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일 차 / 아헤스~부르고스)
오늘(10.5)은 아헤스(Ages)를 출발하여 ▷ 부르고스(Burgos)까지 총 25.8km를 7시간 동안 5만 5천 보 정도를 걸었다.
새벽에 플래시를 켜고 순례길을 걸으면 길에 밤새 거미들이 쳐놓은 거미줄을 치우며 지나가야 한다. 청소부가 낙엽을 치우듯이 가장 부지런한 순례자가 거미가 밤새 지어놓은 그물망 같은 거미줄을 걷어내며 걷는다. 그들은 거미 입장에서 보면 무법자! 하지만 나는 무법자가 아니다.
내가 이 길을 가장 먼저 지나갈 위인이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거미의 생계터전을 인간이 박살을 내고 죄책감도 없이 낄낄거리며 지나간다. 거미한테는 미안하지만 눈에 뵈지 않아 어쩔 수 없다.
울퉁불퉁한 자갈길로 접어들자 발바닥이 너무 아프다. 이동 도중에 등산 양말 한 켤레를 더 끼워 신었더니 발바닥 통증은 가라앉았지만 여전히 불편해서 신경이 쓰인다.
가톨릭 왕으로 불리는 이사벨 여왕도 이 성인의 무덤을 찾아와 경배하며 자신이 무사히 아기를 낳기를 기도했다.
기도가 끝나고, 여왕은 성인의 유해를 볼 수 있도록 돌로 된 석관을 열라고 지시했다. 성인의 무덤을 열었던 적이 한 번도 없었기 때문에 성직자와 수도사들은 망설였다.
결국 여왕의 고집으로 석관의 뚜껑을 열자 하얀색의 벌떼가 쏟아져 나왔다. 여왕은 부패하지 않은 산 후안 데 오르떼가의 시신을 볼 수 있었다. 놀라움과 두려움에 떨던 여왕이 사람들을 시켜 관 뚜껑을 닫자 벌들은 다시 석관의 작은 구멍으로 날아 들어갔다. 여왕과 사람들은 이 벌들이 성인이 구원해주기를 기다리는 태어나지 못한 영혼들이라고 여겼다(http://caminocorea.org/?page_id=1522).
오늘의 목적지인 부르고스를 가는 길이 공항 때문에 빙 둘러가라고 이정표는 말한다. 비행장이 우리의 직선 순례를 방해하고 있다. 활주로 울타리를 돌아가느라고 거리가 엄청 멀어졌다.
순례 길목에서는 인구가 가장 많은 도시라는 부르고스에 외곽부터 차로와 순례길 코스가 겹쳐 있어서 교통사고의 위험이 따랐다. 순례길은 시내를 관통하고 있었고 우리가 예약한 숙소와 알베르게는 부르고스의 외곽에 위치하고 있지만 그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부르고스 대성당이 자리 잡고 있었다.
지금까지 본 도시 중에서 부르고스가 가장 아름다웠다. 하지만 아침 7시에 출발해서 14시에 숙소에 도착했으니 7시간 만에 이동한 셈이다. 예약한 아파트 숙소에 짐을 풀고 순례길을 걸으면서 한국 사람들 몇몇이 모여 회식을 하기로 했다. 회식 장소가 호스텔로부터 멀리 떨어진 중심가에 있어서 찾아 가는데 부담이 되었다.
몸이 많이 지쳤기 때문에 레스토랑까지 택시를 타고 가고 싶었지만 택시를 잡지 못해 30분을 더 걸어갔다. 다행히 33일 동안 탈 것을 한 번도 타지 않은 기록을 세울 수 있었다. 아내가 인터넷에서 찾아낸 일식 맛집으로 가면서 한국 순례자들에게 문자를 보냈다.
벌써 한국의 청년 여행자들 7명에 일본인 대학생 1인이 자리를 잡고 있으며 늦은 우리를 환영했다. 우리 부부가 최고 연장자였다. 어디를 가나 이 모양으로 대접을 받았기에 이제는 익숙해졌다. 각자 간단하게 자기소개를 끝내고 국적 불명의 음식을 시켜서 나눠먹었다. 오랜만에 일본식당 냄새가 물씬 나는 동양음식 맛은 여독을 푸는데 안성맞춤이었다.
좌중에 있던 사람 중에서 어떤 사람은 버스를 타고 레온까지 점프하겠다는 사람, 순례길을 이탈해서 다른 도시로 여행을 떠나겠다는 사람도 서넛이나 되었다. 이제 최종 목적지인 '산티아고 데 캄포스텔라'까지 갈 사람은 나이가 가장 많은 우리 부부뿐이었다. 자랑질 같아서 민망하다. 우리는 산티아고 순례 길 행진 12일 동안 걸은 도시 중에서는 가장 큰 도시인 부르고스에서 하루를 더 머물기로 했다. 몸에 휴식을 주기 위함이다.
