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일 차 / 오르니요스~카스트로해리스)
오늘(10.8) 이동경로는 오르니요스 델 카미노(Hornllos del Camino)를 출발하여 ▷ 카스트로헤리스(Castrojerz)까지 19.9km 거리를 4시간 30분 동안 3만 5천 보를 걸었다. 완만한 오르막길이고 비교적 짧은 거리였지만 황량한 평야라서 낯설고 지루했다.
눈앞에 보이는 풍경이라고는 멀리 희미한 지평선과 끝없는 밀의 밑동뿐인 메세타 평원에 진입했다. 순례길은 메세타 평원을 가르며 손금처럼 뻗어 나 있었다. 스페인 면적의 5분의 2를 차지할 정도로 광활한 메세타 지역. 카미노데 산티아고 순례길 코스에서 만난 풍경 중에서 가장 황량해서 죽을 지경이다.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가장 힘들다는 평판이 나올만하다. 멀리 지평선이 보이지만 거리가 얼마나 되는지 감을 잡을 수 없다. “메세타 고원”은 정신적 도전을 감행하는 코스로 알려져 있다. 순례길 베테랑들은 이곳이 ‘맨 오브 라 만차’, 즉 돈키호테의 무대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것의 진위는 알 수 없다. 심리적으로 가장 어려운 구간이라고 알려져 있었다.
산맥은 스페인의 고원지대의 가장자리를 둘러싸고 있기도 하지만, 어떤 산자락은 고원지대 안으로 들어오려다 밀들에게 밀려 포기한 것 같이 보였다. 선험자들은 이곳이 힘이 드니까 자동차를 타고 점프하라는 충고가 넘치는 구간이었다. 실제로 시간이 부족하거나 의지가 박약하거나, 신체 조건이 안 좋은 순례자들은 메세타 평원을 건너뛰고 부르고스에서 레온까지 버스를 타고 가는 순례자들도 많았다. 하지만 우리 부부는 시간부자이기 때문에 메세타 평원을 걸어서 통과하기로 밀원결의(?)를 했다. 험한 길로 지레 겁먹고 단단한 각오를 하면서 걸음을 걸으며 생각을 수차 가다듬는다.
우리는 일찍이 미국 네바다 사막과 중국의 사막길인 실크로드인 우루무치에서 신장까지 걸었던 경험의 보유자가 아닌가? 평원이기 때문에 사막보다는 한결 쉬울 것으로 생각하고 완주를 다짐한 역전의 용사들이다. 다만, 내 나이가 그때보다는 10살이나 많다는 사실은 일부러 잊어버렸다.
메세타 들길은 평지나 다름이 없지만 햇볕을 가릴 만한 나무 그늘이 전혀 없고, 아기자기한 오솔길도 어디론가 자취를 감추어버린지 세 시간이나 되었다. 걷다가 피곤하면 쉬어갈 벤치도 없고 깔고 앉을 돌멩이조차 보이지 않는다. 깔판도 준비하지 않았기 때문에 맨땅에 주저앉을 수도 없다.
들판은 온통 갈색 도화지들이 햇빛을 안은 채로 펼쳐진 모습이다. 쓸쓸한 평원에 녹색 가운을 입혀보는 상상을 하며 하염없이 터벅터벅 걸어야 했다. 길은 외길이라 한 시간 이상 이정표를 무시하고 걸어도 상관없을 것처럼 황당 무괴가 아니라 '황량무괴'하기 짝이 없다. 실제로 많은 순례자들은 핸드폰을 감상하면서 무료한 발걸음을 달래며 걸었다.
오랜 세월 순례자들의 발길에 차인 자갈들이 약간 깔려 있는 흙길이다. 자동차 한 대가 쌍방에서 교차할 만한 지나갈 정도의 넓이의 직선도로였다. 그러나 이 길은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로 가는 일방통행이었다. 실제로 양쪽 방향의 자동차를 만나지는 않았다. 다만, 자전거를 탄 순례자들이 큰소리로 휘파람으로 자기들에게 길을 비켜 달라는 신호를 하며 지나갔다. 자전거를 탄 7,8명의 순례자 무리들은 “브엔 까미노(행운을 빈다)를 외치며 걷는 순례자들을 남겨 둔 채로 약이라도 올리는 듯 제갈길을 달려가버린다.
