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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부리 May 06. 2021

내가 대기업 영양사 때려친 후 선택한 직업

영양사 아닌데, 영양사는 맞아요.(11)


회사를 다니는 모든 직장인은 늘, 항상, 언제나 말한다.

징글징글한 알람 소리에 어쩔 수 없이 눈 뜬 아침에, 지옥 같은 지하철을 탄 출근길에서, 사무실을 합법적으로 뛰쳐나갈 수 있는 점심시간에도, 춘곤증이 없어도 무조건 나른한 오후 3시에는 더더욱, 학창 시절엔 있고 이제는 없는 쉬는 시간 때문에 나만의 시간을 가지러 떠나는 화장실에서, 창 밖의 날씨가 좋아도, 천둥, 번개, 비바람이 몰아치거나 진눈깨비가 와서 질퍽해진 퇴근길에서는 짜증 난다는 듯이, 저녁 먹을거리를 사기 위해 열어본 지갑에 든 거라곤 지난달 갚아야 할 채무만 쌓여있는 카드 몇 장과 구겨진 영수증이라는 것을 확인할 때마다, 오늘도 무사히 돌아온 집 현관문 앞에서도.


'집에 가고 싶다.'

어쩌면 가끔은 집에 있는데도 집에 가고 싶을 때가 있다.


그래서 난 집에 완전히 갔다. 퇴사를 하니 집에 있을 수밖에 없어서 좀 행복했다.

퇴사 후 처음 맞이한 평일 오전은 말 그대로 헤븐(heaven). 창문을 열어두니 가끔씩 지나가는 자동차 소리와 행인들의 수다 소리를 배경음악 삼아 오전 내내 핸드폰만 깨작거리다 허리가 아파 일어났더니 점심시간이 다 되어갔다.


'지금쯤 업장에선 배식준비를 시작했겠군. 난 집에 있는데. 룰루~'


살짝 허기가 찾아와 열어본 작은 냉장고 안에 사람이 먹을 만한 것은 물이 전부였지만, 그래도 행복했다.


'편의점 가서 먹을 것 좀 사 와야지~'


슬리퍼를 질질 끌고 나온 나는 터벅터벅 집 근처 편의점으로 향했다. 걸어가다 상점 유리에 비치는 내 모습은 마치, 백수 같지. 아니지 진짜 백수 맞지. 대낮에 이렇게 길을 거닐어 보니 생각보다 사람이 많아 신기했다. 대부분 대학생처럼 보였다.


'와, 나도 저럴 때가 있었는데. 다시 대학생 하고 싶다~'


나의 글을 꾸준히 정독하는 구독자분들은 잘 아시겠지만(), 편입에 실패한 후 복학을 하고 꽤나 열심히 학업에 매진했었더랬다. 덕분에 공부하는 재미를 깨달아 아주 잠깐 대학원을 갈까 고심한 적이 있었다. 그때만 해도(지금은 절대 아니란 소리다.) 공부가 재밌어 보였다. 대학교 학생식당에서 일했던 터라 도서관에서 공부를 하다 밥 먹으러 온 학생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나도 다시 공부하고 싶다.'라는 생각을 종종 하곤 했다. 구체적으로 어떤 공부를 할지 정해놓은 것은 없었지만 막연히 대학원에 가보면 어떨까 싶었던 생각이 다시 스멀스멀 기어 나오기 시작했다.


'흠, 머 먹지~ 컵라면 먹어야지~'


나이가 들었는지, 아니면 내적 행복이 충만해서 인지 모든 말에 멜로디가 들어가 있었다. 흥얼거리며 편의점 봉지를 덜렁 들고는 자취방으로 돌아왔다. 라면 물을 받아놓고 얼굴책에 들어가서 눈팅을 하기 시작했다.


'와~ 얘는 여기 놀러 갔네. 좋아 보인다. 부럽다~'


'오? 이거 나 사고 싶던 건데, 얘는 바로 샀네. 돈 많은가 봄.'


'이 옷 이쁘다. 이건 얼마나 하나. 윽, 너무 비싸다..'


역시 SNS가 주는 상대적 박탈감이란 엄청나다. 퇴사를 제대로 만끽한 지 반나절만에 퇴사를, 아니 돈을 더 이상 벌지 못하는 것에 대해 살짝 후회했다.


'흠. 안 되겠다. 뭐라도 해야지.'


