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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부리 Apr 15. 2021

영양사가 일 하면서 가장 열 받는 순간

영양사 아닌데, 영양사는 맞아요.(8)


인턴 영양사로 첫 입사했을 때만 해도 벚꽃잎이 날리던 찬란한 봄이었는데, 어느덧 찬 공기에 하얀 입김이 푹푹 나오는 추운 겨울이 되었다. 목이 시린 걸 질색하는 나는 목도리로 목을 넘어 얼굴까지 칭칭 감고 미끄럽지 않은 길인지 꽁꽁 얼어붙은 얼음인지 분간만 가능할 정도로 얼굴을 빼꼼히 내민 채 출근을 하고 있었다.


"어? 영양사님? 안녕하세요!"

인턴 때부터 매일같이 다니던 거래처 은행의 지점장님이셨다.


"지점장님~ 안녕하세요!"

"그런데 벌써 출근하시네요?"

"네~ 아침에 할 일이 많아서요~"

"그렇구나~ 영양사 선생님들 이렇게 일찍 출근하시는 줄 몰랐어요."

"저도 몰랐어요. 하하."


관련 업종에 종사하지 않으면 영양사는 느지막이 출근해 점심시간만 일하고 퇴근하는 줄 아는 분들이 더러 있다. 하지만 적어도 내가 경험해본 바에 의하면 영양사는 아침 일찍 출근을 해야 하고 하루 중 오전 업무가 가장 치열하고 바쁘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내가 다니던 곳에는 조식이 없었지만 조식이 나가는 업장에서 근무하는 동기들은 새벽 5~6시에 출근하기도 했다.


"그럼 고생하세요~"

지점장님과 인사를 나누고 식당에 도착해 가운을 챙겨 입고 오늘도 먼저 분주해진 조리실로 향했다. 실무 영양사가 되면서 인턴 영양사와 달라진 점은 업무가 더 많아졌다는 것이다.

첫 업무 시작은 '검수'이다. 검수란 그날 입고되는 식자재들이 주문한 데로 품목, 수량이 맞게 들어왔는지와 어육류나 김치 등의 원산지를 확인하는 작업을 한다.


그리고 검수과정 중 문제가 발생하지 않는다면 사무실로 돌아가 전산으로 '입고'처리를 한다. 만약 수량이나 품목이 잘 못 들어왔다면 '클레임'처리를 한다.(이렇게 글로 쓰니 참 간단해 보이고 좋다..) 식재료가 잘못 들어오는 경우는 두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하나는 너무 적거나 아예 안 들어오는 경우, 다른 하나는 너무 많이 들어오는 경우이다. 종종 식당에서 같은 식재료가 어제도 오늘도 자꾸 보이면 발주 실수로 10박스 들어올 것을 ‘0’ 하나 더 붙여 100박스 받았나 보다 하고 너그러이 이해해주길 바란다.

 

하지만 전자의 경우는 해결이 쉽지 않다. 만약 어떠한 이유에서든지 식재료가 들어오지 않아서 클레임 처리를 한다고 해도 납품 업체가 지방에 있고 스케줄에 맞춰 움직이는 배송기사님이 바로 오기는 힘들기 때문에 클레임 된 식재료가 그날에 입고되기 어려운 경우가 다반사다. 결국 배식 전에 식재료를 받기는 거의 불가능하며 점심 배식에 나갈 메뉴가 없는 상황이 된다. 이럴 땐 빠르게 대체할 메뉴를 찾아야 한다. 재고를 활용해 조리를 한다던가 어쩔 수 없이 근처 대형 식자재 마트에 연락해 있는 것을 다 쓸어와 그럴싸한 대체 메뉴를 만들어내야 한다.


입고처리가 마무리되면 아침 조회를 하게 된다.

"자, 오늘 아침 조회는 여기까지 마칠게요. 영양사님, 실장님한테 내일 양념류 안 들어오니까 추가 발주에 필요한 것 있는지 물어보고 시켜주세요."

"넵. 아까 여쭤봤는데 A1소스랑 치킨스톡, 찬모님은 굵은 고춧가루, 흑설탕, 피시소스 필요하다고 하셨습니다."


아침 조회가 끝나면 이번엔 ‘추가 발주’를 한다. 일반 발주는 2~3일 후에 입고가 되나 추가 발주는 하루 만에 입고가 가능한 시스템으로 보통 양념류 등을 주문한다. 이 일이 마무리되면 원산지와 알레르기 표시가 포함된 메뉴표를 뽑고 배식준비를 위해 조리실로 향한다.


