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양사 아닌데, 영양사는 맞아요.(7)
"뭐 드릴까요?"
"저 B 주세요!"
"네, 5천 원입니다. 서명이요. 감사합니다. 다음 분~"
지금은 '카드 결제 5만 원 이하 무서명'이 당연해진지가 오래지만 내가 인턴 영양사로 근무할 적에는 모든 금액에 서명이 필수였던 시대였다.
"안녕하세요, 안경 바뀌셨네요? 오늘도 B로 드릴까요?"
"네. 어떻게 아셨어요?!"
"매일 오시는데 금방 알아보죠~ 안경 잘 어울리시는데요? 여기 식권이요. 맛있게 드세요~"
"감사합니다~!"
인턴 영양사가 된 지 6개월, 시간 덕분에 제법 익숙한 손님들도 생기고 영양사 일에서 나름의 재미를 찾아가고 있었다.
여느 일반 음식점처럼 단체 급식소에도 단골손님이란 존재하기 마련이다. 그렇기 때문에 점장님께서는 특히나 CS를 중요하게 여기셨고 고로 나는 손님 한 분 한 분에 대해 특별히 신경 쓰려고 노력했다. 다행히도 사람 얼굴을 꽤나 잘 기억하는 편이어서 자주 오는 손님, 처음 오는 손님 구분이 쉬운 편이었기에 종종 먼저 가벼운 대화를 걸어 손님과 스몰토크를 하기도 했다. 영양사가 말을 걸면 손님들의 표정은 약간의 당혹감이 비췄다가 이내 환하고 밝은 표정들로 바뀌곤 한다. 아마도 영양사의 손님에 대한 작은 관심이 밥만 먹으러 왔던 손님에게는 큰 환대로 받아들여졌던 것 아닐까 싶다.
어느 날 남학생 무리가 다 같이 모여 카운터 앞에서 수군수군 작당모의를 하는 모습을 보았다. 자기들끼리 가보라는 둥 왜 그러냐며 싫다는 둥 티격태격하던 끝에 한 학생이 선택된 것 같았다. 그 학생은 매우 어쩔 줄 몰라하는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이며 삐그덕 삐그덕 걸어서 나에게 다가왔다.
"어서 오세요. 뭐 드실지 결정하셨어요?"
영양사 선생님이 보는 앞에서 아웅다웅한 것이 혹여나 부끄러울까 봐 민망해하지 말라고 먼저 말을 건넸다.
"아.. 네.. 저 B로 5장.."
머쓱한 듯이 카드를 내미는 학생과 친구들의 놀리는 듯한 웃음소리를 듣자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설마, 왕따인가?'
'이노무 자슥들이..! 마! 느그 아부지 뭐하시노!'라고 한마디 하고 싶었지만,
"네, 2만 5천 원입니다. 서명이요."라는 말이 기계처럼 나와버렸다.
괴롭히는 친구들에게 점심값을 뜯기고 있는 것 같아서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지만 아무것도 도움이 되지 못하는 이 누나를 용서하란 마음으로 추측성 왕따 학생의 서명을 기다렸다. 그런데 학생의 서명이 너무나도 뜻밖이었다.
그것은 바로 '♡' 하트.
학생이 서명패드에 삐뚤빼뚤 그린 하트를 보며 나 혼자 착각한 것이 우스워 웃음이 나왔지만 아무렇지 않은 척했다. 대신에 최대한 아름다운 미소를 띤 채 학생에게 식권과 카드를 넘겨주었다. 반면 하트 서명을 마친 왕따가 아닌 아마도 나를 흠모했을지 모르는 학생은 얼굴이 벌게져 친구 무리를 내팽개치고 식당 안 쪽으로 사라져 버렸고, 어깨너머로 상황을 관전하던 나머지 학생들은 비실비실 세어 나오는 웃음을 참으면서 내 눈치를 슬며시 보더니 '야야~!' 하면서 도망간 친구를 놀리기 위해 신나게 뒤따라갔다.
'짜식들, 보는 눈은 있어가지고.'
철없는 학생들의 장난이었든 뭐든 난 고백을 받은 것으로 이 사건을 정의하기로 했다. 해석은 내 자유니까. 후훗.
