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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부리 Apr 01. 2021

인턴영양사 첫 출근, 정규직 안하면 안되나요?

영양사 아닌데, 영양사는 맞아요.(6)


드디어 디데이가 되었다. 오늘부터는 본격적으로 업무를 시작하는 진정한 '첫 출근'이다. 첫 출근 복장은 나 역시도 신입 사원답게 블랙 앤 화이트 치마 정장에 왁스와 스프레이로 중무장한 정갈한 올빽머리를 하고(제발 그러지 마.) 7 센티 굽의 검은색 구두를 신고 사무실로, 업장으로, 교직원 식당으로 향했다.


늦지 않아야겠다는 이성으로 뒤돌아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 하는 감성을 달래며 업장에 도착했다. 조리실은 이미 서걱서걱 채소들이 썰리며 도마와 칼이 부딪히는 소리, 접시와 그릇들이 달그락 옮겨지는 소리, 솥에서 끓어오르는 육수가 부글부글 끓는 소리로 가득 차 있었다. 여느 가정집 부엌에서 듣던 소리보다 육중한 듯 무게감이 느껴지는 소리들을 뒤로하고, 작고 소중한 사무실로 향했다.


'똑똑'


“안녕하세요.”


음..? 사무실 문 너머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돌아오지 않았다.


'똑똑'


'아무도 안 계시나.. 흠.. 8시 출근 맞는데, 지금 시간이.. 7시 45분.. 뭐지..?'


"영양사님~ 인턴 선생님 오셨다~"

그때 여사님 한 분이 나를 발견하시고 보이지 않는 곳에 계시는 영양사님에게 나의 출근을 알렸다.


"오셨어요? 참 사무실 비밀번호 모르죠?"

"안녕하세요."

"들어가서 가운 갈아입고 신발도 갈아 신고 조리실로 오세요!"

그리곤 다시 조리실로 사라져 버렸다.


그런 영양사님의 뒷모습을 보고 나니 나도 정신이 바짝 들면서 행동이 재빨라졌다. 입고 온 정장 재킷을 회사 마크가 박힌 하얀색 가운으로, 7센티 구두도 미끄럼 방지용 안전화로 갈아신었다. 집에 가자마자 치마도 블라우스도 고이 옷장에 처박아 둬야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그리고 걸음을 재촉해 조리실로 향했다.


셰프 모자를 쓴 실장님은 큰 솥에 육수를 끓이며 갖은양념을 넣고 계셨고, 커다란 식기세척기에서는 아침에 사용한 것 같은 조리도구들을 여사님께서 받아 정리하고,  또 다른 여사님은 선반에서 오늘 나갈 김치와 깍두기를 밧드(업소용 스테인리스 그릇, 깊이가 깊고 직사각형이며 뚜껑이 있다.)에 옮겨 담고 계셨다.  


이후에도 출근할 때마다 조리실은 늘 아침 일찍부터 부산했다. 조리실이야 말로 학교의 아침을 가장 먼저 깨우는 곳이다.

   

“인턴 선생님, 이리 오세요."


급히 부르는 영양사님의 소리에 나는 실온 창고로 향했다.


"여기 보면 오늘 들어온 식재료들이에요. 유통기한 잘 보이게 적고 보관방법 확인하셔서 선입선출, 뭔지 알죠? 맞게 정리해주시면 돼요."


역시나 쏜살같은 속도로 업무를 알려주시고는 사라지신 영양사님. 랙 위에 널브러져 있는 식재료(대부분 양념류 였다.)를 보다 보니 그 순간부터 외딴섬에 있는 갇힌 것처럼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때 마침 한 여사님께서 널찍한 바퀴 달린 트레이를 밀며 들어 오셨다.

"안녕하세요~ 쌀 좀 가져가요. 오늘 기장조 남은 것 다 씁니다~"


"네..!"


어리둥절했지만 우선 대답부터 했다. 여사님은 20kg나 되는 쌀포대 5개를 가뿐하게 옮기시고는 유유히 사라지셨다. 다시 한번 크게 심호흡을 하고 검이라도 뽑듯이 검은색 매직의 뚜껑을 비장하게 딱! 하고 여는 순간, 다른 여사님께서 들어오셨다.

"영양사님, 안녕~ 여기 오늘 고춧가루 뜯은 거~"라며 포장지를 쥐어주고 떠나셨다.