어릴 적에 읍으로 초등학교를 다니느라고 깡촌을 연결해 준 신작로 4킬로미터를 걸으며 컸다. 그때 힘들게 걸었던 팍팍한 걸음이 재생되는 기분이 든다. 하지만 휴대폰을 끄고 걸으면 명상하기 딱 좋은 길이다. 도중에 미국에서 온 76세의 한국교포 노인을 만났다. 그 할머니는 네 번째 산티아고를 방문했다며 걸음이 무척 빨랐다. 한 번에 100km씩 이번에 걸으면 전 구간의 반을 걷는다며 생전에 전코스를 완주할지 모르겠다고 웃어서 따라 웃었다.
조그만 마을을 빠져나오니 재빠르게 순례길로 마중 나온 햇빛이 내 그림자를 앞장 세웠다. 순례길목 좌우로 밀밭의 DNA라도 되는 듯 추수가 끝나 밀짚조차 거두어버렸기에 밑동만 같은 키로 줄을 맞추고 있는 건조한 평원이다.
갈색 밀밭에 초록색으로 색칠을 해 본다. 자연에다 색깔을 입히려는 내가 건방지다는 생각에 하늘을 우러러본다. 푸른 하늘에는 뭉게구름이 떼 지어 어디론가 흘러가고 있다. 하늘은 구름 덕분에 더 푸르게 보이더니 이내 변덕을 부리려는 모습으로 무대가 변해 마음은 심란해진다.
비가 오면 어떤다? 안 가본 사람은 모른다. 거친 황야의 소솔함이 살갗을 헤집듯 아프다는 걸.
초등학교와 중2까지 고향에 살았던 나, 어린 나이에 농사가 얼마나 힘들었던가? 천수답뿐인 우리 집 논들. 비 오는 날을 기다려 모를 심을 때 기껏해야 못줄을 잡는 정도로 농사일을 거들었지만 나로서는 힘들고 벅찼던 일이 잊히지 않는다.
아버지는 나에게 송아지 한 마리를 사주며 키워서 그 돈으로 중학교에 가라고 말씀하셨다. 봄여름가을에는 꼴을 베다가 송아지를 먹여야 했다. 밀밭에 밀을 구워 먹던 배고픈 낭만의 시절의 기억이 삼삼하게 떠오른다. 밀타작이나 보리타작으로 배고픔을 잊어가면서 송아지 풀을 베어 나르던 시절이 있었다.
동네 형아들을 따라 풀베러 가면 밀밭 속으로 기어 들어가 자기들은 화투를 치고 나더러 망을 보며 풀이나 베라 했다. 어른들이 나타나면 휘파람으로 신호를 보내라는 부당한 명령을 수행해야 했다. 형아들이 대마잎을 말아 피우며 연기를 내게 품어 대면서 너도 한 모금 하라며 권했을 때 나는 생기침으로 그들에게 저항을 했었다.
이제 수천만 리 떨어진 스페인 들녘에서 고향이 그립고 그 형들이 생각나 눈물짓는다. 몇몇 악동 형들이 벌써 세상을 떠나고 그 자리는 비어있는 상태이다. 하기사 60년 전의 추억이니까 무리는 아닐 것이다. 스페인 메세타 평원에다 고향의 추억을 초대하며 정지용의 시 “향수” 한 토막을 먼지 마신 컬컬한 목소리로 흥얼거린다.
―넓은 들 동쪽 끝으로 / 옛이야기 지줄 대는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고/ 얼룩빼기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 그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어릴 때 나는 우리 집안의 농토는 왜 그렇게 적게 주셨는지 하느님께 항의하고 싶었다. 하지만 농토가 넓었다면 오늘의 나는 지긋지긋한 농사를 지으며 농군으로 살다가 세상을 떠야 했을 것이다. 모르면 몰라도 쌀값을 올려달라고 몇 번쯤 광화문이나 서울역에 데모하려고 트랙터를 끌고 상경했을지도 모른다. 이제야 하느님의 가호를 받았다는 생각이 든다. 고마워요, 감사해요 나의 하느님!