나의 또 다른 소통 방법은 '라운딩'이었다. 피크타임 배식을 마치고 나면 한가해진 틈을 타 식사 중인 손님들 사이를 돌아다니며 고객 반응을 체크하였는데 그것을 '라운딩'이라고 했다. 아무래도 하얀 가운을 입은 영양사가 식당을 활보하고 다니면 눈이 가기 마련 일터. 처음엔 시선이 집중되는 것도 부담스러웠고 괜히 말을 걸었다가 돌아오는 답변이 험악할까 봐 무섭기도 했지만 직업인데 어쩌겠는가. 내가 적응하는 수밖에. 아무튼 라운딩의 좋은 점은 음식에 대한 손님 반응을 즉각 반영할 수 있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오늘 식사 어떠세요? 짜거나 싱겁지는 않으신가요?"
"영양사님! 오늘 국 좀 싱거워요! 다른 분들도 다 그렇데요~"
"아, 그러셨어요? 저희가 바로 말씀드려서 간 조절할게요. 음식도 싱거우시면 바꿔드릴게요!"
"우와~ 감사합니다!"
이렇게 불만을 가질 수 있는 손님에게 즉각 대응하는 모습을 보여주면 맛은 물론이고 식당에 대한 이미지까지 챙길 수 있다.
"오랜만에 오셨네요? 왜 안 오셨어요, 요즘~"
"조금 있으면 공대는 중간고사 시작이라서 웬만하면 편의점에서 대충 먹고 공부하러 가요."
"아, 다른 단과대보다 빨리 시작하나 봐요?"
또는 이렇게 친한 단골손님과의 대화를 통해 교내 행사나 시험일정 등에 대한 정보를 얻기도 했다. 이러한 정보는 식수를 맞추는 것에 도움이 된다.
그렇다고 손님들과의 대화에서 어찌 마냥 좋은 소리만 듣겠는가.
"안녕하세요. 교수님. 식사는 어떠세요?"
식당에서 자주 뵙는 분은 아니라 최대한 정중하게 질문을 드렸다.
"저기요. 이 밥, 쌀 오래된 거죠?"
"아.. 그럴 리 없는데요. 교수님 오늘 아침 새로 들어온 쌀로 밥을 했습니다."
"아니, 제가 매일 쌀 가지고 실험하는 사람인데 저는 밥만 먹어봐도 이게 얼마나 된 쌀인지 바로 알아요. 근데 지금 이 쌀은.. (절레절레) 최소 한 달 넘었어."
자, 여기서 짚고 넘어갈 부분. 급식소에서 사용하는 쌀이 한 달..? 이 지난 쌀이라고? 실온 창고에 쌀을 쌓아두고 사용은 하지만 그것은 길어봤자 2~3일 치 분의 쌀이지 몇 달치 쌀을 미리 구매해 쌓아 두고 밥을 하지 않는다.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당시에, 이렇게 말씀드리고 싶었는데 이제야 그 한을 푼다. 부들부들.)
"아.. 교수님 불편하셨다면 죄송합니다. 하지만 오래된 쌀은 전혀 아니고요.. 어쨌든 입에 안 맞으시다면 다른 코너에서 나오는 면이나, 샐러드 같은 다른 메뉴라도 준비해드릴까요?"
내가 할 수 있는 한 최대의 사과와 용서를 구하고 대안책을 제시하는 것. 그것밖에 방법이 없으니.. 이렇게 위기를 넘기곤 했다. 이럴 때 보면 영양사도 정말 을 중의 을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육체적으로 힘든 부분은 '배식'이었다. 특히, 우리 식당은 '대면 배식'을 했던 터라 뚝배기, 철판, 파스타볼, 접시, 찬기 등 다양한 그릇에 그 날의 메뉴를 일일이 담아 배식을 했다.
한 번은 뚝배기 요리가 나가는 날, 화구와 배식장소 간의 거리가 있어 식판에 4개씩 뚝배기를 담아 직접 옮기면서 배식을 하고 있었다. 수십 번을 왔다 갔다 하면서 배식을 하는 도중 마음이 급해 배식대 위에 트레이를 완전히 밀어 넣지 않고 반쯤 걸쳐둔 상태로 새로운 식판을 가지러 돌아갔다. 그리고 다시 뚝배기를 들고 돌아와서 배식대 위에 올려두려는 순간 손님들이 식판 앞쪽 뚝배기를 먼저 가지고 가면서 무게가 뒤쪽으로 쏠려 나머지 뚝배기들이 배식대 아래의 내 발 위로 그대로 떨어져 버렸다. 상상하시는 대로 뜨거운 국물이 발 위로 엎어졌고 뚝배기도 모두 깨져버렸다.