성질도 급하지. 나는 아무래도 안 되겠어서 빨리 다음 취업을 위해 구직사이트에 들어갔다. 라면을 먹으며 구직사이트를 이리저리 둘러보다 보니 막막함이 밀려왔다. 다시 대기업에 들어가고는 싶고, 단체급식 영양사는 하기 싫으니 식품 전공자를 뽑는 다른 직종의 채용공고를 확인했다. 그래도 식품 전공자로 나름 있을 자격증은 다 있다고 자부했는데, 새로운 직무를 지원하기에는 그렇다 할만한 메리트가 없어 보였다. 영어점수도 만료되어 다시 시험을 봐야 했고, 기사 자격증이 하나 있으면 좋을까 싶어 식품기사 자격증을 따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때 마침 아빠에게 전화가 왔다.


"응~ 아빠!"

"뭐 하고 있었어?"

"그냥 라면 먹고 있었는데?"

"라면? 점심이야? 새부리야~ 제대로 챙겨 먹어야지, 어이구~ 삐쩍 말라가지고~ 그렇게 먹으니까 맨날 아프다 그러지~"


아빠한테 난 병자인가 보다.


"아니거든~ 아빠, 나 마른 거는 엄마 닮아서 선천적으로 그런 거야. 내 탓 아니다~"

"어이구 잘났어~ 근데 너 거기 자취방 언제 까지지?"


올 것이 왔군. 좌천이라니..!


"나 여기 두 달 남았나? 왜? 나 내려오라고? 힝.."

"너 거기서 뭐 하는 것도 없잖아.(정곡을 찔렸다.) 내려와야지. 집에서 취업 준비해 다시~"

"아니, 그래도 아빠. 취업준비는 서울에서 해야 돼. 그래야 학원 다니기도 편하고~ 또~"

"월세는 누가 내는데~"


윽. 졌다.


"맞아. 나 돈 없어. 엉엉"

영양사로 근무한 1년 반 동안 모은 돈이라곤 고작 몇백만 원이 전부였다. 그도 그럴 것이 6개월 인턴을 하며 100만 원 언저리를 받았던 월급은 저축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했고, 나머지 정규직 기간 동안은 스트레스를 돈으로 푼다며 펑펑 쓴 덕분에 모은 돈이 얼마 안 됐었다. 아! 오해할까 봐 하는 말인데, 대기업 영양사의 월급은 일반 대기업 사원과는 차원이 다르게 적다.(강조!) 그냥 일반 중소기업 사원 정도의 월급을 생각하면 될 것 같다. 그러니까 내가 돈을 안 모은 것도 있지만 애초에 급여가 짜다는 말을 하고 싶은데 변명이자 핑계라고 해두자. (근데 진짜 짜긴 짜다.) 아무튼 모은 돈으로는 서울에선 월세며 생활비로 아껴 쓴다 해도 3~4개월 버티면 잘 버티는 정도.


"공부할 거면 언니 분당 자취방에 들어가 살던가."

"오? 정말? 그래도 돼? 언니가 나랑 같이 살아도 된데?"

"너네 언니한테 물어봐~ 네가 정 서울에서 공부하고 싶으면 언니한테 부탁해서 같이 살던가 해야지."

"아싸~! 알겠어요~!"

"밥 좀 잘 챙겨 먹어!"


아버지의 애정 섞인 잔소리를 끝으로 통화를 마무리하고 언니에게 전화를 했다.


"언니~ 뭐해?"

"왜~ 너 우리 집 와서 살라 그러지?"

"어! 아빠가 벌써 말했어?"

"그래. 너 우리 집 데리고 들어가서 같이 살라고 아빠가 말했어, 이미."

"뭐야, 아빠 벌써 언니한테 다 말해놓고 나한테 전화한 거였네~ 헤헤"

"나 거기 오피스텔 보러 갈 건데 같이 가 그럼, 너도."


그렇게 나는 서울 생활을 잠시 잠깐 접고, 일보 후퇴하여 분당으로 내려가게 되었다. 본격적인 재취업을 위해 토익시험을 다시 보고 식품기사 자격증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기사 자격증은 이론, 필기, 실기 총 3번에 걸쳐 시험을 나눠보았고 강원도의 한 대학교에 가서 실기 시험을 치렀던 기억이 생생하다. 두 가지 실험을 진행했는데, 얼마나 긴장이 되었는지 손이 달달 떨렸지만 무사히 통과를 했다. 그렇게 식품기사 자격증을 따고 나서 여기저기 원서를 내보았지만 반복되는 낙방으로 과거의 기억이 떠올라 불안함이 생기기 시작했다.