"영양사님~ 오늘 나갈 흑임자 소스. 어때요?"

"음.. 맛있는데! 좀 달아도 좋을 것 같고, 검은깨 더 넣어서 색 맞춰야 할 것 같아요."

"오케이~"


"여사님, 탕수육 2봉 남은 것 먼저 쓴 거죠? 샐러드 방울토마토는 1/2 크기로 들어가요!”

“네. 자른 것 냉장고에 있어요~ "


이렇게 조리실을 돌아다니며 점심메뉴가 조리 지시서에 맞게 준비가 되었는지 '검식'을 하고 나면 완성된 음식을 '보존식'으로 담아둔다. 보존식은 급식소에서 식사를 한 손님에게서 집단으로 식중독과 관련된 증상이 나타날 경우 발병원인을 찾기 위해 식중독 검사를 시행할 때 사용하게 된다.(보존식이 사용되는 경우가 없어야겠지만..!) 따라서 보존식은 보존식 기록표에 배식된 날짜와 시간, 음식의 종류를 적어두고 보존식 냉동고에 144시간 동안 보관을 한다. 그렇기 때문에 보존식을 챙겨 담는 것은 영양사의 중요한 업무 중 하나이다.


그리고 배식 직전에는 그날의 메뉴를 보기 좋고 먹음직스럽게 담아 쇼케이스에 전시를 하게 된다.


"우와~ B코너 대박이다. 오늘 일찍 오길 잘했네~!"


정갈하고 맛있어 보이게 담아 쇼케이스에 전시를 할 때 이런 손님들의 반응을 들으면 괜히 으쓱해지고 뿌듯하기도 하다. 이것은 여담인데 쇼케이스의 음식을 보고 모형인지 진짜인지 확인하기 위해 툭툭 손으로 건드려 보는 손님도 있고, 짓궂은 손님은 다 먹은 후식 껍데기와 쇼케이스의 새것과 바꿔놓고 가기도 한다.


아무튼 그렇게 배식이 시작되면 또 다양한 상황에 대처를 해야 한다.


"손님 죄송합니다. 공간이 협소해서 안쪽으로 조금만 들어가 주세요."

기다리는 줄이 길어져 홀이 복잡해지지 않도록 교통정리를 해주기도 하고,


또는 퇴식구에 찾아가,

"여사님! 오늘 B코너 잔반 많아요?"

"네, 평소보다 많이 나오네요?"


"손님, 오늘 오랜만에 오셨는데 식사를 많이 못 하셨네요? 맛이 없었을까요?"

"아, 아니요~ 오늘 받은 양이 좀 많았어요."


"여사님 양이 좀 많데요~ 배식 양 좀 조절해주세요!"


이렇게 틈틈이 퇴식구를 확인해보고 음식이 많이 버려지는 경우 맛이 없어서인지 배식하는 양이 많아서인지 빠르게 캐치해 조절을 하기도 한다. 이 외에도 식수에 따라 남거나 모자라는 음식이 없도록 여사님들과 합을 맞춰 배식을 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영양사에게는 순발력과 빠른 판단력이 꼭 필요하다. 두 시간 반의 배식을 마치면 점심 식대 정산을 한다.


"영양사님, 오늘은 몇 명?!"

"점장님, 오늘 883명이요."

"굿~ 이제 밥 먹읍시다!"


점심식사를 마치고 나면 은행에 가서 현금으로 들어온 수익금을 입금함으로써 숨 가쁜 오전 업무가 마무리된다.(오전 업무라 하지만 실제로 3시를 훌쩍 넘기게 된다.)


