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일 차 / 카스트로해리스~프로미스타)
17.
오늘(10.9)은 카스트로헤리스(Castrojeriz)를 출발하여 ▷ 프로미스타(Fromista)까지 24.7km를 5시간 30분 동안 4만 1천 보를 걸었다.
새벽 6시 10분 기상해서 짐을 꾸리고 배낭을 배달시킨 뒤, 발뒤꿈치에 생긴 물집을 바늘로 터뜨려 물을 빼고 밴드를 붙인 후 순례길을 나섰다. 새벽이 물러가기를 거부하고 있는 상태에서 카스트로헤리스 숙소를 떠나 20여 분 마을길을 빠져나와 평지를 30분 이상 걷다가 일출을 보기 위해서 고개 마루까지 올라갔다. 모스텔라레스 고개를 넘을 때까지 오르막길이고 그 이후는 평지라서 힘들지 않았다.
7시 20분쯤에 모스텔라레스 고개에 도착했다. 중세시대에 이곳은 강도들이나 도둑들이 순례자의 물건이나 돈을 약탈한 곳으로 유명했던 곳이다. 이 마을에 살았던 세바스찬이라는 성직자가 순례자들을 보호함으로써 마을의 수호성인이 되었다. 20여 명의 순례자들이 옹기종기 모여 해뜨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10여 분을 기다린 끝에 태양이 불끈 솟아오르자 기다리던 순례객들은 일제히 태양이 떠오른다고 소리쳤다. 뉴질랜드에서 온 한 순례자는 헤밍웨이 소설책 제목인 “The Sun Also Rises”라고 외쳤다. 문득 고등학생 때 문장이 하도 좋아서 외워두었던 "동명일기"를 그들에게 전하고 싶다.
“급히 눈을 들어 보니, 물 밑 홍운(紅雲)을 헤치고 큰 실오라기 같은 줄이 붉기 더욱 기이하며, 기운이 진홍 같은 것이 차차 나 손바닥 나비 같은 것이 그믐밤에 보는 숯불 빛 같더라. 차차 나오더니, 그 위로 작은 회오리밤 같은 것이 붉기 호박(琥珀) 구슬 같고, 맑고 통랑(通郞)하기는 호박보다 더 곱더라.
그 붉은 위로 훌훌 움직여 도는데, 처음 났던 붉은 기운이 백지 반 장 나비만큼 반듯이 비치며, 밤 걷던 기운이 해 되어 차차 커 가며, 큰 쟁반만 하여 불긋불긋, 번듯번듯 뛰놀며, 적색이 온 바다에 끼치며, 먼저 붉은 기운이 차차 가시며, 해 흔들며 뛰놀기 더욱 자주 하며 항아리 같고 독 같은 것이 좌우로 뛰놀며, 황홀히 번득여 양목(兩目)이 어질 하며, 붉은 기운이 명랑하여 첫 홍색을 헤치고 천중(天中)에 쟁반 같은 것이 수레바퀴 같아서 물속으로서 치밀어 받치듯이 올라붙으며, 항아리, 독 같은 기운이 스러지고, 처음 붉어 겉을 비추던 것은 모여 소의 혀처럼 드리워 물속에 풍덩 빠지는 듯싶더라.”(연안김 씨의 "동명일기" 중에서)
고등학교 때 국어 시간에 배운 동명일기의 일출 장면인데 이 일기에서는 직유법을 연속적으로 구사하여 한 문장이 250자나 되는 긴 문장을 머리가 비어 있던 어린 시절에는 달달 외워두었었다. 정말 기가 막힌 서정적인 묘사였다. 스페인 메세타 지평선에서 솟아오르는 붉은 태양을 본 대로 느낀 대로 마음에 담아둔다.
해 뜨기를 기다리던 순례자들이었지만 햇볕이 두려워 걷기 전에 얼굴에 선크림을 2중 3중으로 더덕더덕 바른다. 남녀 할 것 없이 챙이 긴 모자와 마스크로 안면을 가린 차림이 복면강도와 흡사하다. 태양이 떠오르는 모습은 예술이었지만 그리도 아름답던 태양이 메세타 평야를 걸어야 하는 순례자들에게 애물단지 같았다. 그 모든 것이 변하는 세상을 70년 동안 경험하지 않았던가?
