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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무 Jun 19. 2024

8. 뜨개질을 해요*

Poem




당신의 목소리는 코바늘 8호가 적당해요

가볍게 날리는 분홍의 기억 한 뭉치를 골랐어요

보풀처럼 번지는 무심함을 당겨 한 코에 한 번씩 입김을 불어 넣어요

일정한 텐션을 유지하려고 수시로 미간의 주름을 살피죠

오늘 본 영화처럼 촘촘했다가 느슨해지는 건 좋은 결말이 안 나요

뒤꿈치를 들던 첫 입맞춤처럼 한 단 한 단 키가 늘어나요

짧은뜨기는 기둥코 하나를 세워서 더디지만 튼튼하고

한길긴뜨기는 기둥코가 두 개라서 빠르지만 힘이 없어요

여러 길목에서 서성거리는 마음을 정하는 일은 정말 어려워요

몇 번의 이별을 겪고 나면 어느새 겨울에 당도하죠

실밥처럼 눈이 내리면 자꾸 옆을 보게 돼요

여름에는 얇은 꿈으로 성글게 잠을 떠서 뒤척이는 세상을 덮어 줘요

낮에 꺼내지 못한 색색의 이야기들로 여러 개의 별을 뜨며 밤을 견디죠

별들을 이어 붙이며 멀리서 혼자 깜박거리는 당신을 생각해요

한 단을 마무리하는 빼뜨기는 문장의 마침표예요

숨을 몇 번 쉬었는지 강약이 어디 있는지도 모르게 뱉어 버린 고백 같아요

마음이 식으면 미련 없이 줄을 풀지요

나는 처음과 달리 꼬불꼬불 엉켜 있어요

다시 시작해야 하지만 괜찮아요

사슬뜨기의 콧수를 세다 보면 다른 생각이 안 나요

비구름 속에 숨은 하늘색 실을 뽑아 네트 가방을 떠요

숭숭 뚫린 구멍들 속으로 팔딱거리는 물고기들을 잡았다가 놓아준다고 상상해요

빠져나가는 물고기 지느러미에 당신의 기억을 달아놓아요

가방 손잡이는 웃고 있는 내 입을 닮았죠






*2020년 김유정신인문학상 당선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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