음, 반갑다는 표현인가. 어찌할 바를 몰라 고춧가루 포장지를 창고 한쪽에 고이 모셔둔 채 일을 시작했다. 하나하나 유통기한을 적으며 정리하던 중 "조회할게요~"라는 소리가 들렸다. 밖을 확인하니 점장님이 와계셨다.


"안녕하십니까"


"첫 출근이라고 정장 입고 왔구나~ 불편할 텐데. 내일부터는 편하게 입고 와요. 어차피 가운 입을 거니까~”


점장님의 쾌활한 목소리로 첫 아침 조회가 시작되었다.


"먼저 새 식구 소개부터 할게요. 이번에 새로 온 인턴 영양사님.(꾸벅) 우리 실장님, 조리사님, 찬모님, 밥모님, 홀 담당 여사님, 퇴식구 맡아주시는 여사님, 있다가 배식하러 몇 분 더 오실 거예요. 그땐 영양사님이 인사 좀 시켜주시고."


먼저 들어와 가뿐히 100kg 쌀을 가지고 나가셨던 여사님은 '밥모님'이셨다. (처음 밥모님이라는 말을 이해 못해서 '반모'님인 줄 알았다. 여사님들 중 부반장 느낌이라 반장은 아니니 절반을 의미하는 '반'모님인 줄..) 말 그대로 밥을 담당해주시는 여사님을 밥모님이라고 한다. 어려서부터 너무나 많은 밥을 먹고 자란 우리는 각자 선호하는 밥의 되기가 천차만별이다. 하지만 진밥, 고두밥 선호에 치우치지 않고 모두의 입에 맞을 수 있는 밥 물의 양을 맞추시는 엄청난 초능력을 보유하신 분들이 바로 밥모님이다. 우리 밥모님은 여기에 튀김, 기름 팬 요리, A코스(한식)에서 뚝배기를 끓여 배식까지 해주시는 불을 다스리는 분이셨다.


그리고 아까 나에게 고춧가루 봉지를 주고 가신 여사님은 찬모님이셨다. '찬모님'이라 함은 조리실에서 반찬 조리를 담당해주시는 분을 말한다. 메인찬과 찌개 등은 실장님과 조리사님들이 나눠서 하지만, 그 외에 반찬들은 찬모님께서 만들어주신다. 큰 솥 3개 중 하나를 사용해서 반찬을 만들곤 하셨다. 게다가 찬모님은 샐러드드레싱, 양식에 필요한 각종 소스들을 뚝딱뚝딱 만들어내시는 소스 마스터이시자, 수제반찬의 달인으로 허락만 하시면 가게를 차려보고 싶을 정도로 손맛이 특출나셨다. 보통 급식소에서 메인 찬이나 찌개가 맛있을 경우는 종종 있지만 반찬까지 다 맛있을 경우는 드물다. 그만큼 급식소에 손맛 좋은 찬모님이 계시다는 것은 아주 복 받은 일이다.


"오케이~ 오늘 새 학기라 제가 메뉴를 좀 욕심냈어요. 이번 학기도 잘 부탁드릴게요~ 자, 조회 마치겠습니다."


조리실 조회가 마무리되고 작고 소중한 영양사 사무실에서 영양사 조회가 개최됐다.


"오전에 업무는 좀 배웠어요?"

"네. 창고 정리하고 있었습니다."

"오후에는 재고조사 가르쳐드리려고요. 점장님."

"네, 첫날이라 아주~ 오래 걸릴 테지만 다 배우는 거라 생각하고 하시고, 인턴 영양사님은 오늘 배식 때 양쪽 코너 교차지점에서 간식을 나눠 주시고, 간식 떨어지면 A 코너 들어가서 도와주세요.”

"넵!"


조회를 마치고 다시 창고로 돌아가 못다 한 정리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별안간 또 나를 찾는 소리가 들렸다.


"영양사님~ 배식하러 나오세요!"


창고 안은 중력이 2배 이상으로 작용하는 것이 분명했다. 빠르게 움직인 것 같은데 핸드폰 시계를 확인해보니 11시 15분이었다. 11시 30분부터 배식 시작이었지만 이미 홀에는 학생들로 가득 차 있었다.

이상하지 않은가? 분명 교직원 식당이라고 했는데, 줄 서 있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앳된 대학생들 뿐이었다. 그 순간 번뜩 뇌리에 스치는 생각. 왜 하필 올백 머리를 한 걸까.