마땅히 쉴만한 그늘하나 없는 광야에 내리쬐는 햇살은 흉기와 다름이 없다. 배낭에 있던 우산을 꺼내 양산으로 대용하면서 태양을 등지고 걸으니 기다란 그림자가 앞장서서 나를 향도하고 있다. 평원이 품어내는 열기가 여름으로 되돌아 간 느낌이다. 태양은 가을이라는 계절을 무색하게 만들고 있었다. 아내와 나는 타오르는 태양과 메세타 고원을 배경으로 셀카로 기념 촬영을 하고 고개를 터벅터벅 걸어 넘어간다.
순례길 좌우로 곳곳에 추수를 하지 않아 햇빛에 그을린 채로 서있는 해바라기 군상들은 우리나라 들판에서는 한 번도 보지 못한 낯선 풍경이다. 꽃잎은 프라이팬 위에서 타버린 달걀전처럼 시커멓고 우중충하기 짝이 없다. 태양을 쫓아다니던 일편단심 해바라기들은 배신감으로 가득 찬 몰골로 우두커니 서 있다. 해바라기 밭은 음산하게 변해 있었다.
얼굴짝만 크기의 해바라기 꽃 쟁반은 촌노의 얼굴처럼, 아니다, 페스트에 걸린 환자의 얼굴처럼 거무튀튀하다. 늙은 해바라기들은 태양을 바라보기가 쑥스러운지 아니면 태양으로부터 실연당한 수모와 충격 때문인지 고개를 푹 숙이고 바람에 시달리고 서 있다.
광야에 느닷없는 소슬바람이 불어와 말라비틀어진 해바라기 잎사귀들이 경련을 일으키며 떨고 있다. 가련 무쌍한 모습이다. 해바라기는 검게 탄 얼굴로 태양을 짝사랑하던 시절을 후회하며 실연으로 죽어간 동료들을 위해서 묵념을 올리는 중인가 보다.
을씨년스러운 해바라기 농장을 바라보다가 문득 “해바라기”라는 옛날 영화가 생각난다. 대학생 때인 70년대에 보았던 영화이 것이다. 사랑하는 연인들에게 전쟁은 너무나 가혹한 쓰라린 경험을 안겨주며 인간의 한계를 그려낸 영화였다. 그 시절 내 눈에는 해바라기보다는 주연 여배우인 ‘소피아 로렌’이 나의 해바라기였다. 그녀의 얼굴이 너무나 고혹적이어서 그 감동은 오래도록 기억에 남았다.
당시 고등학교를 졸업한 청년들 중에는 늦게 학교에 들어가 나이 많은 친구들은 애인과 헤어지기 싫어서 군입대를 기피하기도 했다. 그런 생각을 하게 만든 것이 '해바라기' 영화였다고 기억한다. 너무 오래돼서 그 줄거리가 가물가물 생각나지 않았다. 인터넷을 뒤져 줄거리를 찾아 읽으며 기억을 되살려 낸다.
2차 세계대전 중 시골처녀 지오바나(소피아 로렌)는 밀라노 출신의 안토니오(마르첼로 마스트로얀니)와 사랑에 빠지는데 안토니오는 전쟁터로 입대해야 했다. 안토니오는 지오바나와 더 긴 시간을 함께 보내기 위해 입대를 며칠 미루고 결혼을 한다. 두 사람은 헤어지며 전쟁이 끝난 후에 생환을 기약하며 슬픈 이별을 한다.
드디어 전쟁은 많은 사상자를 내고 끝났지만, 신랑 안토니오는 돌아오지 않았다. 하룻밤의 신부 지오바나는 소련의 전쟁터로 남편을 찾으러 떠난다. 우선 지오바나는 많은 전사자들이 묻힌 이 해바라기 밭에 들린다. 남편이 죽었다면 해바라기 밭에 누워있을 것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불길한 예감이 들지만 그녀는 남편의 전사를 부정한다. 실낱같은 희망으로 그를 찾아 나선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는 남편이 살아있음을 확인한다. 지오바나는 안토니오를 만나게 되는 순간은 기쁨과 격정이 넘쳤지만 현재의 그는 이미 다른 여자의 남편이자, 다른 아이들의 아버지가 되어 있었다. 배신당한 것이다.
수년간의 기다리고 만나려고 했던 그녀의 노력이 물거품으로 변하자 지오바나는 기차를 타고 안토니오를 떠난다. 남편 안토니오는 어렵사리 지오바나를 찾아 재회했지만 더 이상 재기할 수 없는 사랑임을 확인하고 서로 이해하고 현실을 인정하자며 긴 포옹을 끝으로 이별하고 말았던 이야기였다.