한편으론 대학원을 알아보고 있었다. 식품영양학과 대학원에는 여러 세부 전공이 있다. 조리, 위생, 미생물, 기능성 식품 등 그중 내가 고려했던 전공은 '임상영양학'이었다. 임상영양대학원을 가게 될 경우, 대학병원에서 일할 수 있는 임상영양사 자격증을 취득할 수 있게 된다. 물론 대학원 졸업 후 자격증 시험을 보기 위해 1년의 영양사 경력이 필요하고 시험에 합격을 해야만 대학병원에서 일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대학 졸업 직후 임상영양대학원에 진학하는 경우, 졸업 후 1년간 대학병원 인턴 영양사를 수련하고 임상영양사 자격증 시험을 보게 된다. 이후 대학병원 영양팀에서 근무를 하며 환자식을 제공하기도 하고 식사요법이 필요한 질환에 대한 영양상담과 교육을 진행하는 등의 업무를 하게 된다. 이렇듯 임상영양사는 영양적 지원을 통해 입원환자의 평균 재원일수를 감소시키고 영양치료로 수술 후 회복 및 수술 효과를 극대화하는 등 의료진들의 의료적 치료를 돕는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 임상영양사는 생각보다 티 나지 않게 중요한 역할을 하는 존재이다.


일반 영양사도 학과 과정 중 질환별 식사요법에 대해 배우지만 위에서 언급한 활동을 하기 위해서 임상영양대학원을 다니며 영양치료와 상담 및 교육, 식사요법 외에도 임상영양연구, 병태생리학, 약물과의 상호작용 등을 배우며 보다 고차원적인 수업을 듣게 된다.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학부 때 임상영양학 과목을 가장 싫어했다. 그런데 임상영양대학원을 알아보다 보니 공부하기엔 어렵긴 하지만 사명감을 가지고 일 할 수 있는 직업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무엇보다 '대학병원'이라는 특정한 곳에 취직을 할 수 있어서 일반 회사를 들어가기 위한 수백 대 일의 경쟁률을 조금 낮출 수 있지 않을까 싶은 전략적 사고의 결과였다고나 할까.


그렇게 몇 군데 서울 소재 대학원을 알아본 후 원서를 접수했다. 내가 대학원을 고를 때 기준은 첫 번째 당연하지만 훌륭한 연구실적을 보유한 교수님이 계시는 곳, 두 번째 부속대학병원이 있는지, 세 번째 풀타임으로 근무할 수 있는 연구실 일 것. 위의 세 가지 조건에 부합하는 대학원에 원서를 접수했다. 그리고 가장 가고 싶던 대학원의 교수님께는 따로 컨텍을 하여 사전 면담을 나눴다. 생각보다 대학원에 입학하는 것은 취업하는 것보다 어렵지 않았다. 계속된 서류와 면접에서의 탈락으로 취업에 대한 기개가 잔뜩 꺾여있던 터에 공부하기로 마음먹었을 때 빨리 대학원에 와서 공부를 하라는 교수님의 조언에 홀딱 넘어가 대학원으로 진로를 확정했고 나는 28살이란 적지 않은 나이에 대학원에 그리고 연구실에 들어가게 되었다.


연구실에 첫 출근 하는 날. 잘 나가던 대기업 영양사를 때려치우고 늦은 나이에 입학한 대학원 신입생으로 누구보다 뛰어난 대학원 생활을 하고 싶었다. 다만 걱정되었던 부분은 내가 나이가 가장 많을 것 같아서 어린 선배들과 동기들이 나를 어려워하지 않았으면 하는 것이었다. 게다가 연구실은 대부분 여자일 것이고, 경계가 심한 족속이다. 더욱더 관계에 신경을 쏟아야 한다.


연구실에 도착했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빈 실험대와 각종 실험기구들이 돌아가는 소리만 들릴 뿐 아무도 없었다. 연구실 출입문 반대편에 다른 문이 열린 채 안에서 사람의 기척이 느껴졌다. 살금살금 걸어 들어가 열린 문에 노크를 했다.


"실례합니다..."


방 안쪽에는 양쪽 벽을 바라본 채 열댓 개의 책상이 줄지어 있었고 자리마다 선배들이 앉아있었다. 이건 아주 나중 이야기인데 한 번은 학교에 미국에서 저명한 교수 한 분이 오셨었다. 그때 우리 교수님께서 그분을 데리고 연구실 소개를 했는데 미국 교수님은 한국의 대학원생들이 어디서 학업에 정진하고 연구에 몰두하는지 궁금하다고 하셨다. 그리곤 연구실 방에 들어와 우리가 앉아있는 모습을 보고 너무나 대놓고 허망한 표정을 지으며 이런 멘트를 했던 기억이 난다. "왓.. 더..."


아무튼 개중 몇몇의 시선이 느껴졌고, 한 명이 문 앞으로 마중을 나왔다.


"안녕하세요. 신입생?"

"네."

"여기 잠깐 앉아계시면 신입생분들 다 오시고 나서 OT 할게요."