가난한 집에 태어난 덕분에 농사를 접고 부모님 결단으로 중2 때 서울로 유학하는 영광을 입었다. 말이 좋아 유학이지 배움을 즐길 여유가 없게 배고픔이 나를 괴롭혔다. 도시의 삶은 말로 형언하기 어려울 정도로 곤궁했지만 고향에서 농사를 짓고 사는 것 보다야 백배나 낫다고 자위했다. 키울 송아지도 없을 뿐만 아니라 부모님의 간섭을 받지 않아서 자유롭게 지낼 수 있어서 그나마 다행이었다.
고향에서 배부른 자유가 사라지고 배고픈 부자유를 참으며 소위 청운의 꿈을 경작해야 했다. 도시락은 고향에서 보내준 쌀로 밥을 지어 싸가지만 반찬거리가 마땅하지 않았다. 하지만 나의 반찬 만드는 창조정신은 못 말려 릴 정도였다. 고춧가루에다 미원가루와 소금을 섞어서 종이에 싸서 등교했다. 누가 볼세라 학교 뒷동산 솔밭으로 숨어 들어가 혼자서 점심을 해결해야 했다. 어느 날 친구들에게 발각이 되어 그들이 반찬을 나눠줘서 먹었던 시절이 나를 한때 서럽게 만들었다. 그런 내가 이제 무엇을 위해 이 평원까지 진출하여 낑낑대고 있는가?
봄여름에 순례길을 걷는 사람들을 엄청나게 감탄시킨다는 나비들의 군무도 보이지 않는다. 일찌감치 세상을 떠난 모양이다. 전라도 함평 나비축제에서 보던 장관을 메세타에서 꿈꾸었던 내가 바보가 된 것 같다. 새들도 모습을 보이지 않아 새들이 부르는 노랫소리도 들을 수 없다. 새들의 먹이가 되는 곤충조차도 눈에 띄지 않았다. 새들도 한나절에 브레이크 타임을 즐기는 모양이다. 창공을 선회하던 독수리인지 솔개인지 몰라도 새 한 마리가 나는 것을 멈춘 채로 평원에서 발견한 있는 먹잇감을 조준하고 있는 모양새가 자못 진지하기만 하다.
아소프라와 시루에나로 가는 길 옆으로 골프클럽이 보였다. 작년에 골프장에서 배수구 속으로 들어간 골프공을 손으로 꺼내려다 살모사에게 물려 한 달 이상을 고생했던 친구가 생각났다. 순례길을 걸으며 후미진 곳을 찾아서 크고 작은 일을 볼 때마다 살모사에게 물릴까 봐 긴장하기도 했다.
갈색 들판을 바라보는 기분은 자꾸만 쓸쓸해진다. 대지에서 데워진 더운 바람이 가끔씩 지나갈 뿐인 텅 빈 벌판에 모처럼 우뚝 선 구조물이 보인다. 농부들이 만들어 놓은 큰 건물 같은 인공 구조물은 밀집 낟가리였다. 밀을 타작하고 남은 밀짚은 가축 사료나 마구간 소들의 침구재료로 유용할 것이다. 퇴비나 멀칭(수분 유지를 위한 밭 덮개)으로도 쓰인다. 밀집으로는 공예품도 만든다고 들었지만 밀짚 모자만 본 적이 있을 뿐이다.
설프형 순례자들이 벌판에서 '바보들의 행진'하다가 느닷없이 나타난 지형지물을 보는 순간 은근한 반가움을 느끼며 쾌재를 부른다. 순례자들은 이 낟가리 뒤로 돌아가서 바지를 내리고 큰일을 보면 수치심을 잠재워 줄 것 같았다. 실제로 낟가리 뒤에는 수많은 순례객들이 해우소로 사용한 흔적이 너절하게 깔려 질척거리고 파리떼들이 잔치를 벌이고 있다. 어떤 무리들은 인간이 내지르고 떠난 뒷자리에서 상렬지사를 벌이고 있는 모습도 내 눈에 띈다.
