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양사 아닌데, 영양사는 맞아요.(13)
대학원의 꽃은 논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대학원 ‘수료’가 아닌 ‘졸업’을 하기 위해서 채워야 하는 졸업요건 중 가장 많은 시련과 고난을 주는 관문이 바로 ‘졸업 논문’이라는 것에는 모든 대학원 졸업생들이 공감을 할 것이다. 나는 미천한 석사 나부랭이 일뿐이지만, 오늘은 이 졸업논문 때문에 고생했던 이야기를 조금 풀어놔볼까 한다.
어디선가 주워들은 이야기가 있다. 학위별로 졸업할 때의 소감이란다.
학사 왈 “와, 난 이제 모르는 게 없네.”
석사 왈 “와, 난 아는 게 하나도 없네.”
박사 왈 “와, 이래도 잘 모르겠네.”
그러니까, 그냥 내가 다 아는 걸로 하고 학사로 마무리를 짓던지 진짜 제대로 공부해서 박사로 끝장을 보던지 둘 중 하나를 하는 게 심신의 안정을 주는 길이 아닐까 싶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평생 '석사 나부랭이'로 겸허히 살아갈 것이다.
대학원에서 석사과정을 밟던 2년간 다짐했다. 처음 입학할 때 ‘나 혹시 공부를 좋아하는 걸지도..?’라고 생각했던 자신에게 딱콩 아니 명치를 거세게 때려주고 싶은 심정으로 ‘절대, 네버, 에버, 박사는 사람이 할 짓이 아니구나, 난 여기까지가 끝인가 보오.’라고.
이유인즉슨, 바로 논문 때문이다.
앞선 글에서도 언급했듯이, 나는 노인 대상 연구와 관련된 주제로 논문을 쓰기로 결정이 났었고 논문에 사용하기 위해 연구과정 중 모이는 혈액을 분석할 예정이었다. 인생이 내 뜻대로 되지 않는다고들 하는데, 대학원은 내 뜻을 가지는 것조차 사치인 곳이다.
나는 제니 선배와 노인 대상 연구를 1년 남짓 진행을 한 후, 그러니까 내 졸업이 1년 남았을 때부터 혈액 분석을 시작했어야 했다. 예정된 혈액 분석량은 대략 400개 이상이었고 매일 연구실에서 분석을 한다고 해도 한 학기 정도의 연구시간이 필요한 양이었다. 그러면 나머지 한 학기 동안에는 혈액분석을 통해 수집된 데이터를 가지고 통계 프로그램을 돌리는데 모든 시간을 쏟아부어야 했다. 물론 동시에 통계 결과에 대해 관련 참고문헌을 찾고 논문도 작성해야 하니 그리 충분한 시간은 분명 아니었다.
그러나 졸업을 1년 앞두고 모인 혈액량은 150개 정도였다. 우선 노인 대상 연구가 여러 대학교가 함께 하는 공동연구였기에 혈액을 모으는 일은 타 대학교 연구실에서 진행되고 있었는데, 어찌어찌하여 계획되었던 수량보다 턱없이 부족한 양의 혈액 밖에 모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150개 모인 만큼만 분석하면 되지 않느냐고 생각할 것이다. 그럴 수 없었던 이유를 간단히 설명하자면 통계라 함은 기본적으로 최대한 많은 양의 데이터를 분석해야 신뢰성이 올라간다고 할 수 있다. 똑같은 가설을 검증하기 위해 10명에게 실험한 결과와 1,000명에게 실험한 결과가 있다고 치자, 어떤 결과를 더 신뢰할 수 있을까.
150개 모인 혈액을 분석해 논문을 내는 것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나 교수님께서는 해당 데이터로 ‘SCI급’의 논문이 나오기를 원하셨기에 나는 선택을 해야 했다.
‘(그놈의) SCI급 논문을 쓰기 위해 혈액이 모아지는 것을 기다리며 졸업을 한 학기 미룰 것인가 혹은 새로운 SCI급 논문이 나올 주제를 스스로 찾아 논문을 쓰고 원래대로 졸업을 할 것인가.’
지금까지 내 글을 꾸준히 읽어온 독자님들이라면 내 성향을 대충 파악해 눈치챘을 것 같다. 내가 대학원에 들어간 이유는 오직 취직을 위해서였으며, 학업에는 큰 뜻이 없었고 앞으로 박사를 한다거나 이 분야에 한 획을 그을만한 업적을 남기고 싶다거나 하는 포부 따위 가져본 적이 없었으니 당연히 오랜 고민 없이 후자를 택했다.
사실 이런 결정을 내렸을 때 선배들은 적잖이 우려의 목소리를 냈다.