신기한 것은 순간 아프다는 생각보다 빨리 배식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고 들고 있던 뚝배기들을 배식대 위에 내려놓으며 "맛있게 드세요~"라고 말하곤 깨진 것들을 뒷수습했다. 깜짝 놀란 손님들과 여사님들의 반응과 달리 정작 당사자인 나는 차분했다. 그저 차가운 물 한 바가지 받아 발 위에 확 부어버리고 계속해서 배식을 할 뿐이었다. 배식할 인원은 늘 모자라고 기다리는 손님은 끝이 없으니 아파할 겨를도 없었던 것이다. 얼추 배식이 마무리되고 카운터에서 다친 곳을 확인하고 있었는데 두 명의 여학생이 다가왔다.
"영양사님.. 안녕하세요."
"네, 식사는 맛있게 하셨어요? 필요하신 것 있으신가요?"
"아.. 그런 건 아니고 아까 제가 뚝배기 가져가다가 뒤로 넘어가서 다치신 것 같아서.. 죄송해서요."
두 여학생은 바나나우유를 건넸다.
"아.. 안 그러셔도 되는데.. 아이고 감사합니다."
"아니에요. 많이 다치신 건 아니죠?"
"네. 안전화 신고 있어서 괜찮아요. 너무 걱정 마세요. 감사해요~"
다친 내가 걱정이 되어 수줍게 미안한 마음을 표현한 고마운 학생들. 영양사에겐 무엇보다 음식이 맛있다는 칭찬이 제일이겠지만 이런 소소한 정을 느끼게 해 주었던 그들의 마음이 꽤나 진실했기에 기억에 남는 기쁜 순간들 중 하나인 것 같다.
한 번은 이런 적도 있다.
"5천 원입니다. 서명해주세요."
"네, 그런데 영양사님. 염색하셨네요? 오렌지색?"
영양사는 귀걸이, 반지 등 장신구를 할 수 없고, 여자들이 좋아하는 네일아트는 더더욱 안되고 하니 꾸밀 수 있는 것은 화장과 머리스타일뿐이었다. 화장이야 덥디더운 조리실에서 마스크를 하고 배식을 하다 보면 다 무너지기 일수이고, 사실 머리도 망을 사용해서 항상 묵고 있거나 모자를 써야 하기 때문에 바꾼다 해도 크게 티가 안 나긴 한다. 하지만 다른 것들은 일체 허용이 안되니 3개월에 한 번씩 머리스타일을 바꾸는 것으로 스트레스를 풀어 주곤 했더랬다.
"아~ 하하.(뻘쭘. 이거 참 민망하구먼.) 오렌지색은 아니고, 오렌지 브라운이긴 한데(코쓱머쓱) 티가 많이 나나 봐요."
"네! 엄청! 불빛 때문에 더 잘 보여요. 근데 잘 어울리세요!(엄지 척)"
아무래도 항상 먼저 말을 건네는 입장이다 보니 이렇게 말을 걸어주는 손님에게는 되려 수줍어지는 기분이 든다. 무언가 나의 변화를 알고 있었다고 생각하니 민망하다고 해야 하나.. 가끔 보여주는 이런 느닷없는 관심의 표현이 조금은 부끄러웠으나 기분은 좋았다.
그리고 나는 6개월의 인턴과정을 마무리하기 위해 2차 합숙교육을 받으러 경기도로 떠났다. 다행히 2차 합숙교육까지 마무리한 인턴 영양사 동기들은 모두 정규직으로 전환이 되었다. 몇몇 동기들은 새로운 발령을 받게 되기도 했지만, 나는 교직원 식당으로 '인턴' 영양사가 아닌 '실무'영양사로 돌아가게 되었다.
"축하해요. 영양사님. 이제 정말 우리 한 식구니까 앞으로 잘해봐요."
"네, 감사합니다. 점장님! 도와주신 덕분입니다."
"그런데 영양사님 안 보인다고 찾는 손님들이 왜 이렇게 많은지~ 다시 안 오는 거 아니냐고 손님들이 엄청 물어보던데?"
"하핫. 정말요? 점장님 거짓말하시는 거죠?"
"아니야~ 여사님들한테 물어봐. 진짜 오늘도 열명은 물어본 거 같은데?"
점장님의 인사치레를 들으며, 실무 영양사로 첫 배식을 위해 사무실을 나섰다.
"어! 영양사님! 돌아오셨네요? 다른 곳으로 가신 줄 알고 아쉬웠는데 다행이다!"
"안녕하세요! 잘 지내셨죠~ 오늘도 제가 많이 드릴게요!"
그렇게 나는 '영양사'가 되었다.
'영양사 아닌데, 영양사는 맞아요.' 매주 목요일 업데이트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