목적지 카스트로헤리스의 알베르게에 짐을 맡겨 놓고 언덕에 자리 잡은 낡은 토성으로 올라갔다. 오늘따라 입장료가 없는 날이라서 지키는 사람도 없다. H교수를 만나 같이 카스트로헤리스 성을 탐방했다. 성은 주변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했지만 폐허나 다름이 없는 상태였다.
이 성은 누가 쌓고 누구를 방어했는가? 입구에 세워진 안내 간판에 중세 시대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되지만, 어쩌면 고대 로마 시대의 요새나 서고트족의 거점이었을 수도 있다고 추정하나 증거는 없단다. 기독교인과 무어인 사이의 전투 같은 격렬한 순간들이 있었던 것 같다.
1359년에는 카스티야의 레오노르 왕비가 이곳에 투옥되기도 했다. 페드로 1세 왕이 그의 고모인 레오노르 왕비를 가뒀던 감옥으로도 사용되었다고 한다. 현재 남아있는 유적들 중에는 14세기부터 18세기에 지어진 지하실 같은 흔적들도 보였다. 거센 바람이 더위를 껴안고 떠났다. 바람이 자구만 눈물을 짜 낼 정도의 먼지를 안겨주었다.
순례길 33일간 걷는 순례자라면 순례길에서 매일 평균 25Km 하프 마라톤 코스를 걸어야 하기 때문에 하루 삼시 세끼를 꼭꼭 챙겨 먹어야 한다. 중간중간에 음식점에 들려 간식을 해야 걸을 수 있는 에너지가 만들어지고 체력이 보강된다.
산티아고 순례길에서 발견되는 식당의 종류는 대체로 바, 카페, 레스토랑 등이 있으며 그 특성은 다음 <표-1>과 같다.
<표-1> 스페인 식당의 종류
지난 세월 나는 해외여행을 하면서 터득한 경험을 바탕으로 순례길에서 식당 이용 방법과 전략을 세울 수 있었다.
첫째, 구글 맵으로 매일 순례길 코스에 있는 평판이 좋은 맛집을 찾아냈다. 음식점은 고객의 평판을 무시할 수 없다. 매일 다른 목적지에 있는 식당을 찾아 영업여부와 식사 가능시간(아침, 점심, 저녁식사 시간)과 낮잠 시간인 시에스타시간(오후 2~4시)을 체크했다. 예약을 요구하는 식당은 휴대폰으로 예약했다.
음식의 구분은 바, 카페나 레스토랑 입구에 게시된 메뉴표를 구글 번역기를 이용하여 식재료를 파악해서 음식의 맛을 감 잡았다. 특히, 음식점 문 앞에 세워둔 게시판에서 오늘의 메뉴 <델 디어(코스 요리)>= <순례자 메뉴>를 확인했다. 음식 이름을 구글에서 검색하여 설명과 이미지를 찾아 자료와 양념을 파악하여 머릿속에 기억하려고 노력했다.
둘째, 아침식사(9시~12시)는 바나 카페를 이용해서 간단히 때웠다. 아침을 제공하는 알베르게나 호텔에서 아침 식사를 하면 여간 편리하지 않다. 식당 메뉴를 보고 음식+음료수가 하나씩 골라 조합하여 아침 식단을 만들었다. 가격은 3.5€ 안팎으로 유럽에서 유례를 찾기 어려울 정도로 저렴한 수준이다(<표-1> 참조).
<표-1> 바와 카페 음식 종류
셋째, 점심(1시~)은 코스요리인 < 메뉴 델 디어>=<순례자 메뉴>중에서 골랐다. 나와 아내는 처음 5일간은 서로 다른 음식을 주문해서 한꺼번에 여섯 가지 음식을 맛을 보고 대강을 파악하려고 시도했다. 예컨대, 전채요리로 나는 수프를, 아내는 샐러드를 시킨다. 물은 돈을 받는 경우가 많으니까 확인하고 계산해야 한다.