본 : 언니, 혈액 때문에 한 학기나 더 기다리는 것도 등록금도 내야 하고 시간도 걸리고 곤란한데, 다른 선택지가 언니 스스로 논문 주제 찾는 거라니.. 이건 더 가혹하지 않아요?
제니 : 맞아요. 논문 주제 찾는 거 지금 잠깐 상상만 해도 진짜 막막해요.
본 : 교수님이 오케이 할 만한 논문 주제를 진짜 어떻게 찾아요.. 그리고 언니가 따로 분석할 데이터도 없어서 그것도 찾아야 할 텐데..
제니 : 그냥 뗏목 주고 태평양 한가운데 던져지는 거 같은 느낌이야.
선배들의 말에 내가 택한 선택지가 얼마나 무모한 짓인지 살짝 깨달아 아차 싶었으나, 곧 죽어도 대학원에 한 학기 더 옭아매 지기는 싫었으니 나 스스로 탈출구를 찾는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나는 태평양 한가운데서 뗏목을 타고 물속에 숨어있는 보석을 건지기 위한 대장정을 시작했다. 먼저, 내가 논문에 사용할 수 있는 데이터는 공공데이터뿐이었으니 국민건강영양조사 자료를 참고하였다. 그리고 논문 주제를 선정하기 위해서 남들이 설정하지 않은 가설을 찾으려고 수백 개의 국내외 논문들을 뒤지며 읽어보기 시작했다. 대학원 수업을 듣고 실습을 하면서 졸업 시험을 준비하고 새로운 논문 주제를 찾는 일까지, 분명 쉽지 않았다.
"자, 다음 발표할 사람?"
"교수님, 저 논문 주제 조사한 것 발표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논문 주제를 교수님께 컨펌받기 위해 매주 새로운 주제를 찾아 랩 미팅 시간마다 발표를 했다.
"그래서 네가 증명하고자 하는 가설이랑 저 논문이랑 뭐가 달라?"
"저는 폐경 전후로 나누어서 비교를 해보고 싶습니다."
"폐경 전후 여성에게서 저게 중요한 영양소래? 그리고 중요하다고 해도 논문이 이미 있는 건 아니고?"
"제가 찾아본 바로는 없는 것 같습니다."
"같다는 건 덜 찾아봤다는 이야기네? 더 찾으면 나올 것 같은데? 다른 주제 찾아와~"
그간의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는 건 15분 남짓이면 충분했다. 이렇게 매번 이리저리 머리를 굴려 찾아낸 주제를 거절당할 때마다 시간낭비라는 생각이 들었다.
논문 주제로 채택되기 위해서는 세상에서 어느 누구도 발표한 적이 없는 주제여야 하는 것이 첫 번째 숙제였고, 과학의 발전에 기여할 만큼 중요한 분야를 찾는 것이 두 번째 숙제였다. 임상영양과 관련된 의학용어가 잔뜩 들어가 있는 논문들을 수도 없이 읽으면서 내가 과연 똑똑하신 박사님들 보다 뛰어나서 저 두 가지 숙제를 풀 수 있는 논문 주제를 찾을 수 있을지 곰곰이 생각해봤다. 여전히 나는 학문에 큰 뜻이 없었고, 빨리 졸업해 임상영양사가 되어 취직을 하는 것이 목표임에는 변함이 없었다. 그래서 교수님을 찾아가 솔직히 말씀드렸다.
"교수님, 저 SCI 논문 쓰는 것 포기하겠습니다."
"그래~"
'얼레. 머선 일이고.'
"그럼 저.. 지난번에 마지막으로 발표했던 주제로 논문을 써도 될는지.."
"그래~"
그렇게 나는 생각보다 쉽게(?) '졸업'을 하기 위해 찾아낸 주제를 가지고 논문을 쓰기 시작했다. 이후 논문을 쓰는 과정을 간단히 설명하자면 통계분석을 통해 나온 결과를 랩 미팅 시간마다 발표를 하고 박사들과 교수님의 의견에 따라 변수를 조정해 새로운 통계를 돌린다. 그리고 결과값에 대해 해석을 뒷받침할만한 근거 논문을 찾고 그것들을 참고해 다시 통계를 돌리고 또 돌리고, 돌리고~ 무한반복을 하다 이 정도면 논문을 쓸만한 결과가 나왔다 싶을 때 본격적으로 논문을 쓰기 시작한다. (이 판단은 교수님께서 하신다.) 더 자세한 이야기는 쓰고 싶지도 않고 궁금하지도 않을 것 같아 이하 생략하겠다.