영화의 제목인 '해바라기'는 바로 이런 한 남자에 대한 고결하고 순결한 지오바나의 강한 의지나 희망, 모성애를 대변하는 영화이다. 소피아 로렌의 농염한 연기가 젊은 날의 나를 그녀의 광팬으로 만들었다. 청년시절 내내 그녀가 나오는 영화를 두루 섭렵하기도 했다.
믿었던 태양으로부터 배신당하고 생을 포기한 시들어 버린 해바라기, 빛나던 영광이 사라지고 시들어버린 모습으로 들판을 떠나지 못하고 있다.
초원의 빛 / 월리엄 워즈워드
한때 그리도 찬란했던 빛이 / 이제 눈앞에서 영원히 사라졌다 한들 / 초원의 빛이여, 꽃의 영광 어린 시간이여, / 아무것도 다시 되돌릴 수 없다 한들 어떠리. / 지금까지 있었고 앞으로도 영원히 있을 / 원초적인 연민으로 인간의 고통에서 벗어나 / 생기를 찾아 마음을 다스리며 / 죽음을 초월한 신앙의 힘으로 / 지혜로운 영혼을 가져다주는 세월 속에서 / 우리는 절대 슬퍼하지 않으며 그 속에 / 깊이 남겨진 오묘한 빛의 힘을 알게 되리라.
해바라기는 빈센트 반 고흐로부터 후한 대접을 받아 화폭으로 옮겨 삶을 지탱하기도 했다. 그는 밝은 색감과 붓 터치로 탁자 위에 해바라기 꽃을 자연과 연결시키며, 생명력과 활기를 표현하고자 했으며, 시들어 가는 꽃의 고독과 상실을 표현하였다.
해바라기는 늙어서 고개를 가눌 수 없음에도 해를 바라보려고 고개를 비틀고 서 있다. '일편단심 민들레'가 아니라 '일편단심 해바라기'라고 노래 불러야 옳다. 그러나 해바라기 정치인을 가리켜 우리는 아붓꾼이라고 부른다. 요즈음 세상에는 출세나 성공을 위해 해바라기로 살고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돈을 찾아서 헤매는 사람, 권력을 향해서 매진하는 사람들, 사랑을 향해서 매진하는 인간들에게 해바라기는 냉소를 머금은 채 순례자들을 맞이하는 척하다가 배웅한다.
바람이 거세게 불던 가을날, 늙은 나를 위해 비틀거리며 춤을 추던 해바라기는 내 눈을 따라오지 못한다. 제자리에 굳은 채로 고개 숙이고 바람에 흔들리며 나를 배웅하는 모습이 처연하다.
해바라기 밭이 끝나자 다시 황량한 벌판이 우리를 맞이한다. H교수가 군대에 있을 때 열렬하게 연애하던 여자 친구와 결혼을 하지 않았다는 고해를 듣고 나름 충격을 받았다. 한때는 물고 빨며, 울고 불고 사랑했지만, 헤어지기보다는 차라리 자살을 택할 할 것이라는 과격하기 짝이 없는 표현으로 여인의 마음을 붙들려고 밤새우며 쓴 연애편지를 주고받았건만 여인과 끝내는 헤어지고 말았단다.
그 마음의 상처는 오죽했을까? 어느 쪽이 결별의 원인을 제공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슬픈 러브스토리가 아닐 수 없다. 그녀는 누구랑 결혼했고 지금쯤 어떻게 살고 있을까? 유학시절에 만난 부인 얘기까지 들어주는 취미를 즐기면서 추임새를 넣는데 열중한다. 얫 얘기가 그치지 않는다. 대학교수로서의 권위주의 시대의 애환에 대하여, 민주화 시대의 교학(교수와 학생) 간의 갈등에 대하여 소회를 토로했다.
군대에서 잠깐 만났다 홀연히 헤어졌던 몇몇 전우들의 이름을 들먹이며 그들은 어디서 어떻게 살고 있을까? 죽은 사람도 벌써 넷이나 된다 하니 인생은 덧없다는 말이 실감이 난다. 옛날을 회상하는 것까지는 좋았지만 순례길에서 나 혼자만의 명상이나 아내와의 대화 시간은 그만큼 줄어들었다. 다행히(?) H교수 발가락에 생긴 물집이 때문에 더 이상 못 걷겠다며 가까운 마을에서 하룻밤 머물고 걸어야겠다며 자발적으로 낙오자의 길을 택해서 나와 동행하지 못함을 아쉽게 생각한다.