<표-2> 레스토랑의 음식 종류
메인요리는 나는 네발 달린 육류, 아내는 생선을, 후식은 나는 아이스크림을, 아내는 커피를 시켜서 나눠 먹을 수 있다. 처음 5일 동안 순례길 음식을 맛을 보고 감을 잡았고 그 이후부터는 각자 기호에 따라 음식을 시켜 먹었다. 끼니마다 음식량이 많아서 점심과 저녁을 한꺼번에 해결하고 저녁에는 술이나 차를 마시는 일상도 자주 있었다.
넷째, 저녁(8시 이후) 식사는 그 마을이나 도시에 있는 토속 맛집을 찾아가서 식도락을 하기로 했다. 이런 식당은 알베르게 관계자나 마을 사람들의 추천을 받아 찾아가면 만족하였다. 가능하면 각자 스페인 대표 음식을 단품으로 주문하여 먹었다.
다섯째, 식당매너를 최대한 지키도록 노력했다. 식당에 들어가면 웨이터에게 몇 사람인지를 말하고 자리를 요청해야 한다. 웨이터의 안내를 받아 자리를 잡는다. 음식주문으로부터 나오는 시간까지 한민족의 빨리빨리라는 근성을 지양하고 스페인 풍습에 익숙해지기로 했다.
음식에 대한 정보는 미리 공부하면 식탁에서 바로 주문할 수 있다. 코스 요리는 시간이 많이 들기 때문에 후식을 주문하면서 계산서를 같이 요구하면 시간을 절약할 수 있다. 종업원에게 팁은 서비스하는 거 봐서 주기로 했다. 순례길에 있는 레스토랑 대부분이 한 사람 아니면 두 사람이 1인 3역이나 2인 4역을 하면서 서비스하는 형편이므로 시간이 많이 걸린다. 며칠 지나니까 그러려니 하고 받아들인다. 그래서 식당에서 나와 아내는 행동지침을 정했다.
“빨리 가려면 굶고 가고, 굶지 않으려면 느긋하게 가자.”
순례길에서 만날 수 있는 지방별 대표 메뉴와 그 이미지는 다음과 같다.
여섯째, 시에스타 시간과 저녁 식사 시간(1시~8시)까지 간식은 미리 준비하고 눈에 보일 때마다 구입했다. 간식거리는 사탕, 초콜릿, 바나나, 콜라, 과일 등이 좋은데 슈퍼나 마켓에서 미리 구매해서 이동하는 것이 좋다. 그러나 순례길을 걷는 도중에 영업 중인 바나 푸드 트럭이나 도네이션 바에 간식을 사 먹어보는 것도 여행자의 낭만이라고 생각한다. 도네이션 바에 나오는 음식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먹고 적은 돈이라도 기부하는 것을 습관화할 필요가 있다.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나눔을 보람으로 아는 것처럼 나도 기부를 즐기고 싶다.
일곱째, 순례길목에 있는 한국 식당이 있으면 지나치지 않았다. 사실 나와 아내는 한식에 목을 매달지 않는 체질이다. 그동안 해외여행을 하면서 입이 세계화되어 있었지만 매일 목적지에 한국식당이 존재하는지 여부를 체크했다. 순례길에 라면 파는 집이 여러 군데 있었다.
다만, 라면 사리 두 개로 세 그릇을 만든 듯한 양이다. 한 그릇에 6천 원씩 받고 팔았다. 한국식당도 예약이 필요한 곳은 예약을 하지 않으면 음식을 먹을 수 없다. 예약하지 않고 무작정 찾아가 통사정해도 소용이 없어서 남들이 맛있게 먹는 모습만 보며 입맛을 다시며 되돌아 나와야 했다. 결론은 한국식당도 영업시간을 반드시 확인하고 찾아가야 한다는 거다.
여덟째, 5일에 한 번쯤은 음식을 셀프 조리해서 먹었다. 하루도 쉬지 않고 걷다 보면 집밥이 그리워지기도 했다. 시니어들 중에서는 나보다 한식이 절실한 사람들이 많아 보였다. 식당에서 매식을 하면 1인당 15€가 들어가는 데 음식을 만들어 먹으면 5€로 정도로 비용을 절약할 수 있다.
