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하고 싶은 마음
취미 부자로 120평생을 살아왔는데, 운동이 취미가 되니 달라진 게 있다. 돌아보면 그동안의 취미는 무언가를 수집하거나, 소비하거나, 돌보는 행위가 주를 이뤘다. 그런데 이 운동이란 놈은, 뭘, 해야 한다. 그러니까 내 몸으로 뭔가를 해야 한다. 그동안의 취미는 잘할 필요가 없었다. 그저 즐거워하기만 하면 됐다. 그런데 운동은 특히 랠리 또는 팀 스포츠는, 이걸 뭐라고 해야 하나, 나 자체가 개입되고, 타인과 비교가 되고, 타인과 협동해야 하고, 타인과 관계 맺어야 하고, 전술을 이해해야 하고, 스킬을 익혀야 하고, 체력을 단련해야 하고, 시간을 들여야 하고, 노력을 해야 하고.......... 아아악 하여간에 뭘 해야 한다.
그러니까 난생 처음, 취미로 뭔가를 하면서 '잘하고 싶다'는 마음이 들어버렸다.
"못하면 어때, 선수도 아닌데" vs "기왕 하는 거 잘하고 싶다"
두 가지 마음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다가, 또 그런 생각이 드는 것이다. 아니 근데 잘해서 뭐할라구? 운동을 잘하면 더 재미있어지나? 그렇다면 운동을 못하면 재미없어지나? 앗... 못하면 재미없긴 하다. 하지만 운동 종목 그 자체가 즐거우면 그걸 온전히 즐길 수는 없는 걸까? 아, 근데 못하면 즐길 수가 없겠구나. 하루에도 열두 번씩 이랬다가 저랬다가 오락가락하면서 이 기묘한 마음의 근원은 어디일까 쓸데없는 고민에 빠지는 중이다.
내가 아는 축친자(=축구 또는 풋살에 미친 자) 중에 가장 미쳐있고 가장 성실한 친구 L은 처음 입단한 팀에서 (못해서) 민폐를 끼치지 않기 위해 연습이 없는 다른 날에 다른 구단에 가서 추가로(!) 연습을 더 했다고 한다. 또한 내가 아는 친구 중에 가장 팀스포츠를 두려워했던 친구 H는 곧 입단할 팀에 조금이나마 기여하고 싶다며(지금 너무 못해서 자신의 입단이 팀에 폐가 될 것이라고 믿고 있음) 실력을 좀 더 쌓겠다며 동네 풋살아카데미에 다니는 중이다.
이 친구들의 말을 듣고 보니, 내가 너무 아무 생각이 없었구나 싶었다. 물론 나도 '민폐를 끼치면 어떡하지?'라는 생각은 했다. 하지만 그 생각은 풋살 2회차에서 사라졌다. 오예, 공 차는 거 재밌자나? 오예! 그저 공 차는 게 신나서 내가 팀에 어떤 역할을 할 것인가 따위의 걱정은 잊은 지 오래였다. 친구들은 초보 시절에 풋살을 잘하기 위해, 팀에 기여하기 위해 여기저기서 풋살을 배웠고, 나의 초보시절은 그냥 풋살 자체가 재밌어서 여기저기서 풋살을 배우며 흘러가고 있는 것 같다. 현상은 같지만 동력의 결은 조금 다르달까. 와, 나 진짜 해맑다.
...라고 생각했는데 문득 테니스에 임했던 나의 과거가 떠올랐다.
테니스를 배울 때, 사실 나는 테니스를 별로 즐기지 못했다. 같은 동작을 반복하는 레슨이 지루하기도 했고, 어떤 상태가 실력이 나아진 상태인지 잘 인지하지 못했고, 무엇보다 랠리 경험이 없으니 내가 잘하는지 못하는지 수준을 가늠하기도 어려웠다. 레슨을 받다가, 쉬다가, 다시 받을 때면 매번 실력은 리셋되었다. 다시 초보 2개월차로 돌아가는 것이다. 잘하고 싶은데, 잘하려면 동호회에 들어가서 랠리 경험을 쌓아야 하는데, 동호회에 들어가기엔 내 실력이 너무나 미천한 상태라서 엄두를 못냈다. 아, 내가 테니스를 잘 못쳐서 즐기지 못했구나. '재미'를 느껴볼 만한 기본기 자체가 없었구나. 사람들이 운동을 잘하고 싶어하는 이유는 명확했다. 즐기기 위해서였다. 잘하고 싶은 마음은 즐기고 싶은 마음과 같았다. 아이쿠 이런 바보멍청이.