대학원 생활이랄께 참 별것이 없다. 그래서 그런지 2년 동안의 기억이 거의 없다. 어쩌면 잊고 싶었던 기간이었기에 머릿속에서 의도적으로 부분 삭제를 해버린 걸지도 모르겠다. 우여곡절 많던 대기업 영양사 이야기를 마무리하고 대학원 이야기를 써야 하는 요즘은 무슨 이야기를 써야 하는지 참 답답하기만 하다. 분명 뭘 많이 한 것 같은데 기억에 남는 일이 그다지 없는 것을 보면 대학원을 다니는 내내 정말 공부만 열심히(?) 했나 보다. 아무튼 나는 빠른 졸업을 위해 논문 주제가 선정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3학기에 논문을 마무리했다. (내 자랑을 좀 하자면, 졸업논문을 쓰지 못해 수료 후 다시 연구실로 돌아오는 선배들도 있었으니 졸업을 한 학기나 남겨두고 논문을 마무리했다는 것은 엄청난 일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남은 한 학기 동안은 병원에서 실습만 했다.(실습은 3학기부터 시작해 1년간 실시했다.)
논문 이야기만 하고 글을 끝내면 너무 재미없으니까, (사실 내가 글 쓰면서 너무 재미가 없어서) 실습 이야기를 해야겠다. 임상영양학을 전공하게 되면 480시간 동안 병원에서 실습을 하게 된다. 나와 내 동기들도 학교의 부속대학병원에 가서 실습을 했다. 병원에 가자마자 가장 먼저 시작한 일은 의사의 처방에 의해 치료식을 먹게 되는 환자에게 찾아가 치료식이란 어떤 식사인지, 주의사항은 무엇인지, 식사량은 어떠신지 등 설명을 하는 일이었다.
"OOO 환자분~"
"아, 네. 안녕하세요."
중년의 남성분이셨고 누워계시다 하얀 가운을 입은 나를 보고 몸을 벌떡 일으키셨다.
"안녕하세요. 영양팀인데요."
"네? 어디요?"
남자 환자의 표정에서 느껴졌다. 불쾌함.
"영양팀이요."
"아, 말씀하세요."
이내 다시 병상에 눕는 환자분을 보고 익숙한 듯이 설명을 이어갔다.
"환자분 오늘부터 당뇨식 드시고요. 아침에 잡곡밥으로 나왔나요?"
"예? 예. 저 잡곡밥 싫고 흰밥으로 주세요."
"네. 과일이나 우유가 하루에 한 번씩 나오는데요."
"아, 알아요."
역시나 귀찮다는 듯이 나의 말을 끊는 남자 환자분.
"네. 그럼 불편하신 점 있으시면 간호사 선생님께 말씀해주세요."
병원에서 영양사의 위치가 그리 좋지 못하다는 것은 실습을 하면서 알았다. 하얀 가운을 입은 나를 보고 주치의라고 생각했던 환자는 예의를 차리며 자리에서 일어나 앉았지만 영양팀이라는 이야기를 듣자마자 거들떠도 안 보겠다는 것을 온몸으로 표현했다. 실습 초반에는 이런 환자를 만나면 매우 당황스럽고 약간의 수치심도 느꼈었더랬다. 하지만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니 어느새 나는 스스로 행동을 조심하게 되었다.
"ㅁㅁㅁ환자분~"
6인실에 들어가 병상 이름을 확인하니 그 자리에만 홀로 커튼이 처져 있었다.
"안녕하세요. 영양팀에서 왔습니다."
역시나 내가 주치의이거나 담당 간호사였다면 조금 더 자신 있게 커튼을 열고 인사를 했겠지만, 앞선 환자의 만행으로 더 조심히 행동했다.
"아. 안녕하세요~"
살짝 커튼을 치고는 내 또래의 여성분이 나를 반겼다.
"오늘부터 멸균식 드시고 계시고요. 해당 식사 드시는 경우 외부 음식은 특히 주의해주셔야 합니다."
"저 요거트 먹으려고 했는데 괜찮은가요?"
환자는 자기가 먹으려고 하던 음식을 보여주며 근심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요거트는 유산균 때문에 드시면 안 되고, 개별 포장되어있는 멸균 음료 같은 것도 뜯자마자 드시고 먹다 남긴 것은 바로 버려주세요. 식사량은 어떠세요?"
"식사 잘 먹고 있어요. 멸균식이라 익힌 것만 나오는 거죠?"
"네. 아무래도 채소나 과일도 그렇게 나오다 보니 입맛에 안 맞으시진 않으신가요?"