'저는 신입사원입니다. 게다가 오늘은 첫 출근이라고요. 훗.' 이렇게 모두에게 알려주고 싶었나 보다. 지금 생각하면 상당히 부끄럽지만, 그땐 더욱더 부끄러웠다.


피할 수 없으면 즐기기는 개뿔. 온전히 부끄러움을 느끼며 첫 배식이 시작되었다.


“감사합니다. 맛있게 드세요.”


입으로는 감사 인사를 하고, 눈으로는 식권을 잘 내는지 확인하며, 손으로는 간식을 나눠주었다. 나눠 주는 것이 내 영혼인지 간식인지. 그렇게 혼신을 다해 배식을 하고 나니 오후 2시 반이 되어 3시간의 점심시간이 막을 내렸다.


영양사의 점심시간은 비로소 이때 시작된다.


"맛있게 먹겠습니다~"

영양사도 그 날의 메뉴를 똑같이 식사 하는데 첫 식사를 정말 맛있게 먹었던 기억이 난다. 고단한 노동 후 식사라서 맛있는 것뿐만 아니라 정말 맛있어서 놀라웠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 식당은 교내에서 맛있기로 소문난 식당이었고, 교직원 및 학생들 대상으로 선호도 조사를 하면 항상 1위를 하던 곳이었다. 그래서 '교직원'식당이지만 입소문이 나 새 학기만 되면 선배들이 신입생들을 데리고 소위 '밥을 사주는' 식당으로 인기가 많았다. 덕분에 학생들이 너무 많아 줄이 길다는 교수님, 교직원들의 불만은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는 풀지 못할 숙제였다.


식사를 하고 나니 오후 업무가 주어졌다. 바로 '재고조사'였다.

'재고조사'란, 조리실 내부의 창고와 냉장/냉동고 등에 포진해있는 수백 가지의 재고들의 수량, 유통기한, 보관방법, 원산지 등을 파악하고 확인하는 작업이다. 이를 바탕으로 앞으로 필요한 식재료를 발주한다. 특히 식재료는 재고가 되면 쉽게 상하거나 못쓰게 되므로 보다 정확한 재고 파악이 필요하다.


“여기 재고조사표 보시고 이것들 확인하셔서 작성해주시면 돼요. 처음 하는 거라 오래 걸릴 텐데 점점 익숙해지면 30분 만에 다하기도 해요. 아, 그리고 여기 보면 이렇게 포장지들 보관되어 있거든요? 소분해서 사용하는 양념류 같은 경우 포장지를 따로 보관해서 유통기한, 보관방법을 증빙하는 거예요."


아, 그래서 찬모님이 나에게 고춧가루 포장지를 주고 가셨구나..! 큰 깨달음을 얻었다. 영양사님이 나가자마자 고이 모셔두었던 고춧가루 포장지를 새 것으로 교체하였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첫 재고조사를 실시했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영양사님! 나오세요~ 저녁 배식 준비해야 해요!”


이제 명확해졌다. 창고에선 중력이 4배로 작용하는 것이다. 나의 행동이 얼마나 굼떴는지 어느새 저녁시간이 되어버린 것이다. 조리실 내부 구조가 익숙하지 않으니 어디에 무엇이 있는지, 무게가 얼마나 되는지, 전 처리된 채소나 고기들은 오늘 저녁에 나갈 건지 아니면 내일 점심용 식재료가 미리 들어온 것인지, 그렇다면 이것은 재고에 포함을 시켜야 하는지 없다고 해야 하는지, 나는 왜 여기 있는지, 도무지 알 길이 없었다. 그렇게 씨름을 하다 보니 시간만 속절없이 흘러 버린 것이다.


저녁 배식을 끝내고 아까 못한 재고조사를 마무리하고선 조금 늦은 퇴근을 했다.


노을이 내려앉은 하늘을 보며 터덜터덜 걸어서 4평 남짓한 자취방으로 향했다. '이대로 정규직이 되어 진짜 영양사라는 직업을 갖는 것이 정말 괜찮을까.' 싶은 생각이 들며 만감이 교차했다. 집에 들어가자마자 알 수 없는 감정에 신발장에 주저앉아 한눈에 들어오는 작디작은 방 안을 멍하니 쳐다봤다. 얼마 전까지 나도 점심시간에 밥 먹는 학생이었던 것 같은데.. 하루가 어떻게 흘러가는지도 모르게 일하고 퇴근해서 돌아온 불 꺼진 자취방은 따뜻하지도 위로가 되지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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