부르고스는 중세 카스티아 레온 왕국의 수도였다. 카스티야-레온 왕국(Kingdom of Castile and León)은 스페인의 중세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왕국이다. 이 왕국은 이베리아 반도의 북서부와 중부 지역에 위치하며, 오늘날의 스페인 통일 과정에 큰 기여를 했다. 카스티야 왕국과 레온 왕국은 독립적으로 존재하다가, 몇 차례 통합과 분리를 거쳐 하나의 강력한 왕국으로 성장하게 되었다.
우선 레온 왕국(Kingdom of León)은 910년경 아스투리아스 왕국이 분열되면서 형성되었다. 레온은 아스투리아스 왕국의 후계자로, 이베리아 반도 북부의 기독교 왕국들 중 가장 강력한 세력 중 하나로 알폰소 3세(Alfonso III)의 후계자들에 의해 더욱 확장되었다. 이들은 레콩키스타(이슬람 세력으로부터 이베리아 반도를 재정복 하는 과정)를 통해 남쪽으로 영토를 넓혔다. 레온은 중세 초기의 중요한 기독교 중심지였으며, 특히 수도원과 성당을 중심으로 학문과 문화가 발달했다.
한편, 카스티야 왕국(Kingdom of Castile)은 원래 레온 왕국의 속국(county)으로 있었지만 11세기에 독립적인 왕국으로 성장하게 되었다. 카스티야는 점차 레온 왕국을 압도하게 되었고, 이베리아 반도의 가장 강력한 왕국 중 하나가 되었다. 카스티야도 레콩키스타에서 선두적인 역할을 하여 여러 이슬람 영토를 재정복 했다. 특히, 알폰소 6세(Alfonso VI)와 같은 왕들은 톨레도와 같은 중요한 도시를 정복하여 카스티야의 힘을 확고히 했다. 카스티야는 스페인어(Castellano)의 기원지로서, 스페인어가 발전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또한, 기사도 문학과 서사시가 번성한 곳이기도 하다.
두 왕국은 1037년, 카스티야 백작 페르난도 1세(Fernando I)가 레온 왕국의 왕위를 계승하면서 카스티야와 레온이 처음으로 통합되었다. 그러나 이 통합은 오래가지 못하고, 몇 차례 분리와 재통합이 반복되었다. 1230년 페르난도 3세(Fernando III) 통치 하에 두 왕국은 최종적으로 통합되었다. 페르난도 3세는 레온과 카스티야를 하나의 왕국으로 통합하고, 그 후 레콩키스타를 적극 추진하여 안달루시아 지방을 정복했다.
카스티야-레온 왕국은 이슬람 세력을 반도에서 완전히 몰아내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1492년, 카스티야 여왕 이사벨라 1세와 아라곤의 페르난도 2세의 결혼으로 스페인의 통일이 이루어지면서, 카스티야-레온은 스페인 왕국의 중심지로 자리 잡게 되었다. 카스티야-레온의 통합과 확장은 카스티야어(현재의 스페인어)의 확산을 촉진했다. 이후 스페인의 공식 언어로 자리 잡게 되었으며, 스페인 제국의 확장과 함께 전 세계로 퍼지게 되었다.
통일된 카스티야-레온 왕국은 중세 유럽에서 중요한 문화적, 정치적 중심지로 자리 잡았다. 이 지역은 고딕 건축, 중세 문학, 그리고 성당과 수도원 중심의 학문적 발전의 중심지로 알려졌다. 카스티야-레온 지역에는 아빌라(Ávila)와 같은 성곽 도시, 레온 대성당과 부르고스 대성당과 같은 걸작 건축물이 많이 남아 있다.
2021년 현재 부르고스 인구는 약 17.5만 명으로 우리나라의 ‘구리시’보다 작은 도시이다. 세계 유산의 하나인 “부르고스 대성당(산타마리아 대성당)”을 속속들이 관광하기로 했다. 이 성당은 1221년 건설을 시작하였지만 완성되지 못하고 200년이 지난 이후 성당을 재건축 또는 확장해서 1567년에 완공되었다.
산티아고 프랑스 순례 길 800Km에는 300여 개의 성당과 수도원 등이 존재하지만, 고딕양식의 부르고스 대성당과 로마네스크 양식의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대성당 두 개 만 유네스코의 세계유산으로 등록되어 있다.