"사실 맛은 없는데 그래도 다 그만큼 먹어야 하는 양이고 저 항암치료 때문에 그렇게 먹으라고 주시는 거잖아요. 신경 써서 주시는 건데 다 먹어야죠."
"그렇게 생각해주시니 감사하네요. 혹시 식사하시다 불편하신 것 있으시면 저희 여사님들이나 간호사 선생님께 말씀해주세요."
"네. 감사합니다~"
영양에 대해 무지해 의학적 치료만이 병 치료의 전부라고 생각하는 환자가 있는가 하면 이렇게 먹는 것도 치료의 일환으로 여기고 병을 이기기 위해 노력하는 환자도 있다. 어떠한 병이든 식사를 잘하는 것이 중요하고 특정 질병에서는 식사를 신경 써서 하는 것이 중요한데 (특정 영양소를 제한해야 하거나 점도나 식감을 조절해야 하는 경우 등) 대게 3차 병원에 입원한 환자들의 경우 퇴원을 하고 나서도 식사조절을 해야 하는 경우가 왕왕 있다. 그래서 (이것은 사족인데) 영양팀에서 차려주는 치료식이 맛없다고 탓하기보다는 퇴원 후 스스로 혹은 가족을 통해 챙겨 먹기 전 병원에서 알려주는 교과서라고 생각하고 잘 드시기를 바란다.
그리고 또 다른 업무는 새로 입원한 환자 중 '영양불량'으로 분류된 환자에게 찾아가 영양상태 평가를 위한 조사를 실시하는 것이었다. 어려운 전문용어는 다 빼고 간단히 설명하자면 차트를 보고 환자의 병명과 약물력 등을 조사한 후 식사와 관련된 사항을 환자 혹은 보호자를 통해 조사를 하고 영양상태가 불량하여 의학적 치료에 있어 영양팀의 개입이 필요한 환자인지 판단하는 과정이다.
"안녕하세요. @@@환자분 맞으시죠?"
"네~"
안경을 쓰시고 옆으로 누워 티비를 보시며 인상 좋은 중년 남성분이 대답을 했다.
"오늘 아침에 식사 나온 것은 얼마나 드셨나요?"
"오늘 나온 것은 다 먹었어요. 맛있던데~ "
유쾌하신 환자 분이셨다.
"혹시 식사하는 데 있어서 평소에 불편하셨던 부분이 있을까요? 복통이 있었다거나 변비, 설사 이런 거요."
"아, 병원 오기 전에 배가 너무 아파서 살이 막 쭉쭉 빠졌었거든요?"
"혹시 얼마 만에 몇 킬로 빠지셨는지 아세요?"
짧은 기간 동안 몸무게 저하가 많이 일어나면 환자의 영양상태가 위험하다는 징조이기에 이런 부분은 자세하게 조사를 한다.
"한 달 만에 한 7~8킬로? 아니 배가 너무 아파서 밥을 하나도 못 먹어서 그랬어요. 밥만 먹으면 진짜 배가 너무 아파서."
안 그래도 환자분은 전체적으로 많이 왜소해 보이셨다.
"근데 내가 여기 병원에 ###선생님하고 친분이 있어서 연락을 했지. 그랬더니 빨리 병원에 와보라고 하더라고요? 어제 검사 싹 하고 오늘 아침에 약을 두 알 줬는데. 그거 먹으니 배가 하나도 안 아픈 거야, 그래서 아침에 나온 밥 다 먹었죠."
환자분은 비스듬히 누운 채로 발을 까딱거리며 허허 웃으셨다.
"아, 그러시구나."
내가 이렇게 대답을 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환자를 만나러 병실에 들어오기 전 차트에서 적어온 병명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마 그냥 장염이나 뭐 그런 거였던 것 같아. 그렇죠? 선생님?"
"하하. 환자분 그럼 입맛은 어떠세요?"
"입맛 좋죠~ 오래간만에~ 배가 안 아프니 먹어서 좀 살겠어요. 저 곧 퇴원하는 거죠?"
나는 어떠한 대답도 해드릴 수가 없는 질문이기도 했고 아무래도 자신의 병명을 알고 싶어 하는 것 같아 나머지 조사를 빠르게 조사하고 병실을 나섰다. 환자분의 병명은 '대장암'이었다.
이 외에도 소아과부터 중환자실까지 병원 전체를 아우르며 여러 환자들을 만났다. 대학원을 졸업한 지 3년이 지났지만 내가 실습을 하며 만났던 환자분들과 보호자 분들 모두 건강하게 치료를 마치고 기쁜 마음으로 퇴원하셨기를 바란다.
'영양사 아닌데, 영양사는 맞아요.' 매주 목요일 업데이트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