오후에는 2~3일 후 나갈 메뉴에 대해 '발주'를 하는데 메뉴와 조리 지시서를 확인하고 필요한 양의 식재료들을 주문한다. 그리고 나머지 시간 동안 조리실 내외부의 위생상태를 점검하고 서류를 작성하거나 안전 및 소방상태 점검, 급식소와 조리실 유지보수 점검 등을 하러 다닌다. 월말에는 조리사님들과 여사님들에 대한 인건비 마감을 하고 지출과 수익 등 월 마감을 하게 된다. 이밖에도 학교 측에서 요구하는 행사(동문회, 시무식, 사은회 등에 맞춰 차림식이나 뷔페, 핑거푸드를 준비한다.)와 시즌에 맞춰 자체적으로 진행하는 이벤트(삼겹살데이, 짜장 데이, 밸런타인데이, 빼빼로데이, 그놈의 데이들과 잔반 없는 날 등), 본사에서 나오는 위생점검을 대비하기 위해 틈틈이 규정에 맞게 조리실 내외부를 점검하다 보면 어느새 저녁 배식시간이 된다. 저녁 배식은 식수가 300 정도였기에 점심보다는 수월하다. 그렇게 저녁 배식이 마무리되면 터덜터덜 퇴근을 하며 하루를 마무리하게 된다. 이 정도가 대략적인 실무 영양사의 메인 업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리고 달라진 점, 두 번째로는 '책임'이다.

이것과 관련하여 대단한 사건이 하나 있었다. 이로 인해 영양사를 그만둬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해 줬으니 말이다.


그 날은 학기 초라 학과별로 입학행사를 진행하는 주간이었다. 앞선 글에서도 말했듯이 우리 식당은 학기초만 되면 문전성시를 이루는 단연 인기 톱 오브 톱의 식당이었기에 엄청난 손님들이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영양사님! 나와서 몇 명 있는지 세어볼래?"

"네!"


B코너의 경우 식수가 정해져 있었기에 중간중간 기다리는 손님의 숫자를 세어보고 손님이 많을 경우 미리 안내를 하고 품절을 시키곤 했다.


"점장님, 지금 47분 서계시고 함박은 67개 있습니다."

"그러면 앞으로 10명만 더 받을게요."


식권을 미리 사서 카운터에 들리지 않고 줄을 서는 고객들이 있기 때문에 이런 식으로 식권 판매량을 조절했다. 그리곤 다시 배식을 하러 들어갔다.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 점장님께서는 다시 나를 찾으셨다.


"영양사님~"

남아있는 함박과 대기 중인 손님의 숫자를 맞춰보기 위함일 터.

"찬모님, 함박 몇 개 남았어요?"

"지금 한판에 10개씩이고, 오븐에 있는 거 빼고 30개요."

"조리사님, 오븐에 함박 몇 판 있어요?"

"2판이요~"


'그러면 50개..'


그리고 B코너에 대기하는 손님의 숫자를 세어보았다.

그런데.. 아니 이게 웬걸 함박이 67개에서 50개로 줄었으니 17명에게 배식을 했다는 의미이다. 그러니 손님은 30명으로 줄었을 것이고, 점장님께서는 10명을 더 받기로 하셨다. 식권을 미리 사둔 손님이 있다는 전제하에 대기 인원은 많아봤자 50명을 넘기면 안 된다. 그런데 왜 그 짧은 시간 동안 어디서 나타난 손님들인지 대기 손님은 79명이 되어있었다.


점장님께 달려가 이 상황을 전달했다. 점장님은 모자란 함박에 대해 저녁에 나갈 돈가스를 활용해 배식을 맞추라고 하셨다.


나는 조리실에 상황을 전달하고, 배식이 가능한 마지막 손님에게 뒤로 더 이상 줄을 서지 않게 품절이라고 전달해달라는 부탁을 드린 뒤 조리실로 향했다.


그런데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함박 대신 나가던 돈가스의 개수는 줄어드는데 기다리는 손님은 더 늘어난 것 같았다.


“영양사님, 이제 돈가스 10개뿐인데 손님 더 있는 것 같아요~!”

“아 뭐지? 찬모님, 제가 확인해보고 올게요!”


대기 손님 수를 세어보니 말도 안 돼... 여전히 29명이었다.

순간 정신이 아득해졌다. 우선 이 상황을 점장님께 전달을 해야 했다.


"점장님, B코너 대기손님이 더 계셔서 19개가 모자랍니다.."

"뭐? 개수 파악 정확히 하랬지!!!"

엄청난 샤우팅이었다. 식권을 사려고 기다리고 있던 손님들이 움찔움찔 놀랄 정도로.


"영양사님 지금 대기줄 안 보여?! 이거 다 어쩔 거야? 기다리신 분들한테 양해구하고 음식 없다고 말씀드려. 당장!"

자존심이 상했다. 잘잘못의 여부를 떠나 수십 명의 내 또래 학생들이 보는 앞에서 흠씬 두들겨 맞은 기분이었다. 게다가 혼나고 나서도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웃으며 얼굴을 들고 돌아다녀야 한다니.. (속된 말로) 쪽팔렸다. 얼마나 크게 혼났는지 기다리던 손님들은 모세의 기적처럼 나의 사과하러 가는 길을 좌우로 열어 주었다.