이를 위해서 취사를 할 수 있는 알베르게를 고르거나, 아파트형 숙소를 찾아 예약을 해야 한다. 한 가지 슈퍼에서 살 수 있는 스페인 삼겹살은 베이컨용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베이컨은 소금 간이 되어 있기 때문에 베이컨이 삼겹살인줄 잘못 알고 베이컨을 구워서 소금을 뿌리면 안 된다. 유럽 여행이 처음인 우리나라 순례객들이 햄에 소금을 뿌려서 먹지 못하는 과오를 곧잘 범하곤 한다. 실수로 배우는 사람들이 많은데 그 해프닝마저도 즐겁다.
마지막으로 식당에서 쓰는 기초 스페인어 단어를 공부했다. 스페인 말을 못 하고 못 알아듣기 때문에 일단 영어로 소통을 시도하되 영어가 통하지 않으면, 통역기를 내밀 수밖에 도리가 없다. 그렇다 하더라도 스페인 공부를 약간은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시간 나는 대로 스페인 단어를 암송했다. 나처럼 공부가 취미이고 직업인 사람들은 문제가 되지 않지만 공부하기 싫어하는 사람은 이마저도 부담이 될 수도 있을 거다. 산티아고 순례길을 완주하고 생각을 정리해 보니 최소한 1) 문자 발음이 영어 발음과 차이가 나는 것 2) 숫자는 1~10까지, 음식이름 10개 정도, 식당 관련 회화는 10개 문장 정도는 일주일 안에 암기가 되어야 할 것 같다.
(삼성창업자 이병철의) 질문 8. 성경은 어떻게 만들어졌는가? 그것이 하느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어떻게 증명할 수 있는가?
차동엽 신부에 의하면 신구약 성경은 전체 이야기를 관통하는 일관된 기조가 존재하고 있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성경의 원저자는 저 위에 계신 분이고, 성령이고 그 밑에 있는 사람들의 입과 손과 가슴으로 전해진 것이다(차동엽: 질문 8에 대한 대답).
김안제 교수는 성경은 매우 지혜로운 선지자들이 어떤 영감을 얻어 적은 글들이 오랫동안 보완되고 다듬어져서 만들어진 것이라 추정한다(김안제:753).
이어령 교수는 성경은 알다시피 아랍어를 히브리어, 그리스어로 옮긴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것을 다시 라틴어로 옮기고, 또다시 각 나라말로 옮긴 것이란다.
성서 무오류설이란 그 진리에 오류가 없다는 것이지 번역된 자구 하나하나가 절대라는 것이 아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지만 인간의 언어. 그것도 인간이 만든 문자로 기록되었습니다. 우리는 '밥'이라고 하지만 어린아이는 '맘마'라고 한다. 이처럼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 인간의 언어로 번역된 것이므로 여러 가지 해석이 나왔다(이어령: 34-39).
지금까지 알려진 신구약의 발자취와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성경은 약 1500년 동안(BC1400년부터 AD100년) 사이 40명의 저자가 저술하였으나 그 주제에 일관성이 있고 모순이 없다는 점에서 현실적인 저작자는 다르지만 실질적인 저자는 성령으로 보고 있다(디모데 후서 3장 16절).
둘째, 구약성경에는 예수님의 탄생과 삶에 대한 예언들이 있으며, 신약에서 그 예언들이 성취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예언 성취가 성경의 신성함을 증명하는 요소라고 본다.
셋째, 신약성경은 기독교의 경전 중 하나로,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가르침, 초기 교회의 형성과 발전, 기독교 신앙의 핵심 교리를 담고 있다. 이 성경은 약 1세기 동안 다양한 저자에 의해 기록되었으며, 총 27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넷째, 성경에 언급된 많은 사건, 인물, 장소가 역사적인 사실로 증명되면서, 성경의 신뢰성을 뒷받침하고 있다.
다섯째, 많은 신자들은 성경이 자신들의 삶에 실제적인 변화를 도모한다고 믿는다. 그들의 영적 경험과 성경의 가르침이 맞물려, 성경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맺게 하는 특별한 책으로 인식되기도 한다.
결국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믿음은 이러한 논리적 증거와 더불어 신앙적 차원에서 받아들여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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