오늘의 목적지인 '프로미스타'에 접근하는 길과 나란히 흐르는 카스티아 운하는 메세타의 황량함을 씻어 냈다. 운하를 따라 큰 키의 포플러 나무들이 노란 옷으로 갈아입고 우리를 맞았다. 잎사귀들이 바람을 맞아 흔들리며 순례자들을 환영했다. 운하를 따라가고 싶은 유람선은 손님이 없어 밧줄에 매여 졸고 물 위에 떠있다. 메세타 고원에서 폭 50센티미터의 끝없는 인공 수로만 보아 오다가 오랜만에 보는 긴 운하였으니 반갑지 아니하랴?.
이 메세타에는 그 흔한 단풍나무나 우리나라의 가을꽃의 대명사라 할 수 있는 코스모스도 한 그루 보이지 않았다. 곳곳에 지난여름 피었다가 져버린 유채꽃과 양귀비 꽃나무가 항암치료를 받은 허수아비처럼 빼대 만 앙상하게 남은 몰골로 바람을 버티고 있다.
프로미스타에 위치한 산 마르틴 데 투르 교회는 11세기에 건축된 로마네스크 양식의 아름다운 건축물이었다.
산 마르틴은 교회의 건축에 영감을 주었고, 그의 축복을 받은 교회는 수세기 동안 순례자들에게 평화와 안식을 제공해 왔다. 교회 안에는 성수가 솟는 작은 분수가 있었다. 중세 시대에 한 순례자가 심각한 피부병을 앓고 있었는데, 이 교회의 성수로 세례를 받은 후 기적적으로 병이 치유되었다. 한밤중에 하늘에서 밝은 빛이 내려와 산 마르틴 데 투르 교회를 비추었고, 이 빛은 마치 성 마르틴의 존재를 상징하는 듯했다.
이 현상을 목격한 순례자들은 이를 성 마르틴의 보호와 인도로 여겼다. 에테로베카의 샘이나 피오호 선생님, 프로미스타의 성수를 보면 이 지역에는 성수가 많이 나오는 모양이다.
예약한 호텔에 도착해서 체크인하고 순례길 맛집을 인터넷으로 체크해서 레스토랑을 두 군데 찾아갔지만 앉을자리가 없어서 그저 밀려 나왔다. 무거운 발걸음으로 세 번째 들린 바에서 겨우 테이블을 찾아서 점심 겸 저녁 식사를 했다. 레스토랑은 큼지막하고 번듯하지만 식탁 위에서 먹방을 찍는 파리들이 검은 주근깨처럼 웅크리고 앉아서 인간의 눈치를 보고 있다.
나는 파리하면 지겨운 기억 때문에 다른 사람보다 파리를 열 배나 싫어한다. 중3 때 서울서 자취 생활을 하다가 수재를 당해서 마포 변두리 분뇨처리장이 넘쳐 물이 빠지자 마을이 분뇨로 도금을 했다. 그해 여름부터 가을까지 파리가 수해지역을 점령하고 물러가지 않았다.
레스토랑에서 음식이 나오자 파리들이 선점해 버린다. 순례길 여행기나 기행문에서 파리의 횡포에 대하여 한 줄도 언급하지 않았기 때문에 당황스러웠다. 파리는 무슨 원한이 있다고 젊은 시절부터 노년까지 나를 못살게 구는지?
순례길목에 있는 목장에서 원정 나온 파리들은 약삭빨랐다. 앵그리 영맨들처럼 '죽어도 좋다'는 배짱으로 사는 불한당 같았다. 나의 손바닥이 합장하는 틈에 끼어 뻥튀기 과자가 되기 전까지는 순례자들의 손바닥을 우습게 아는 것 같았다.
내 손의 매운 맛을 모르는 파리들. 하지만 순간적인 합장으로 한 마리의 파리도 잡을 수 없을 정도로 날쌔기 그지없다. 합장에는 부처님의 마음이 녹여 있어서 살려주시는지 쫓는 효과 밖에 없다. 약을 올리려는지 냄새로 원래 앉았던 자리로 다시 내려앉는다. 파리들의 오기인가? 군대에서는 “파리 잘 잡는 이 병장”으로 포상휴가를 챙긴 내가 순례길 마을 파리는 한 마리도 잡지 못했다.
이런 사실이 이곳 지방신문에 누설될까 봐 망신스럽다. 늙은이의 행동이 둔해서 그런가? 파리가 날쌔서 그럴까?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파리 킬러를 스카우트해 와야 할 것 같다. 새들이 자취를 감추었으니 파리들이 설치는 건가? 파리는 순례자의 인격을 간파한 것 같았다. 아니면 순례자들이 피곤하여 기력이 달리다 보니 파리 한 마리도 손으로 잡을 수 없을 거라는 사실을 벌써 알아차린 모양이다.