부르고스 대성당(캐태드랄)의 면적은 1.03ha로 축구장의 약 1.5배나 되는 큰 성당이다. ‘부르고스 대성당’에는 17개의 경당과 여러 왕과 성인들의 시신이 안치되어 있다. 드론으로 하늘에서 부르고스 대성당을 찍어 보면 여느 성당도 그렇듯이 십자가 모양으로 설계되어 있다.
부르고스 대성당에는 3개의 출입문이 있는데, 원래 동쪽에 있는 정문은 왕족과 일반인들이, 남문은 성직자들이, 북문은 왕들만 출입할 수 있었다. 신분을 차별한 성당 구조물이었다. 순례자들은 5€ 티켓을 사서 남문을 통해 입당할 수 있다.
편의상 제왕들처럼 북문을 통해서 성당 안으로 들어가면서 투어 하기로 했다. 북문은 사도의 문 또는 왕관의 문(Puerta de la Coroneria)이라 부른다. 이 북문은 광장에서 8미터 정도 높은 곳에 위치하였다. 북문을 통해서 성당 내부로 들어가면 황금 계단의 꼭대기로 이어졌다. 이는 왕이 출현에 위엄을 보여주자는 목적으로 설계된 것 같다. 19세기에 파리 오페라 극장 건축 때 황금계단을 벤치마킹했다고 한다.
부르고스 대성당은 당초 산타마리아 성당이라고 불렀다. 산타 마리아에 관련된 기적과 전설을 나무로 조각하여 여기에 금박을 입혀 화려하게 형상화하고 있다. 성당본당 앞에는 이 지역출신 장군인 El Cid 부부 무덤이 자리 잡고 있다. 부르고스 대 성당은 건축가의 노력으로 많은 유적들이 자리 잡고 있다. 가장 유명한 건축가 중에는 후안 데 콜로니아(Juan de Colonia)와 그의 아들 시몬(Simon)을 들 수 있다.
시몬은 탑들과 파사드의 외부 첨탑, 원수(元帥)의 경당, 성 안나 경당 등을 만들었고, 펠리페 데 보르고냐는 성가대석, 둥근 지붕, 수랑 교차점 위의 등탑(燈塔) 등을 만들었다.
1567년에 건축가 후안 데 바예호(Juan de Vallejo)와 후안 데 카스타네다(Juan de Castaneda)가 천장에 별 장식을 한 둥근 지붕을 완공했을 때, 드디어 부르고스의 대성당은 중세시대의 걸작을 가장 많이 모아 놓은 곳의 하나로 각광을 받게 되었다. 예컨대, 페예헤리아 문(Puerta della Pellejería, 1516), 장식용 창살과 성가대 의자, 헌정된 예배실의 창살(1519), 국왕의 경비대장의 경당 제단의 장식벽, 성 안나(성모 마리아의 어머니) 경당의 제단 장식벽, 회랑의 북쪽으로 뻗은 부분에 있는 계단 등이다.
이 대성당에는 알론소 데 카르타헤나(Alonso de Cartagena) 주교, 아쿠냐(Acuña) 주교, 후안 오르테가 데 벨라스코(Juan Ortega de Velasco) 대수도원장, 페드로 에르난데스 데 벨라스코(Pedro Hernández de Velasco) 원수(元帥)와 그의 아내 도냐 멘 시아 데 멘도사(Doña Mencia de Mendoza) 등이 별도의 경당 안에 안장되어 있다.
그 후에도 건축가들은 본당의 제단 장식벽, 산타 엔리케(Santa Enrique) 경당의 엔리케 데 페랄타(Enrique de Peralta)의 묘지, 성 테클라(Tecla) 경당, 18세기에 만들어진 성가대 뒷벽의 장식과 같은 수많은 예술품이 성당 안에 자리 잡고 있다.
에리시라는 영화는 찰톤 헤스톤과 소피아 로렌이 주인공을 맡은 전쟁영화이다. 히메나(소피아 로렌)를 사랑한 청년기사 로드리고(찰톤 헤스톤)는 카스티야 왕국의 귀족 성주의 아들인 로드리고는 핸섬하고 용감한 청년기사이다.
그는 국왕인 페르난도의 맏아들이자 왕위를 계승받을 산쵸와 죽마고우이다. 그는 고메즈 백작의 딸인 히메나와의 사랑을 꿈꾸지만, 고메즈 백작은 히메나를 왕의 사촌인 오도네즈와 결혼시키려고 한다. 로드리고와 히메나의 사랑은 위기에 빠지며 우라카 공주의 음모로 추방당한다.
