지는 것이다. 와, 이 몸의 미친 신체 협응력 진짜 머선일인가... 손이 아닌 다리로 어디로 튈지 모르는 동그란 공을 컨트롤한다? 이건 진짜 짱 어려운 행위임이 틀림없다.(아마도?) 


그렇게 땡볕 아래서 혼자 공에게 농락당하고 있는데 갑자기 사람들이 모여서 연습경기를 한다고 했다. 오, 경기를 직접 보게 되는구나! 하며 해맑게 멍때리던 나는 어느새 경기장 한가운데에 서 있었다. 

"아휴 풋살은 경기를 해봐야 늘어요!"

네??? 제가요? 제가 경기를 한다고요? 저 오늘 처음 왔는데요? 발등으로 드리블하면서 손등 꾸부리는 사람인데요? 

생각해보니 풋살이든 축구든 처음 시작하는 이야기를 보면 패스 몇 번 하고 바로 경기에 투입됐다고들 한 것 같다. 다들 얼떨결에 어 어 어 하면서 헛발질에 꽈당에 어설픈 데뷔전(!)을 치르며 데헷 축구는 혹은 풋살은 재밌구나 데헷! 하며 끝났던 것 같다. 어 어 근데 제가... 제가... 그..그런 걸 할 수 있을지 모르겠는데요... 저기요...


뭐라 얘기해볼 새도 없이 경기는 시작됐다. 나는 가장 후방에서 수비를 하면 된다고 했다. 

"그냥 ㅇㅇ님만 막으세요"

오, 이것이 맨투맨 수비인가!!! 

"중앙까지는 올라오세요!"

아 앗 네네 그럼 ㅇㅇ님 맨투맨은? 

"이렇게 저렇게 움직여주세요!"

앗 네? 네! 이렇게! 이얍 오홋 으악 끼육 으헙 갸앗 우헥 

혼자 오만가지 의성어의태어를 다 내뱉으며 가끔 우연하게 공을 걷어내 수비에 성공하기도 하고 골키퍼가 됐을 때는 우연하게 공이 손에 살짝 맞아 튕기며 선방에 성공하기도 했지만, 나머지 대부분은 으어어어 어어어어 으이이이잉 아아앙어어어어 하다가 끝이 났다. 

공이 가는 쪽으로 나도 가야 하나? 나한테 패스가 온다!! 못받으면 어떡하지? 으악 진짜 못받았어! 완전 민폐다! 구멍이다! 축구 보니까 패스하고 움직여서 또 패스 받을 자리로 이동하던데, 난 어디로 가야 하지? 이게 수비는 맞는 건가? 그냥 앞에서 알짱거리면 이것이 압박인가? 아닌가? 발로 공을 빼내야 하나? 으아아아 어떡하지 으아아아 


매우 낯가리는 인간이 팀스포츠에 투입되면 머릿속이 터진다. 안그래도 저는 ADHD인이라서 별별 잡생각으로 머리통이 꽉 차 있는 사람인데 강박적인 일본사람들처럼 속으로 "폐를 끼쳐선 안 돼!"를 외치며 다른 사람들의 이동과 액션을 고려하면서 발로 뭔가를 꾸물꾸물한다? 진짜 머리통 터지는 겁니다 녜녜...

물론 나의 헛발질을 지켜본 팀원분들은 모두 내게 친절한 응원의 말을 가득 해주셨다. 발이 빠르다, 침착하다, 공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움직임이 좋다 등등 '초보자가 들으면 기분 좋아지는 101가지 칭찬' 같은 다정한 말들로 내 머릿속의 와이퍼를 촵촵 작동시켜 잡생각들을 싸악 밀어주셨다. 오왕 다정해. 데헷, 풋살은 재밌구나, 풋살인은 다정하구나, 데헷! 


재밌다. 협동으로 이루어지는 득점이라니, 테니스나 복싱에서는 느낄 수 없었던 웅장한 스코어다. 

재밌다. 뛰어다닐 땐 죽도록 힘든데 공이 움직이는 게 너무 재밌다.  

재밌다. 계속 하고 싶다. 계속 하려면 역시 지금보다 체력이 더 필요하다. 

당장 웨이트하러 튀어가야겠다. 


"트쌤, 저 풋살하고 왔어요!"

"오, 어땠어요?"

"너무 힘들어요! 근데 너무 재밌어! 나 이거 계속 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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