방조교의 짧은 안내를 끝으로 문가자리에 앉아 잠시 얼굴 모를 동기들을 기다렸다. 나를 포함 동기는 총 4명. 당연히 모두 나보다 한~참~ 어린 친구들이었다. 실험대에 앉아 다 같이 연구실 소개를 들었다. 소개를 듣다 보니 연구실에는 자체적인 몇 가지 룰이 있었다. 나이가 적든 많든 선배에게는 '선배'라는 호칭을 사용할 것. 선배보다 점심시간에 먼저 밥 먹으러 가지 말 것. 선배보다 먼저 퇴근하지 말 것. 그러니까 퇴근시간은 공식적으로 6시이지만 6시 15분 이후에 퇴근할 것. 혹여나 선배보다 먼저 퇴근할 경우 가장 안쪽에 앉아있는 (최고참 되시겠다.) 선배에게 들어가서 인사를 하고 퇴근할 것 등등. 이게 뭐람? 회사도 아니고(회사도 그 정돈 아닌데) 연구실에서 저런 것을 강요한다는 것이 좀 황당하기도 했다. 연구실 소개가 끝난 후, 동기들끼리 모여 앉아 서로 소개를 하며 이야기를 나누던 중 선배 몇몇이 나와 우리에게 먼저 말을 걸었다.


제니 : 안녕하세요~ 무슨 이야기 하고 있었어요?

횬 : 궁금한 것 많죠? 다 물어봐요! 연구비 얼마 주는지 이런 것도 물어봐도 되는데~

제니 : 아, 저는 2기고 여기 횬선배는 3기예요.


두 선배는 체면치레를 할 것 같았던 선입견과는 다르게 먼저 다가와 살갑게 인사를 건네주었다. 연구실에서는 이렇게 학년을 대신 학기로 구분하게 되는데 그만큼 한 학기의 차이가 크다는 의미이다. 무튼 이왕 이렇게 된 것 솔직하게 물어보기로 했다.


새부리 : 저희 퇴근이 6시 15분이라고 하던데.. 정말인가요?

횬 : 아.. 그거 좀 말이 안 되긴 하는데 다들 그러고는 있어요.

제니 : 저희도 일찍 가고 싶거든요? 그런데 눈치 보여서 못 가요, 진짜.

새부리 : 그럼 퇴근할 때 들어가서 인사도 꼭 하고 가야 해요?

횬 : 그게 제일 싫죠! 그래서 차라리 선배들보다 늦게 가는 게 나을 때도 있어요.


정말이구나. 저런 걸 다 억지로 지키고 있구나. 누구 좋자고 이런 걸 만들어서 시작한 걸까? 안타깝게도 내가 제일 싫어하는 것 중에 하나가 정해진 출퇴근 시간외에 불필요한 룰을 만들어 속박하는 것이다. 영양사 때도 이런 비슷한 일이 있었다. 인턴 때 나는 8시까지의 출근시간에 맞춰 45분~50분 사이에 출근을 했고 내 위에 계시던 실무 영양사님은 항상 나보다 먼저 와 계셨다.


"영양사님 아직 사회생활 처음 하는 거라 잘 모르는 것 같아서 해주는 말인데, 8시 출근이면 웬만하면 7시 30분까지는 와서 나보다 먼저 준비하고 있어야 돼요. 나도 내 위에 실무 영양사님 계실 때 그랬거든요?"


그래서 그 이후로도 나는 꾸준히 45분~50분 출근을 지켜왔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지각을 하는 것도 아니고 업무에 차질이 생기지도 않았다. 실무 영양사님은 충고를 듣지 않는 내가 다소 미웠을 수는 있었겠지만 이후에 실무 영양사님의 출근시간도 초반보다 다소 느슨해졌던 것은 나의 착각이었을까.


아무튼 회사보다 더 심각한 룰이 대학원에 있었다. 하지만 우리 동기들은 한마음 한뜻이 되어 (어쩌면 왕언니인 나를 방패 삼아) 매일 6시가 되면 다 같이 자리에서 일어나 "들어가 보겠습니다."라는 단체 인사를 남기고 홀연히 퇴근을 해버렸다. 반복되는 우리의 행동에 어느덧 선배들도 6시 칼퇴를 하게 되었고, 결국 이 룰은 자연스레 사라지게 되었다. 누구를 위한 룰이었던가.


그렇게 나의 탈영양사 계획 2탄은 단체급식 영양사를 벗어나기 위해 살짝 노선을 틀어 다른 방향으로 순항하는 듯 보였다.




'영양사 아닌데, 영양사는 맞아요.' 매주 목요일 업데이트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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