순례자의 심성에 불교 정신이 있다는 사실을 파악한 것이 아닐까? 아내는 질색을 하며 파리를 쫓았지만 소용이 없다. 음식 위에 앉아서 네 개의 다리로 낯을 천연덕스럽게 비벼대며 음식 맛을 보고 있다. 파리가 다리를 비비는 것은 인간보다 먼저 먹으니 미안해서 사과하는 거라고 아는 체한다.
과학도인 아내는 내 농담에 찬물을 끼얹어버린다.
"파리는 입이 아니라 다리로 맛을 느끼는 데 파리의 다리에 무수하게 털이 나 있기 때문에 이물질이 달라붙어 있으면 맛을 못 느낀대요, 그래서 다리에 붙어 있는 이 물질을 떼내려고 시시각각 다리를 비빈다고 들었어요."
늙은 순례자의 늦은 점심과 이른 저녁 식사를 시종 방해했다. 돈 내고 사 먹는 우리보다 먼저 음식을 시식하려고 벼르는 것 같았다. 파리들이 다리로 전염병을 옮기지 않을까 걱정된다. 목장에서 쇠똥이나 핥아먹고 살아야 하는 다리 여섯 곤충인 주제에 레스토랑에서 맛있는 음식 맛을 본 이상 물러날 낌새를 보이지 않았다.
파리는 침대까지 따라와 얼굴 마사지를 해주고, 가면서 자기 영역을 표시하느라고 똥까지 싸고 날아간다. 얼굴에는 이미 자리 잡은 주근깨가 그들의 동료가 깔리고 간 것으로 착각한 모양이다. 늙은이의 얼굴을 파리군단의 해우소가 되다니. 슬프다. 늙은 나를 졸로 보는가? 아니면 대자대비한 내 마음을 눈치챈 것 같아 불행 중 다행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삼성창업자 이병철의) 질문 9. 종교란 무엇인가? 왜 인간에게 필요한가?
종교는 인간이 삶과 세계의 의미, 초월적인 존재(신, 신성, 또는 우주적 원리)에 대한 믿음과 이를 기반으로 한 실천과 의례를 통해 표현하는 체계이다.
차동엽 신부는 인간이란 모두 유한한 존재이므로 무한을 동경한다. 그 염원이 하나의 형식이 되었을 때 종교가 된다고 설명한다. 종교는 인간이 느끼는 벽 때문에 영원을 지향할 수 없어서 종교적으로 해결할 필요가 있다(차동엽: 질문 9에 대한 답변/ 차동엽:138-148).
이에 김안제 교수는 차 신부의 의견에 동의하면서 '인간의식의 의존성'을 종교의 필요성에다 추가한다. 절대인 능력을 가진 신에게 의지함으로써 인간은 마음의 평온과 안심을 얻게 된다고 설명한다(김안제: 754).
이어령교수는 인간은 죽음 이후의 세계에 대한 두려움이나 불안 때문에 종교에 의존하게 된다고 설명한다(이어령: 39-40)
인간은 다음과 같은 이유로 종교는 필요하다고 생각한다(레베카 맥클러플린:26-40).
첫째. 종교는 인간이 자신의 존재 이유와 삶의 목적을 찾는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많은 종교가 삶의 목적이 있으며, 각 개인의 삶이 큰 우주적 계획의 일부라고 가르친다.
둘째. 종교는 선과 악, 올바른 삶에 대한 가르침을 통해 도덕적 기준을 제시한다. 종교는 이를 통해 사회 구성원들이 조화롭게 살아가도록 돌봐 준다.
셋째, 종교는 죽음, 상실, 고통과 같은 인간의 필연적인 불행에 대하여 위로와 희망을 제공한다. 신앙을 통해 많은 사람들이 고난 속에서도 내면의 평안을 얻고 삶을 계속하는 힘을 얻는다.
넷째, 종교는 사람들이 함께 모여 같은 믿음을 공유하는 공동체를 형성하게 한다. 이러한 공동체는 사람에게 소속감과 연대감을 주며, 서로 돕고 지지하는 사회적 역할을 수행한다.
요컨대, 종교는 인간의 본질적 질문들—삶과 죽음, 선과 악, 목적과 도덕에 대한 고민—에 대한 답을 제시하며, 사람들에게 내면적 평안과 희망을 제공하기 때문에 필요한 수단이 된다.
--계속--
Copyrightⓒ소울메이트 이주희 All rights reserved. 이 글의 무단전재는 금지하지만 공유는 가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