로드리고가 모시던 페르난도 국왕이 전투에서 사망하자, 그의 호화로운 생활은 끝장이 난다. 이 틈을 타 사악한 우라카 공주는 왕위계승자인 큰 오빠 산쵸를 몰아낼 음모를 꾸며 산쵸를 죽이고, 산쵸의 동생인 알폰소가 왕좌에 오르게 된다.
그 무렵 로드리고는 전장에서 생포한 무어족 족장들을 스페인 국민이라는 이유로 석방시켜 주고 '엘시드‘라는 영웅칭호를 얻지만, 그는 정적에 의하여 반역죄로 몰린다.
로드리고는 고메즈가 그의 딸인 히메나와의 결혼을 허락하지 않자 결투과정에서 그를 죽인다. 국왕과 고메즈 백작이 죽음으로 실의에 빠진 그는 부와 명예는 물론이고, 자신의 둘도 없는 친구인 왕위계승자 산쵸의 죽음과 사랑하는 여인 '히메나'까지 잃게 된다. 결국 그는 살인자라는 누명을 쓰고 카스티야 왕국에서 추방당한다.
고향을 떠나 방황하던 로드리고는 자기를 따르는 몇몇의 친구들과 아랍왕자 알무타민의 도움을 받아 잃었던 영토를 되찾고, 사람들로부터 승리자란 칭송을 듣게 되고 '엘시드'로 불린다. 그 여세를 몰아 새로운 왕의 적군이자 페닌슐라 공격을 선언한 밴 유서프에 대항하여 전쟁을 시작한다. 로드리고는 전쟁을 승리로 이끌면서 승승장구하여 왕과 동등한 대우를 받으며 영웅으로 추앙받게 된다.
(삼성 창업자 이병철의) 질문 6. 신은 왜 악인을 만들었는가? 예, 히틀러나 스탈린 또는 갖가지 흉악범들을?
차동엽 신부는 신이 인간에게 부여한 자유의지를 바탕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사랑이다. 그 사랑을 엉뚱하게 쓴 사람이 악인이다. 신이 악인을 만든 게 아니라 인간이 악인이 된 거다(차동엽: 265).
한편, 김안제 교수는 신은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부여하고 자율원칙을 인정하여 인간에게 불간섭주의를 고수해 왔다고 본다. 따라서 인간 스스로 선인도 되고 악인도 된다. 인간이 선악으로 갈리는 것은 신의 뜻이 아니라 인간 됨됨이에 따른 불가피한 자연현상이라고 보았다(김안제: 753).
이와 관련하여 이어령 교수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이어령: 31-33).
--이 질문을 히틀러에게 해보세요. ‘하나님은 왜 유대인 같은 악인을 만들었는가?’ 하고 역으로 질문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대신해서 내가 악인을 죽였노라’ 말할 거예요. (미국) 남북전쟁에서 남군과 북군이 기도할 때 뭐라고 할까요? 분명 ‘내가 상대하는 적은 모두 악인이오니 반드시 내가 오늘 전쟁에서 이기게 하소서’ 하고 얘기할 거예요. 남군이고 북군이고 똑같이 믿는 기독교의 하나님에게 서로 이런 기도를 하면 하나님이 누구 편을 들어야 하겠습니까.--
많은 종교에서는 신은 인간에게 선과 악을 선택할 자유와 함께, 인간이 스스로 도덕적 결정을 내리도록 허락하고 있다. 만약, 인간에게 자유 의지가 없었다면, 자신의 의지로 선을 행하거나 악을 피할 기회조차 가질 수 없을 것이다. 신이 인간에게 부여한 자유 의지 때문에 악한 선택이 가능해지므로, 악인들이 존재한다. 예를 들어, 히틀러나 스탈린 또는 흉악범들은 이 자유의지를 악용한 대표적인 사례로 볼 수 있다.
따라서 이러한 자유 의지는 인간이 자발적으로 선을 선택하고 도덕적 성장을 이루게 하는 중요한 요소로 여겨진다. 악의 존재와 그로 인한 고통은 여전히 어려운 과제이지만, 이를 통해 인류는 삶의 본질과 도덕적 가치를 더 깊이 인식하게 될 것이다.
성경은 인간은 하나님께 불순종한 원죄로 인하여 모두 죄인이라고 한다(로마서 3장 10절, 23절), 히틀러, 스탈린뿐 만 아니라 모든 인간은 죄인이라는 것이다. 다만 그들은 보통 사람에 비해 죄의 영향력과 심각성에 큰 차이가 있으므로, 그들의 죄는 더 무거운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 그러나 선인이든 악인이든 누구든지 예수를 믿게 되면 용서를 받고 구원을 받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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