이미 자존심은 구겨지다 못해 쓰레기통에 처박혀 버렸고 남에게 사과를 할 여력은 없었지만 내 직업이고 내 일인걸 어쩌겠는가.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총알받이를 하러 손님들을 향해 갔다. 19명.. 말이 19명이지 나는 다시 한번 내 또래 수십 명의 손님들 앞에서 19번의 사과를 하면서 나를 내려놓아야 하는 상황이 된 것이다. 어쨌든 어디서 모여든 손님인지 알 수 없으나 식수 파악이 제대로 안 된 것은 우리 잘못, 아니 '나의 잘못'이니 내가 책임을 져야 했다.


첫 번째 손님에게 말을 건넸다.

"저, 손님. 오래 기다리게 해 드려서 죄송합니다. 저희가 준비한 음식이 모두 떨어져서요. 정말 죄송합니다."


내 이야기가 들리는 손님들 사이에서 웅성웅성 '품절이래.' 하는 소문이 퍼져나가고 있었다. 짜증과 분노도 함께 말이다. 손님들은 기다린 것에 대한 불만을 토로하고 소중한 점심시간을 망친 것에 대해 화풀이를 하며 거듭 사과를 요청했다. 당연히 그들의 심정은 이해를 했다.


"저기요. 그럼 거스름 돈은 환불해주실 거예요?"

"네, 많이 불편하시겠지만 식권 주시면 제가 카운터에서 거슬러 가져다 드리겠습니다. 죄송합니다."

 

그렇게 할 수 있는 한 최대한 공손하게 욕받이 무녀가 되어 겸허히 욕을 먹고 있던 와중에 검은 정장을 차려입은 한 무리의 학생들에게 사과를 하게 되었다.


"손님. 죄송합니다. 저희가 준비한 음식이 다 소진되어서요. 혹시 양해해주신다면 A 코너는 식사가 가능한데 식권을 거슬러 드려도 될까요?"

"네? 뭐라고요? 지금 음식이 없다고요?"


'그래, 올 것이 왔구나.' 싶었다. 계속 사과를 하다 보니 손님의 말투만 봐도 얼마나 하드 한 케이스인지 알 수 있었다.

 

"네.. 정말 죄송합니다. 대신에 저희가 B코너 메인 외에 다른 음식들 많이 챙겨드리도록 하겠습니다."

"하! 참네. 음식을 챙겨줘? 지금 그게 중요해요?"

이내 언성을 높이기 시작한 검은 정장을 입은 남녀 학생들이 나를 둘러싸고 팔짱을 낀 채 노려보기 시작했다. 작정하고 덤벼들겠다는 태도로.


"아.. 정말 죄송합니다. 더 이상 기다리시지 않게 B코너에서 바로 A 코너 음식까지 함께 배식해드려도 될까요?"

"아니, 저기요.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요. 저희가 여기 와서 먹으려고 식권도 구매했고, 또 저희 각자 한 명 한 명 기다린 시간은 어떻게 보상하실 건데요? 그것도 보상해주셔야죠."

"네.. 기분도 많이 상하셨을 텐데 정말 죄송합니다. 저희가 해드릴 수 있는 최대한으로 음식들 챙겨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당연히 돈도 거슬러 드리고요. 양해 부탁드립니다."

"하! 진짜 어이가 없네. 저희가 왜 그쪽을 양해해줘요. 그리고 시간에 대해서 보상해준다는 게 고작 음식 챙겨주는 거라고요? 그게 다예요?"


있는 데로 화가 난 검은 정장 학생들은 보란 듯이 나를 나무라기 시작했다.


"품절인데 왜 손님들 줄 서서 기다리게 만들어요?"

"죄송합니다."


"저희 여기 서서 15분 넘게 기다렸거든요? 10명이니까 150분인데 어쩌실 거예요?"

"죄송합니다."


"저희는 B코너 때문에 온 거예요, A 먹으려고 이 시간까지 기다린 거 아니거든요?"


......


후.. 나도 인내심에 한계란 것이 있는 사람인 것을.


"손님."



"그러면 뭘 어떻게 해드릴까요?"



'영양사 아닌데, 영양사는 맞아요.' 매주 목요일 업데이트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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