그러나.
잘하고 싶은 마음이 들면 필연적으로 스트레스가 따라온다. 처음 테니스 코트를 예약해 당근 동네모임으로 사람들을 모아 랠리를 했던 날이었다. 라켓을 안 잡은 지 아마 1년도 더 된 시점이었을 것이다. 나는 그날 모인 랠리 멤버들에게 코트비를 받지 않았다(물론 공공시설이라 매우매우 얼마 되지 않는 금액이다). 내가 정말 너무, 너무, 너무, 너무, 너무 못쳐서 랠리가 제대로 진행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여름 정오, 엄청난 땡볕이 내리쬐고 있었고, 한 명이 많이 늦었기 때문에 세 명이서 랠리를 해야 했는데 셋 중 하나(=나)가 테니스를 너무 못쳐서 진행이 잘 안 되니까 그냥 내가 자발적으로 빠지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날의 기억을 떠올리니 정말 접시물에 코를 박고 코를 흥 풀고 싶은 심정이다(이불킥하며 소리 지르는 것보다 접시물에서 코를 풀면 더 재밌을 거 같음). 그날 이후 나는 즉시 레슨을 다시 시작했다. 실력을 키워서 다씌는 이런 수치풀 모먼트를 겪지 않으리라! 다짐하며.
물론 성격상 나는 뭐든 금방 잊는 편이라서 그 뒤로 또 오홍홍 하며 나의 '아무렇게나 랠리'를 즐기긴 했지만 잘하고 싶은 마음이 드는 건 사실이었다. 특히 랠리 멤버의 자세가 너무 멋있고 스트로크가 시원시원하게 뻗는 모습을 볼 때마다 와 나도 저렇게 치고 싶다, 나는 언제까지 이렇게 소심한 스트로크로 겨우 네트나 넘길 셈인가! 랠리 멤버가 멋있어서 박수가 절로 나오기도 하고, 부럽기도 하고, 나도 저렇게 치고 싶은데 안 되니까 성질이 나기도 했다. 레슨을 받으면서도 코치님의 코칭대로 몸이 움직이지 않을 때면 깨나 스트레스를 받았다. 아오, 나는 아무래도 머리랑 몸이 분리된 게 아닐까. 머리로는 이해가 되는데 희한하게 실행이 안 되네...
이런 순간에 현타가 온다. 취미로 하는 운동에 왜 스트레스를 받고 있냐. 근데 바로 이 미약한 스트레스가 운동을 더 재밌게 만들더라. 잘하고 싶은 마음이 없으면, 잘할 수 없고, 잘하지 못하면 즐기지 못하고, 즐기지 못하면 잘할 수 없다. 기존의 취미와는 전혀 다른 차원의 취미를 갖게 된 자가 겨우 깨달은 운동하는 마음이란 이런 것이었던 것이었던 것이었던 것이었던 것이었던 것이다.
PT쌤에게 데드리프트를 가르쳐달라고 졸랐다.
"아니 갑자기 왜요?"
"친구가 막 40kg 든다고 자랑하길래 저도 무게 치고 싶어서요!"
"오케이!"
트쌤은 하루를 데드리프트 집중의 날로 정하고, 종류별로 매우 디테일하게 단계별로 챡챡챡 가르쳐줬다. 진짜 땀이 줄줄 흘렀다. 트레드밀에서 뛴 것도 아니고 그냥 기다란 철봉을 들었다 놨을 뿐인데, 겨우 올바른 자세를 익히기 위한 연습을 했을 뿐인데 땀이 뚝뚝 떨어지다니 와 이거 뭐야 재밌다 신난다. 다음에는 바벨 10kg 추가해달라고 해야지! 할 수 있다! 하고 싶다! 집에 와서 선생님이 그려준 그림을 아이패드에 옮겨 그리며 혼자 맨손으로 복습을 해봤다. 나 이제 웨이트트레이닝도 즐기고 싶은 사람이 된 거 같다. 앗싸. 운동을 취미로 쉬엄쉬엄 목숨 걸고 하는 사람이 어딨어요... 그 사람이 바로 나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